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성송씨(冶城宋氏) 현령공파(縣令公派) - 7
눌옹선생유사(訥翁先生遺事)-2
2. 유사(유사) 종질(從姪) 야계 희규(倻溪 希奎)가 찬 하다.
희규(希奎)가 조용히 생각해보니 사람이 훈구대신(勳舊大臣)의 친척으로 태어나서 벼슬을 단념하고 또 서울에서 자라나 영달(榮達)의 꿈을 버리고 초연히 멀리 떠나서 스스로 옛 일민(逸民)처럼 된 것은 이것이 바로 불길(不吉)한 징조(徵兆)가 예견(豫見)되면 하루도 더 머물지 않고 떠난다는 의(義)로움이 있는 것이니 산림처사(山林處士)가 세상을 과감히 잊어버리는 따위가 아니라 오직 명철(名哲)한 은둔군자(隱遁君子)만이 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니 아마 우리 종숙부(從叔父)이신 눌옹선생(訥翁先生)이 그런 사람에 가깝다고 하겠다.
선생의 성(姓)은 송(宋)이며 휘(諱)는 석충(碩忠)이고 자(字)는 원로(元老)로 부친께서 구성병물(構成炳物)이라고 호(號)하였으나 구성(構成)에 은거(隱居)한 군자(君子)이시다. 그리고 본관은 영남의 야로현(冶爐縣)으로 고려 목종(穆宗), 현종(顯宗) 때 문하성(門下省)의 좌간의(左諫議) (정4품)를 지낸 휘(諱) 맹영(孟英)이 야로현(冶爐縣)의 구정리(九政里)에서 성씨(姓氏)를 일으켜 관직에 재임중 수훈을 세워 야로현(冶爐縣)을 채현(采縣)으로 받아 야성군(冶城君)에 봉해졌고 그 후에도 대대로 고관이 배출되었다. 그 후 구(九)대를 지나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를 지낸 구(構)께서 성주송천리(星州松川里)로 이사 하였는데 이 분은 누차 상(上)을 간(諫)하다가 사자급(四資級)을 강등당했으나 선덕(善德)(명나라 선종의 연호)년 때에 본관(本官)으로 복직하는 특명이 내려졌다. 이 분이 낳은 야성군(冶城君)인 휘(諱) 길창(吉昌)은 충효(忠孝)가 겸전(兼全)하였고 개성윤(開城尹)을 지냈으며 이 분이 낳은 판결사(判決事)(정3품 당상관)를 지낸 휘(諱) 천우(千祐)는 선생의 증조부로 이상은 모두 정과(正科)에 급제하여 출세한 분들이자. 그리고 조부인 선교랑(宣敎郎)과 현감(懸鑒)을 지낸 휘(諱) 수겸(守兼)은 호가 소원옹(素園翁)이며, 우의정을 지내고 시호가 문경(文景)이며 호가경제(敬濟)인 권공 진(權公 軫)의 사위로 5남을 두어 자손이 번창하였고 통훈대부(通訓大夫)(정3품 당하관)와 현령(懸令)(종5품의 관직)을 지낸 부친의 휘(諱)는 륜(綸)인데 관동 백(關東 伯)을 지낸 증영의정 청주 부원군(淸州 府院君)의 직함이 내려지고 호가 관(觀)수정(水亭)인 창(昌)과 옹서(翁婿)간으로 이분이 한성 호현방(漢城好賢坊)에 이사하였으며 호는 경산자(京山子) 또는 청계옹(淸溪翁)이라고 한다.
선생은 경태(景泰) 5년(1454년) 5월 무인(戊寅) 오시(午時)에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영특하였으므로 경산공(京山公)은 “이 아이가 장차 훌륭하게 자라서 부모의 명예를 빛나게 할 것이다”라고 하며 그의 자(字)를 효남(孝男)이라고 하였고 그가 자라서 남보다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자 큰 외숙인 의정공(議政公)은 “이 아이가 참으로 내 생질(甥姪)답다”라고 하였으며, 점필재(佔畢齋) 김선생에게 수학할 때는 이미 큰 기반이 닦아져 있어 자신이 수양하는 학문에 열중하였다. 그리고 선생은 일찍 이윤(伊尹)과 백이(伯夷)와 유하혜(柳下慧)등 삼(三)인을 논하면서 “그들처럼 임(任)을 견디는 것과 화(和)함을 배우기는 어렵지만 청(淸)한 것은 배울 수 있다”고 하자 김선생은 “이 사람은 다음에 청백(淸白)한 명예를 떨칠 것이다”라고 하였다. 선생은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고 자매간에 우애가 돈독하였으며 정유(丁酉)년 (1477)에는 생원시(生員試)에 입격하여 명망이 자자하였다. 이때 어떤 정승이 선생에게 한번 만나기를 요구하였으나 끝내 선생을 만날 수 없었다. 선생은 천성이 돈후(敦厚)하고 강결(剛潔)하여 말을 삼가고 마음을 지켰다. 그리고 가난함을 참고 도(道)를 즐기어 명예를 바라지 않았으며 본래부터 감식(鑑識)(사물을 판단하는 식견)이 있어서 아무나 친구 삼기를 좋아하지 않아 사귀는 친우(親友)로는 국내의 추앙을 받는 도학자(道學者) 약간명 뿐이었는데, 성리학에 전념하여 예의로서 몸을 바르게 한 한훤당(寒暄堂)김굉필(金宏弼) 같은 분과, 고인(古人)을 믿고 의(義)를 숭상한 일두재(一竇齋) 정여창(鄭汝昌) 같은 분과, 간명하고 고상한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과, 영걸(英傑) 스럽고 훌륭한 금양(錦陽) 최부(崔溥)와 강개(慷慨)한 뜻을 가진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과 기절(氣絶) 지키는 일에 힘쓴 망헌(忘軒), 이주(李胄), 수헌(睡軒) 권오복(權五福)과,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는 장육(蔣六) 이별(李瞥), 영천(靈川) 박담손(朴聃孫)과, 남이 자신을 잘 알아주지 않아도 민망히 생각지 않는 숭양(嵩陽) 신희연(申希演), 인재(仁齋) 공인달(孔姻達)과 같은 일대의 명망이 있는 분들이 마음을 허락한 지우(知友)였다.
일두는 선생의 효성과 인자함을 칭찬하였고, 탁영은 청고(淸高)함을, 추강은 강하고 정직함을, 망헌은 가난한 중에도 도(道)를 고수하였음을, 한훤당과 금양은 나라가 무도(無道)하여도 용납할 수 있다고 칭찬하였다. 순실(醇實)하고 정직한 한훤옹과 지식이 해박한 금양옹과 덕행과 선행을 좋아한 박공(영천)과 너무 고결(高潔)하여 친구가 작은 신공(숭양)등 사현(四賢)이 그 뜻이 그토록 고상하였으며 친구를 맺은 것이 그토록 훌륭했지만, 선생과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어 서로 높이 추대하고 정의(情誼)도 금석(金石)과 같았으니 선생의 도학(道學)이 얼마나 정도(正道)였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선생은 친상(親喪)을 당하여 그 애통해하는 마음과 예절(禮節)을 행하는 절차가 지극할 뿐 아니라 인정과 치상(治喪) 범절이 아무 결함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거상(居喪)을 잘한다고 칭찬하였다. 그리고 초상과 제사범절에 있어서도 주선생(朱先生) (朱子) 가례(家禮)를 준수하여 힘이 다하도록 정성을 기울였고 이때부터 세상에 나갈 뜻이 없어서 수시 성균관에 나간 것도 별로 대단치 않게 생각하였다.
그리고 간혹 금양등 제공(諸公)과 한훤당 집에서 모여 놀다가 시사(時事)의 이야기만 나오면 미리 떠나기를 권고하였고, 한훤당도 “사화가 날 징조가 있으니 벼슬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는데 그 후 얼마 안 되어 사화가 일어나 희천(熙川)으로 유배되자 선생의 선견지명(先見之明)에 감탄하였고, 선생도 한훤에게 일찍 물러나도록 간곡히 권하지 못했음을 한탄하였다.
드디어 병을 핑계로 남쪽 지방으로 내려가 소백산 남쪽이자 강주(剛州)(영주의 구호)의 동쪽에 은거하였으니 처가의 옛 고장이기 때문이다.
선생은 두문불출하고 조용히 살았지만 마음이 답답하고 편치 못했다.
그 후 한훤당이 적소(謫所)에서 참화를 당한 부음(訃音)을 듣고 애도 문을 지어 그곳을 향해 조상(弔喪) 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자신이 평소에 저술하였던 글도 불에 태워 끝까지 인간 만사를 생각에 담지 않고 수시 집안 하인 및 노인들과 농사에 대한 이야기만 하였다.
가정(嘉靖) 삼(三)년(1524년) 정월 칠(七)일에 휴천(休川)의 본집에서 향년 71세로 작고하여 본군 남쪽인 평은역(平恩驛) 동쪽 산에 장례를 치루었다. 선생은 ‘치상(治喪)을 할 때 만장(輓章)도 하지 말고, 명정(銘旌)도 하지 말라’는 유명(遺命)을 남겼으므로 자손들은 대충 지행(志行)만 비석에 기록하여 그 묘 전에 세워 놓았으며, 도은(桃隱) 이수형(李秀亨)은 ‘진실한 눌언자(訥言子)는 두려워하고 삼가는 마음으로 어리석음을 고수하였다. 그는 경산공을 아버님으로 점필재를 스승으로 모시었고 일두와 한훤당을 친구로 하였다. 돌처럼 단단하게 도(道)를 닦고 호련(瑚璉) 처럼 소중한 재덕(才德)을 쌓았다. 일생동안 병을 핑계로 살아갔으니 그 심정은 가히 장탄식을 할만하다’는 만시(輓詩)를 읊었다.
배(配)는 옥천전씨(沃川全氏)인 관성군(管城郡) 유(侑)의 후예이며 생원, 진사, 호군등을 지낸 희철(希哲)의 따님으로 부덕(婦德)을 지녀 이런 군자(君子)의 배필이 되었다.
선생이 병을 핑계로 가사를 돌보지 않았을 때 이 부인이 내외사를 모두 맡아 남편을 받들고 손님을 접대하는데 모든 일을 적절히 잘 하였고, 자녀를 가르치는 일도 엄하고 자애로움을 구분하여 교독(敎督)하였으며 친정 부모에게도 출가외인이라고 해서 조금도 그 효성이 부족하지 않았다. 이 분의 나이는 선생보다 4(四)세가 적었지만 작고할 때 나이는 모두 71세로 선생의 묘 좌측에 부장하여 쌍분으로 모셔졌다.
선생은 슬하에 사남삼녀(四男三女)를 두었는데 엄(儼), 의(儀), 간(侃), 칭(偁), 사(四)남의 아들 들도 선세(先世)의 가훈을 이어받아 겸양하는 풍도가 있었고 삼(三)녀 중에 장녀는 이준근(李峻根), 차녀는 안배곤(安配坤), 삼녀는 정과(正科)로 좌통례(左通禮)를 지낸 권오기(權五紀)에게 출가하였다.
아! 선생은 이런 도덕을 지니고도 겸손하게 물러나 그 보답을 받지 못하고 임천(林泉)에서 작고하였으니 마땅히 그 자손들은 각기 남녀를 두어, 다 번창하여 후손에게 물려준 복을 받을 것이다.
이 희규(希奎)는 불민하여 그 비츨 들추어내지도 못하지만 오랜 세월이 흐르면 그 행의(行義)가 없어질까 싶어 삼가 그 증거에 의거 하여 우(右)와 같이 눌옹선생의 유사를 전한다.
종질 야계 희규(倻溪 希奎)가 지음
* 송희규(宋希奎)는 선생의 종질, 1494년~1558, 자는 천장(天章), 호는 야계(倻溪)이며, 시호는 충숙공(忠肅公), 관직은 부사(府使)를 지냄.
1519년 별시 문과에 급제, 흥해군수, 장령, 상주목사 등을 지내고 예빈시 정(正)으로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하여 대구부사(大丘府使)가 되었다가 왕의 외숙인 윤원형(尹元衡)을 탄핵하여 제거하라고 상소하다가 고산(高山)에 5년간 유배되었다. 시호는 충숙(충숙)이며 성주의 봉강서원(鳳岡書院)에 배향되어있다.
특히 선생과는 1494년에서 1524년까지 30년간 같은 시대를 지낸 종숙(從叔) 질(姪)간이다.
현령공(懸令公) 18代孫 준태(浚兌) 씀
참고 : 冶城宋氏 縣令公派 야성춘추 2011년 가을호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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