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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 우강(友江) 송종익(宋鍾翊)

공간(空間) 2024. 5. 17. 19:53

애국지사, 우강(友江) 송종익(宋鍾翊)

 

범어동 대구흥사단 건물엔. 우강 홀과 우강 송종익 의사 기념관이 있습니다.

아헌공 후손이지만 대구 계산동서 출생하고 약관에 미국으로가 도산 선생과 독립운동하며

일가와 인연이 끊어져 족보에도 누락 된 애국지사입니다

도산을 모르는 국민은 없는데 우강을 아는 국민이 없어 참 안타까운 심정입니다

(참조 : 송귀익 종원님 밴드글)

 

아래는 : (대구광역일보에서 가져옴)

대구보훈청, ‘우강 송종익 선생 상’ 선정

5월의 독립지사 ‘우강 송종익 선생’

미주 동포 애국금 송금, 임시정부

자금 조달 등 조국 독립 위해 헌신

 

 

 

흉상은 대구 수성구 대구경북흥사단지부에 있습니다

대전국립묘지 제2묘역

 

대전국립묘지 제2묘역

 

 

대구지방보훈청은 5월 이달의 우리 지역 현충 시설로 대구 수성구 범어동에 소재한 ‘우강 송종익 선생 상’을 선정했다. 송종익(宋鍾翊) 선생은 1887년 대구에서 출생해 1906년 미국으로 건너가 공립협회에 가입하면서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미국서 안창호와 함께 흥사단 설립

송종익(宋鍾翊, 1887. 2. 27~1956. 1. 7)선생은 1887년 2월 27일 대구에서 부친 송인구의 맏아들로 출생했다. 1905년 일본에 유학 후 큰 뜻을 펴고자 1906년 4월에 미국으로 건너가 소학교를 졸업하고 당시 한인들의 항일민족 운동단체인 공립협회에 가입했다. 1908년 3월 일제 통감부의 외교고문인 스티븐스가 일제의 한국의 보호국화를 왜곡 선전하자 전명운, 장인환 의사가 스티븐스를 처단한 사건이 있은 후 선생은 이들 두 의사의 법정 투쟁에 대비해 조직된 재판후원회의 재무로 선임돼 활약했다.

▣흥사단 미주본부를 이끌다

흥사단은 1913년 창단 이후 1920년까지 8년간 창단위원회에서 운영했고 1921년부터 이사부와 의사부, 심사부의 3부역원제가 실시 됐다. 선생은 1921년부터 1925년까지 이사부장을 맡았고 1926년부터 1936년까지는 이사부 재무원으로 안창호의 부재 시에는 실질적으로 흥사단을 이끌어 갔다. 흥사단은 미주지역에서 창단됐으나 중국에 흥사단 원동임시위원부와 국내에 수양동맹회와 동우구락부가 결성돼 세력을 확장해 갔다. 창립자인 도산 안창호는 1919년 상해에 임시정부가 조직되자 노동협판 등 정부요인으로 활동했으므로, 흥사단 미주본부의 사무는 선생의 주재 하에 이뤄졌다. 선생은 흥사단 활동뿐 아니라 개인적으로는 도산의 가족까지도 보살피는 등 헌신적으로 봉사했다.

선생은 중국지역 독립운동 세력의 지원을 위해 북미실업주식회사를 세워 재정 확충에도 힘썼다. 주식회사를 통해 적립된 자본으로 중국에 은행을 세워 독립운동 자금을 항시적으로 확보하고 국제간의 신용을 높인다는 원대한 계획이었으나 벼농사의 실패로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선생은 이후 대한인국민회와 재미한족연합위원회 등 미주지역의 주요 단체에서도 활동하지만 그 기반과 정신적 근원은 모두 흥사단에서 비롯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생은 평생을 흥사단에 헌신하면서 흥사단의 정신을 몸소 실천하는 한편 이런 정신을 널리 알리는데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으며 낮에는 백인의 집에서 품을 팔아 그의 동지를 보양하며 밤에는 서류를 만들어 단원들의 향단심(向團心)과 애국심을 일으키기에 힘썼다.

 

▣재미한족연합의원회 재무 관리자로 독립자금을 조달하다

1919년 3.1운동에 이어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선생은 미주 대한인국민회의 재무로서 대한민국임시정부 건설의 경비조달에도 참여했다. 1922년 1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는 대의회의 결의로 지방총회를 폐지한 후 미주 멕시코 쿠바에 있던 지방회들만으로 국민회를 재편성하고 북미 대한인국민회라 개칭했다.

그 후 일제가 만주사변을 도발하고 최후의 발악을 시도하자 1936년 5월 국민회는 미주 각 지역의 대표자들을 소집해 항일역량의 결집을 시도했다. 선생도 이에 참여해 김호, 이살음, 송헌주 등과 함께 항일 독립운동의 후원에 힘을 쏟았다. 선생은 총회관 건축위원에 선임돼 국민회의 중흥에 노력하는 한편 임시정부를 비롯한 중국지역 항일세력의 지원도 계속했다. 국민회는 특히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광복 때까지 외교사업과 국방후원 및 동포들의 전시안녕 보장을 주도하는 동시에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광복군 편성을 후원했다.

1941년 4월 하와이 국민회 및 동지회와 북미 국민회 등은 하와이 국민총회관에서 대한민족이 대동단결해 독립 전선에 역량을 집중하고 광복대업을 촉성할 것을 목적으로 해외 한족대회를 개최했다. 이는 중일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 등 세계정세의 변화에 호응하고 종래 분산적으로 전개되던 독립운동 및 지원 활동을 보다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미주지역 운동단체들의 통합을 논의하기 위한 모임이었다.

그 결과 대한민족의 독립운동과 항일전선을 통일하고 항일승리를 획득하기 위해 재미한인단체들을 규합, 그 역량을 집중해 일반 운동을 확대 강화할 것을 표방하며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를 조직했다. 한족연합위원회는 로스앤젤레스에 집행부와 호놀룰루에 의사부를 둬 각각 임원을 선정하고 1943년 봄까지 독립자금을 수합해 3분의 2는 임시정부에 보내고 3분의 1은 구미위원부에 보내 광복사업비에 보충케 했다. 선생은 미주대표로서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의 집행부 재무에 선임돼 이런 활동에 앞장섰다.

 

▣대한인국민회 부의장으로 활동

선생은 1941년 12월 대한인국민회 총회에 로스엔젤레스 대표로 참석해 부의장에 선출됐으며 1943년 9월 26일 개최된 한족연합회에서는 위원 겸 재무과장에 선임돼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1943년 9월 이승만이 영도하는 동지회가 재미한족연합위원회로부터 탈퇴하자, 1944년 연합위원회는 워싱턴에 별도로 외교사무소를 설치해 동지회의 외교사무소와 병립함으로써 외교활동에 지장이 생겼다.

이에 임시정부는 외교기관의 통일책을 강구해 1944년 8월 주미외교위원부를 폐지하고 새로이 주미외무위원회를 설치키로 하고 위원회의 인선을 재미한인사회에 일임했다.

이로 인해 미주와 하와이 각지에 있던 17개 단체 중에서 13개 단체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교위원부 개조안 발포에 의해 대표회를 열기로 동의했다. 1944년 10월 28일 13개 단체 대표들이 로스앤젤레스에 모여 재미 한인 각 단체 대표회를 열자 대표원의 자격으로 이에 참가해 15명의 주미외무위원회 위원을 선출 추천했는데 선생도 주미외무위원회 위원에 선임됐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동지회가 불참했다는 이유를 들어 이 인선을 인준하지는 않았다.

선생은 광복 후인 1945년 11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대표단의 일원으로 귀국해 조국재건과 흥사단 부흥에 힘쓰는 등 평생을 독립운동지원과 흥사단 정신의 발양에 헌신했다. 그 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한인사회를 위해 일하다가 1956년 1월 7일 별세했다.

현재, 그 후손이 선생의 뜻을 이어 우강사회복지법인을 섭립해 장애우들의 교육과 사회진출에 힘쓰고 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김진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