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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성송씨(冶城宋氏) 현령공파(縣令公派) - 6

공간(空間) 2024. 5. 18. 21:33

야성송씨(冶城宋氏) 현령공파(縣令公派) - 6

 

눌옹선생유사(訥翁先生遺事)-1

 

눌옹선생유사(訥翁先生遺事)는 영주에 처음 입향(入鄕)한 눌옹선생에 대한 기록으로서 원본1812(癸酉)년에, 국역본은1990(庚子)년에 출간되었다. 본난(本欄)을 통해 가급적 소상하게 전하고자 한다.

 

 

사실(事實)

 

선생의 휘()는 석충(碩忠)이요. ()는 원노(元老)로 경태 갑술(1454, 단종 2)528일 오()시에 한성 호현방(漢城好賢坊)의 본집에서 탄생하셨다.

성화 갑오(1474, 성종 5)년에 옥천전씨(沃川全氏)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관성군 유(管城郡侑)의 후예이며 상호군 희철(上護軍希哲)의 따님이시다.

정유(1477)에 생원시(生員試) 남궁찬방(南宮璨牓) 3등으로 입격(入格) 하였다.

모두 41명이었다.

선생은 한성의 호현방에서 한훤당(寒暄堂) 김선생(金先生)이 정능동에서 호현방으로 이사하였으므로 두 분은 한마을에서 사셨다. 두 분은 일찍 종유(從遊)하여 점필재(佔畢齋) 김선생(金先生) 문하에서 성리학(性理學)을 공부하였다.

경자(1480)년에 한훤당 김선생과 함께 정지교부계(情志交孚契)를 맺어 경사(經史)를 강론(講論)하고 도의(道義)를 연마하였다. 그리고 한훤당이 합천(陜川)으로 이사한 후에도 한성에 있을 때와 다름없이 종유하였다.

선생은 일찍이 말은 충성스럽고 신의(信義)가 있어야 하며, 행실은 독실하고 공손하게 하는 것이 수신하는 첫째의 방법이 될 것이다.”라고 하며 자리 우측에 써 붙여놓고 자경문(自警文)으로 삼았다. 그리고 말은 느리게 하고 행동은 민첩하게 하는 것이 고인(古人)들의 수신(修身)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나는 행동은 민첩하지 못하드라도 말을 참는 것은 가능하다라고 하며 서재의 편액(扁額)을 눌옹(訥翁)이라고 하였다.

선생은 본래 사족(士族) 집안에서 태어나 그 인척들도 모두 대대로 나라에 공훈이 있는 집(조모 권씨는 제상의 따님이고, 모친 한씨는 수상의 따님이므로 안순왕후와는 내외형제가 된다.)들이었으므로 조정에는 친척들이 많이 있었지만, 선생은 두문불출하며 부귀를 누리는 집 자제들과는 사귀지 않았다.

한훤선생은 후진을 양성하는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으므로 많은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이때 그를 비방(誹謗)하는 소리가 사방에서 일어나자 선생은 한훤선생에게 교육을 중지하라고 권고하고 신병을 핑계 삼아 영천 봉향면 휴천(榮州 奉香面 休川)으로 이사 하였다.

선생은 하향한 후 은둔생활로 세상을 등지고 살았다. 이때 어느 정승 반열에 있는 사람이 기어이 선생을 포섭하기 위해 음으로 사람을 시켜 벼슬을 하도록 권고하자 선생은 나는 말도 잘하지 못하고 몸도 병이 들어 벼슬을 할 수 없다.”고 사양하며 끝까지 불응하였다. 그리고 평일에 저술한 글과 친구 간에 오고 간 서신을 모두 불에 태우며 자제들에게 다시 간직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 후 갑자(1504)년에 한훤(寒喧), 금남(錦南), 탁영(濯纓), 망헌(忘軒), 읍취헌(揖翠軒)등 여러 사람들이 모두 참화를 당하고 일두(一蠹)와 추강(秋江)은 죽은 뒤임에도 분묘를 파헤치는 화를 당하자 선생은 문을 닫고 혼자 슬퍼하며 더욱 자취를 숨기고 살다가 세상을 마쳤다.

황고(皇考) 현령공(縣令公)이 여러 고을의 관직을 거치면서 청백한 기풍을 가정에 전하였으므로 선생은 남쪽 지방으로 내려간 후 가정이 매우 가난해도 편안히 여기었다. 그리고 독서를 마치면 많은 기예(技藝)를 닦아 활을 쏠 때는 반드시 표적을 맛추었고, 서화에도 절묘한 솜씨를 발휘하여 극묘(極妙)한 경지에 도달하였다. 그리고 옛 전서(篆書)와 팔분체(八分體)에도 능하여 현령공이 전서로 쓴 황극론(皇極論), 추우찬(騶虞贊)과 팔분체로 쓴 추우송(騶虞頌) 및 가사(歌辭)를 선생에게 주었으므로 선생이 팔분체로 쓴 글씨가 전해졌다.

선생은 왕가의 외척으로 혼조를 만나 상종하는 친구마다 당적을 가진 현사들이므로 선생이 격은, 어려움은 제현에 비해 더욱 혹심하였다. 그러나 누차 사화를 겪으면서 그들의 모함을 벗어남으로 사람들은 그의 명석함에 탄복하였다.

가정 갑신(1524, 중종 19)년 정월 초 7일에 향년 71세로 휴천(休川) 본제에서 작고하였다.

4남과 3녀를 두었다.

 

참고 : 冶城宋氏 縣令公派 야성춘추 2011년 봄호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