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재(鷄立嶺)는 하늘과 땅,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던 길이며, 과거와 현세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은 하늘재(鷄立嶺) 고갯길이다.
계립령(鷄立嶺) 또는 대원령으로도 불리던 하늘재는 문헌에 처음 등장하는 우리나라 최초(1.860여년 전)로 뚫린 고갯길이다.
鷄立嶺(하늘재)가 문헌으로 처음 나오는 것은 이러하다.
*삼국사기 권2 신라본기 아달라 이사금 3년(156년) "여름 4월에 계립령(鷄立嶺) 길을 열었다
*삼국사기 권41 열전 김유신조 고구려에 도움을 청하러 간 김춘추에게 보장왕이 "마목현과 죽령은 본래 우리땅이니 돌려주지 않으면 보내주지 않겠다".
*삼국사기 권42 열전 온달조 계립령과 죽령 북쪽땅을 찾지 않으면 되찾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
*고려사 고려 고종42년(1255년)10월 몽고장수 차라대가 이끄는 몽고군이 대원령을 넘자 충주에서 정예군을 보내 천여명을 죽였다
*삼국유사 미륵대원 계립령동령야(彌勒大院 鷄立嶺東嶺也)
*신증동국여지승람 사람들은 계립령을 마골점이라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관음원은 계립령 아래 있다
이렇게 문헌에 나오는 것 같이 계립령은 예로부터 많은 사람이 왕래하던 곳이었다. 우리가 길의 크고 작음을 따질 적에 그길이 서로 연결하는 도시의 크기로 하듯이, 고개나 나루의 크기를 가늠할 적에도 서로 연결하는 양쪽 지역 공간의 크기로 결정된다. 쉽게 말하자면 그 길에 있는 고개나 나루의 통행량에 따라서 결정된다는 얘기이다. 그래서 통행량이 많은 길목을 요충이라 한다. 그래서 이런 길에는 전설과 역사의 흔적이 남아 있기 마련이다. 길옆 미륵리 절터는 나라 잃은 망국의 한을 품고 금강산에 들어가다가 신라의 마지막 태자인 마의태자가 꿈의 계시를 받고 하늘재를 넘어 이곳에 석실로 된 큰절을 세웠다고 하는데, 바로 북쪽을 바라보고 있는 미륵부처이야기이다. 이곳에서 북쪽의 봉오리는 월악산 영봉이다.
월악산에는 덕주사라는 절이 있고, 정상으로 가다보면 보물 제 406호로 지정된 규모가 매우 큰 마애여래불이 있다.
이 마애불은 마의태자의 동생인 덕주공주가 세웠다고 하는데 남쪽을 향하고 있다.
즉 마의태자가 세운 미륵리석불과 덕주공주가 세운 덕주사마애불이 서로 마주 보고 훗날 미륵세계를 간절히 염원한 그런 애뜻한 전설의 미륵부처님이다. 북쪽으로는 충북 괴산군 미륵리(내세)와 남쪽으로는 경북 문경시 관음리(현세)가 경계를 이루고 있다..
하늘재 산장
하늘재 산장
하늘재 이정표
미륵리 가는길
하늘재에서 바라본 포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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