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123

[스크랩] 조선왕조실록의 충숙공(忠肅公)관련 사료 (중종,中宗)

중종 27년 지금 경상도 관찰사의 서장(書狀)을 보니, 예안 현감(禮安縣監) 곽위(郭瑋)가 관노(官奴) 죽동(竹同)에게 함부로 가형한 일로 잡아 가두려 했는데 도망갔다고 한다. 함부로 가형만 했을 뿐 아니라 매우 잔혹하게 죽이기까지 했다 하니, 끝까지 그를 찾아내어 그 사실을 추국하여야 한다. 그런데 안동 판관(安東判官) 안수흠(安秀짷)과 현풍 현감(玄風縣監) 송희규(宋希奎)는 엄하게 수포하지 못하고 그를 도망하게 하여 죄인을 잡히지 않게 만들었으니, 즉각 그들을 가두고 추고(推考)하도록 관찰사에게 하유하라.” 【원전】 17 집 372 면 중종 33년 경상도 관찰사 강현(姜顯)의 승출 서장(陞黜書狀)을 정원에 내리면서 일렀다. “초계 군수(草溪郡守) 이수복(李壽福)이 한 짓은 매우 그르다. 이와 같은 일..

뿌리 2017.01.02

12대조 아헌공(啞軒公) 할아버지의 10폭 병풍

12대조 아헌공(啞軒公)할아버지께서 쓰신 10폭 병풍 (번역본) 12대조 아헌공(啞軒公)할아버지께서 쓰신 10폭 병풍일부~ 宣武原從功臣錄勳(선무 원종공신녹훈) (임란공신)-宣祖三八年(선조삼십팔년) 송원기(宋遠器) 자는 학무(學懋) 호 아헌(啞軒)이며, 휘(諱) 원기(遠器) 야성송씨(冶城宋氏)이다. 명종 6년(1548년) 통례원(通禮院) 인의(引儀) 응규(應奎)의 손(孫)자이며, 교위(校尉) 휘 사호(師顥)와 의인(宜人) 팔거도씨(八莒都氏) 사이에서 출생 하셨다. 종조부 충숙공(忠肅公) 희규(希奎) 호 야계(倻溪) 또는 야계산옹(倻溪散翁), 숙부 사이(師頤) 호 신연(新淵)공 두분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성품이 근엄하고 굳세었으며, 효성과 우애를 온건히 갖추었다. 선조(宣祖) 6년 (1573년 癸酉..

뿌리 2016.02.09

啞軒公 墓祀(아헌공 묘사)-12대조

贈司諫院獻納(증사간원헌납) 啞軒先生冶城宋公諱遠器之墓(아헌선생야성송공휘원기지묘) 配恭人仁川李氏(배공인인천이씨) 祔(부) 宣武原從功臣錄勳(선무 원종공신녹훈) -宣祖三八年(선조삼십팔년) 송원기(宋遠器) 직장공파(直長公派) 선무랑통례원(宣務郞通禮院) 인의(引儀) 응규 (應奎)의 손(孫), 원기(遠器) 초호 후촌(後村) 호 아헌(啞軒)은 교위(校尉) 사호(師顥)의 차자(次子)이며, 증조부 충숙공(忠肅公) 희규 (希奎) 호 야계(倻溪)공과 숙부 사이(師頤) 호 신연(新淵)공 두 분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선조(宣祖) 6년 (1573년 癸酉年) 중사마양시에 합격하여 진사(進士)에 오르시고, 선조(宣祖) 25년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때 백씨(伯氏) 원도(遠度) 호 경헌(敬軒)과 함께 사재(私財)와 모곡(..

뿌리 2015.11.25

[스크랩] 송씨(宋氏), 송가(宋家)

아래 문헌은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문헌이며 제일 아래의 그림은, 국립고궁박물관 소장그림이다 송씨(宋氏), 송가(宋家) 송(宋) 태조 송씨의 도시조 송씨(宋氏)는 주무왕(周武王)이 미자(微子)를 송(宋)에 봉하니 그 후손들이 나라 이름을 성으로 삼았다고 한다. [송씨상계세보(宋氏上系世譜)]에 의하면, 우리나라 모든 송씨의 도시조는 당(唐)의 호부상서 송주은(宋柱殷)이라고 하는데, 그의 7세손인 송순공(宋舜恭)은 장자 성용(成龍), 차자 흥용(興龍), 삼자 인용(仁龍), 사자 복용(福龍)을 두었는데, 차자 흥용(興龍)의 후손은 연안송씨(延安宋氏)가 되고, 삼자 인용(仁龍)의 후손은 진천송씨(鎭川宋氏)가 되고, 사자 복용(福龍)의 후손은 홍주송씨(洪州宋氏)가 되었다. 송순공(宋舜恭)의 장자 성용(成龍)의 차..

뿌리 2015.09.30

송상도(宋相燾) 애국지사(愛國志士) 추모비참배

송상도(宋相燾) 애국지사(愛國志士) 추모비참배. 2015년 5월 17일 재구종친회 총회시 ~ 송상도(宋相燾) 애국지사(愛國志士) 선생은 1871 ~ 1946년 영주 눌재 선조의 후손으로 자는 성소(聖韶) 호는 기려자(騎驢子)로 어려서부터 한학에 심취되어 권상익 등 향내 제유(諸儒)와 교우하였으며, 당세의 명유인 곽종석, 전우 등을 역방(歷訪) 하면서 견문을 넓혔으며, 그는 경학(經學)보다 사학(史學)에 힘을 쏟아 중국 역대의 사적(史籍)을 섭렵 (涉獵)하였을 뿐 아니라 일찍이 조선왕조사의 편찬에 뜻을 두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명나라가 망한 뒤 기려도사(騎驢道士)가 명말(明末) 충신의 사적을 수집하였던 때에 따라 우리나라 애국지사의 사적을 편찬할 결심을 하고, 전국 방방곡곡을 ..

뿌리 2015.05.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