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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성송씨(冶城宋氏) 현령공파(縣令公派) - 12

야성송씨(冶城宋氏) 현령공파(縣令公派) - 12 영주(榮州) 산천서당(山泉書堂) -1   영주에는 현령공파의 괴동제사가 묘역 주변에 있고, 문정동(목골) 일원에 산천서당이 남아 있다. 산천서당은 원래 성재산에 있던 산천서원으로, 조선중기의 문신이었던 오운선생 外 네 분이 배향되고 있었으나 무오사화 때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다가 산천서당으로 재건 되었다. 지금의 산천서당은 본래 자리에서 이건 된 것이며 서원의 본 모습을 잃은 상태이지만 산천서원 현판과 더불어 중수 기문이 발견되어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1) 오운(吳澐) : 1540(중종 35)~1617(광해군 9). 조선중기의 문신 · 의병장 본관은 고창. 자는 태원(太源), 호는 죽유(竹牖) 죽계(竹溪), 할아버지는 언의(彦毅) 이며, 아버지는..

뿌리 2024.05.24

야성송씨(冶城宋氏) 현령공파(縣令公派) - 11

야성송씨(冶城宋氏) 현령공파(縣令公派) - 11 영주(榮州) 괴동(槐洞) - 1 괴동재사(槐洞齋舍)아래 사진은 2015년 재구종친회 영주 방문시 사진입니다.   * 괴동제사(槐洞齋舍)의 기문(記文)  영지산(靈芝山)이 영천(榮川)의 남쪽에 우뚝 솟아서 기세가 웅장하게 높았는데 그 한 지맥이 서쪽으로 오다가 물가에 다다라서 멈춘 곳을 괴동(槐洞)이라 말하고 괴동(槐洞)의 서쪽에는 옛날 평은역(平恩驛)이 있었는데 지금은 옮겨졌다. 빼어난 산천(山川)의 경관이 두 손을 마주 잡고 읍(揖)을 하는 듯이 둘러 않았으니 실로 영천의 빼어난 곳이다. 처음 우리 선조(先祖)이신 눌재공(訥齋公)께서 한훤당(寒暄堂) 김선생(金先生)과 금남(錦南) 최선생(崔先生)과 더불어 정지교부계(情志交孚契)를 맺었으니 김선생이 계첩(契..

뿌리 2024.05.23

야성송씨(冶城宋氏) 현령공파(縣令公派) - 10

야성송씨(冶城宋氏) 현령공파(縣令公派) - 10 눌옹선생유사(訥翁先生遺事) - 5 7. 계회도지(契會圖識)  계회도(契會圖) 기문(記文) 대체로 사람의 가정과 뜻은 반드시 선(善)한 사람과 선한 사람이 서로 의기가 투합하는 것이니 어진 사람과 서로 의기가 투합하다면 이 사람도 역시 어진 사람일 따름이다. 지금 이 계회도(契會圖)를 보건대 한훤당(寒暄堂) 김선생(金先生)이 맨 앞에 제목을 하여 그 그림의 이름을 정지교부(情志交孚)>라 했고 그 말미에 쓰기를 도(道)가 서로 같다.>라고 했으니 네 분 현자(賢者)의 도(도)가 한훤당(寒暄堂)과 더불어 의기가 서로 투합했다는 것을 알만할 따름이다. 그 도(道)가 현자(賢者)에게 서로 투합했다는 것은 현자(賢者)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아! 사람도 죽었고 세상도..

뿌리 2024.05.23

금계국

금계국 금계국이 낙동강변에 지천으로 피었다.2024년 5월 18일 꽃말 : 기쁨,  전설 :​옛날에 황금으로 만들어진 금 닭을 찾아 먹으면 온 세계를얻는다는 소문이 있었데요.​그래서 사람들은 금닭을 찾으러 여기저기 헤매이고 다녔데요그렇게 다니다가 금닭의 벼슬과 비슷하게 생긴 노오란 꽃봉오리를 보고 이게 금닭이구나!했답니다.​사람들은 그때부터이 노오란 꽃을 '금계국' 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야성송씨(冶城宋氏) 현령공파(縣令公派) - 9

야성송씨(冶城宋氏) 현령공파(縣令公派) - 9 눌옹선생유사(訥翁先生遺事) - 4 정지교부계회도(情志交孚契會圖)  생원인 김굉필(金宏弼) 갑술년(甲戌年 = 1454年)생이고 자(字)는 대유(大猷)이며 본관은 서흥(瑞興)이다. 부친은 어모장군으로 충좌위(忠佐衛) 호군(護軍)을 지낸 분으로 이름은 유(紐)이다. 생원인 송석충(宋碩忠)은 갑술년(甲戌年 = 1454年)생이고 자(字)는 원로(元老)이며 본관은 야로(冶罏)이다. 부친은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를 지낸 분으로 이름은 윤(綸)이다. 진사인 최부(崔府)는 갑술년(甲戌年 = 1454年)생이고 자(字)는 언박(彦博)이며 본관은 탐진(耽津)이다. 부친은 진사를 지낸 분으로 이름은 택(澤)이다. 진사인 박담손(朴聃孫)은 을해년(乙亥年 = 14..

뿌리 2024.05.20

야성송씨(冶城宋氏) 현령공파(縣令公派) - 8

야성송씨(冶城宋氏) 현령공파(縣令公派) - 8 눌옹선생유사(訥翁先生遺事) - 3 눌옹선생유사(訥翁先生遺事)는 영주에 처음 입향(입향)한 눌옹선생에 대한 기록으로서 원본은 1812(계유)년에, 국역본은 1990(경자)년에 출간되었다. 본관(본관)을 통해 가급적 소상하게 전하고다 한다.  4. 묘갈(墓碣) 무덤 앞에 세우는 묘비의 한 가지로 사적(事績)을 싣는 문체가 신도비와  같음 공(公)의 휘(諱)는 석충(碩忠)이요. 자(字)는 원노(元老)로 합천(陜川) 야성인(冶城人)이다. 증조(曾祖)는 판결사(判決事 = 정3품)를 지낸 천우(千祐)이고 조부(祖父)는 현감(縣監 = 종6품)을 지낸 수겸(守謙)이며 고(考)는 현령(縣令 = 종5품)을 지낸 륜(綸)으로 영의정(領議政 = 정1품)을 지낸 한창(韓昌)의 따님..

뿌리 2024.05.20

야성송씨(冶城宋氏) 현령공파(縣令公派) - 7

야성송씨(冶城宋氏) 현령공파(縣令公派) - 7 눌옹선생유사(訥翁先生遺事)-2  2. 유사(유사) 종질(從姪) 야계 희규(倻溪 希奎)가 찬 하다.  희규(希奎)가 조용히 생각해보니 사람이 훈구대신(勳舊大臣)의 친척으로 태어나서 벼슬을 단념하고 또 서울에서 자라나 영달(榮達)의 꿈을 버리고 초연히 멀리 떠나서 스스로 옛 일민(逸民)처럼 된 것은 이것이 바로 불길(不吉)한 징조(徵兆)가 예견(豫見)되면 하루도 더 머물지 않고 떠난다는 의(義)로움이 있는 것이니 산림처사(山林處士)가 세상을 과감히 잊어버리는 따위가 아니라 오직 명철(名哲)한 은둔군자(隱遁君子)만이 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니 아마 우리 종숙부(從叔父)이신 눌옹선생(訥翁先生)이 그런 사람에 가깝다고 하겠다. 선생의 성(姓)은 송(宋)이며 휘(諱)는 ..

뿌리 2024.05.20

야성송씨(冶城宋氏) 현령공파(縣令公派) - 6

야성송씨(冶城宋氏) 현령공파(縣令公派) - 6 눌옹선생유사(訥翁先生遺事)-1 눌옹선생유사(訥翁先生遺事)는 영주에 처음 입향(入鄕)한 눌옹선생에 대한 기록으로서 원본1812(癸酉)년에, 국역본은1990년(庚子)년에 출간되었다. 본난(本欄)을 통해 가급적 소상하게 전하고자 한다.  사실(事實) 선생의 휘(諱)는 석충(碩忠)이요. 자(字)는 원노(元老)로 경태 갑술(1454, 단종 2)년 5월 28일 오(午)시에 한성 호현방(漢城好賢坊)의 본집에서 탄생하셨다.성화 갑오(1474, 성종 5)년에 옥천전씨(沃川全氏)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관성군 유(管城郡侑)의 후예이며 상호군 희철(上護軍希哲)의 따님이시다.정유(1477)에 생원시(生員試) 남궁찬방(南宮璨牓) 3등으로 입격(入格) 하였다.모두 41명이었다.선생은 ..

뿌리 2024.05.18

애국지사, 우강(友江) 송종익(宋鍾翊)

애국지사, 우강(友江) 송종익(宋鍾翊) 범어동 대구흥사단 건물엔. 우강 홀과 우강 송종익 의사 기념관이 있습니다.​아헌공 후손이지만 대구 계산동서 출생하고 약관에 미국으로가 도산 선생과 독립운동하며 일가와 인연이 끊어져 족보에도 누락 된 애국지사입니다도산을 모르는 국민은 없는데 우강을 아는 국민이 없어 참 안타까운 심정입니다(참조 : 송귀익 종원님 밴드글) 아래는 : (대구광역일보에서 가져옴)대구보훈청, ‘우강 송종익 선생 상’ 선정5월의 독립지사 ‘우강 송종익 선생’미주 동포 애국금 송금, 임시정부자금 조달 등 조국 독립 위해 헌신   흉상은 대구 수성구 대구경북흥사단지부에 있습니다대전국립묘지 제2묘역 대전국립묘지 제2묘역  대구지방보훈청은 5월 이달의 우리 지역 현충 시설로 대구 수성구 범어동에 소재..

뿌리 2024.0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