山河(산하) : <여행> 136

하늘재(鷄立嶺)풍경

하늘재(鷄立嶺)는 하늘과 땅,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던 길이며, 과거와 현세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은 하늘재(鷄立嶺) 고갯길이다. 계립령(鷄立嶺) 또는 대원령으로도 불리던 하늘재는 문헌에 처음 등장하는 우리나라 최초(1.860여년 전)로 뚫린 고갯길이다. 鷄立嶺(하늘재)가 문헌으로 처음 나오는 것은 이러하다. *삼국사기 권2 신라본기 아달라 이사금 3년(156년) "여름 4월에 계립령(鷄立嶺) 길을 열었다 *삼국사기 권41 열전 김유신조 고구려에 도움을 청하러 간 김춘추에게 보장왕이 "마목현과 죽령은 본래 우리땅이니 돌려주지 않으면 보내주지 않겠다". *삼국사기 권42 열전 온달조 계립령과 죽령 북쪽땅을 찾지 않으면 되찾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 *고려사 고려 고종42년(1255년)10월 몽고장수 차라대가 ..

망댕이窯박물관

하늘재와 포암산 산행후 둘러본, 문경 망댕이窯박물관 망댕이窯박물관(문경백자8대종가) 경북 문경 관음리 하늘재 밑에서 8대째 도공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문산(聞山) 김영식 도예가는 조선 현종9년 인 1843년에 제작된 문경 관음리 망댕이 가마를 윗대로 부터 물려받아 지금껏 조선요 300년 계보를 장손으로 이어오고 있는데, 현재 160여년 된 망댕이 가마는 최근 경상북도 민속자료로 지정이 됐다. 하늘재와 포암산 산행후 둘러본 문경 망댕이窯박물관

오도재(悟道嶺)

오도재(悟道嶺)는 경남 함양군 휴천면(삼봉산 1176m)에서 지리산으로 들어가는 고개 정상에 지리산제일문(智異山第一門)이라고 하는 성문이 지어져 있으며 경사도와 굽이가 아주 급한 고개길이다. 오도재의 유래 : 오도재는 전라도 광양, 경남 하동지역의 소금과 해산물을 운송하는 중요한 관문이었다. 가야 마지막 왕이 은거 피신할 때 중요한 망루 지역이었고, 임진왜란 당시는 서산, 사명, 청매등 승군이 머물렀던 곳으로, 조선시대는 점필재 김종직, 김일손, 유호인, 정여창 등 시인 묵객이 지리산 가는길에 잠시 땀을 식힌 곳이다......

상생의 손과 호미곶 광장

호미곶(호랑이 꼬리) 광장에는 '상생의 손'이라고 불리는 손 모양 조형물이 있습니다. 왼손은 땅 위에, 오른손은 바다에 세워진 이 손은 2000년, 새천년을 맞아 두 손을 맞잡고 도우며 잘 살아가자는 바람을 뜻합니다. 조형물은 두 손이 상생(상극의 반대)을 의미한다. 찬란한 해돋이를 볼 수 있는 날에는 손 안에서 피어오르는 붉은 '해'가 볼 만하다. 호랑이 꼬리를 닮은 경북 포항시 남구 대보면 대보리의 해맞이 명소의 호미곶은 `상생의 손`으로 유명 합니다.해맞이 광장이 들어서서 `한민족 해맞이 축전`이 열리는 등 전국적인 명소가 됐으나 지도에 기록된 정식 명칭은 장기곶이어서 혼란을 빚어왔습니다. 호미곶은 원래 "말갈기처럼 생겼다"해서 조선시대에는 장기곶으로 불렸으나, 1918년 일제가 곶(串)을 일본식 ..

호미곶(대보) 등대

언제나 그날처럼 바닷가는, 바위에 부딧혀 하얀 파도를 일으키며 부서지고, 갈매기는 또 무엇이 그리운지 오도마니 바위위에 앉아 하염없는 기다림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연인들은 뭇 시선들을 외면한체 서로의 어깨를 맞댄채 소곤거리며 정들을 나누고 있었지요. 그 맑디맑은 파란 파도와 갯내음 썩인 바람은 동해의 전형적인 풍경을 보여주고 있었답니다. 호미곶 등대(虎尾串 燈臺) 경상북도 기념물 제 39호 경북 포항시 남구 대보면 대보리 221-2 이 등대는 대한제국(大韓帝國) 광무(光武) 5년(1901)에 일본 선박이 대보리 앞바다의 암초에 부딪혀 침몰한것을 계기로 지어졌다. 프랑스인이 설계하고 중국인 기술자가 시공을 맡아 1908년 12월에 준공 되었다. 높이 26.4m의 팔각형으로 서구식 건축 양식을 보여준다. ..

연오랑 세오녀

포항시 대보면 호미곳 광장에 있는 연오랑과 세오녀상.. 2012년 6월 3일 신라 아달라왕 (阿達羅王) 즉위4년 동해 바닷가에 연오랑과 세오녀가 부부로서 살고 있었다. 하루는 연오가 바다에 가서 해조를 따고 있던중, 갑자기 바위가 연오를 싣고 일본으로 가 버렸다. 그 나라 사람들이 연오를 보고 이는 비상한 사람이다 하여 왕으로 삼았다. 세오는 그 남편이 돌아오지 않음을 이상하게 여겨 이리저리 찾다가, 남편이 벗어놓은 신이 있음을 보고 그 바위에 올라가니, 그 바위는 또한 그 전처럼 세오를 싣고 일본으로 갔다. 일본 사람들이 이를 보고 놀라서 왕께 아뢰니, 부부가 서로 만나게 되어 세오를 왕비로 삼았다. 이때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정기를 잃어 빛이 없어지니, 일관이 말하기를"우리나라에 있던 해와 달의 정기..

문무대왕릉<감포>

문무대왕릉(文武大王陵) (사적 제 158호) 신라 30대 문무왕(재위 661∼681)의 무덤이다. 동해안에서 200m 떨어진 바다에 있는 수중릉으로, 신라인들의 창의적인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문무왕은 아버지인 태종 무열왕의 업적을 이어받아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당의 침략을 막아 삼국통일을 이루었다. 또한 병부, 창부 등 중앙관청을 창설하였고, 지방통치를 위한 5소경제도와 9서당 10정의 군사제도의 기틀을 마련하는 등 국가 체제 완성의 기초를 제공하였다. 대왕암은 자연 바위를 이용하여 만든 것으로 그 안은 동서남북으로 인공수로를 만들었다. 바닷물은 동쪽에서 들어와 서쪽으로 나가게 만들어 항상 잔잔하게 하였다. 수면 아래에는 길이 3.7m, 폭 2.06m의 남북으로 길게 놓인 넓적한 거북모양의 돌이..

보길도 윤선도 원림 <2>

세연정(洗然亭) 세연(洗然)이란 주변경관이 물에 씻은 듯이 깨끗하고 단정하여 기분이 상쾌해지는 곳이라는 뜻으로, 고산연보(孤山年譜)에서는 1637년 고산이 보길도에 들어와 부용동을 발견했을 때 지은 정자라고 하고 있다. 정자의 중앙에는 세연정(洗然亭). 동쪽에는 호광루(呼光樓).서쪽에 동하각(同何閣). 남쪽에 낙기란(樂旣欄) .이라는 편액을 걸었으며 또 서쪽에는 칠암헌(七岩軒)이라는 편액을 따로 걸었다. 세연정(洗然亭) 세연정(洗然亭) 세연정(洗然亭) 판석보(板石洑) 우리나라 조원 유적 중 유일한 석조보(石造洑)로 일명 굴뚝다리라 부르며, .. 세연지 저수를 위해 만들었으며 건기에는 돌다리가 되고 우기에는 폭포가 되어 기에는 다리. 우기에는 폭포가 되어 일정한 수면을 유지하도록 만들었다. 보(洑)의 구조..

보길도 윤선도 원림 <1>

보길도 윤선도 원림( 甫吉島 尹善道 園林 ) 윤선도(尹善道 1587~1671년)는 조선중기의 시인이자 문신으로 본관은 해남, 자는 약이(約而). 호는 고산(孤山)이다. 고산은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등 여러 관직을 지내다 정쟁에 휘말려 파직되어 낙향. 해남에서 지내다. 병자호란 때인(1637년) 왕 인조를 돕기 위해 식솔(食率)을 거느리고 강화도로 향하던 중 삼전도(三田渡)의 치욕(恥辱)소식을 듣고 이에 통분(痛忿)하여 세상을 멀리하고자 뱃머리를 탐라(耽羅)로 돌려 항해도중 보길도(甫吉島)를 지나다 수려한 경치에 이끌려 황원포(黃原浦)에 배를 정박 보길도에 머물게 되었다.이때 고산의 나이 51세로 이후 1671년 돌아가실 때까지 7차례 보길도를 왕래 13년간 보길도에 머물면서 국문학사에 길이 남을 어부사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