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문헌은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문헌이며
제일 아래의 그림은, 국립고궁박물관 소장그림이다
송씨(宋氏), 송가(宋家)
송(宋) 태조
송씨의 도시조
송씨(宋氏)는 주무왕(周武王)이 미자(微子)를 송(宋)에 봉하니 그 후손들이 나라 이름을 성으로
삼았다고 한다.
[송씨상계세보(宋氏上系世譜)]에 의하면,
우리나라 모든 송씨의 도시조는 당(唐)의 호부상서 송주은(宋柱殷)이라고 하는데,
그의 7세손인 송순공(宋舜恭)은 장자 성용(成龍), 차자 흥용(興龍), 삼자 인용(仁龍), 사자 복용(福龍)을 두었는데, 차자 흥용(興龍)의 후손은 연안송씨(延安宋氏)가 되고, 삼자 인용(仁龍)의 후손은 진천송씨(鎭川宋氏)가 되고, 사자 복용(福龍)의 후손은 홍주송씨(洪州宋氏)가 되었다.
송순공(宋舜恭)의 장자 성용(成龍)의 차자 정열(正烈)은 신평송씨(新平宋氏)가 되었다.
성용(成龍)의 장자 흥열(興烈)은 세아들을 두었는데 장자 자영(自英),차자 맹영(孟英),삼자 계영(季英)이다.
차자 맹영(孟英)은 야성송씨(冶城宋氏)가 되고, 삼자인 계영(季英)은 김해송씨(金海宋氏)의 시조가 되었다.
홍열의 장자인 자영(自英)은 세아들을 두었는데 맏이 유익(惟翊), 둘째 천익(天翊), 셋째 문익(文翊)이다.
맏이 유익(惟翊)은 여산송씨(礪山宋氏), 둘째 천익(天翊)은 은진송씨(恩津宋氏), 셋째 문익(文翊)은 서산송씨(瑞山宋氏)가 되었다.
그 중 은진송씨는 중간 세계가 실전되어 천익의 후손인 대원(大原)을 1세조로 하고 있으며, 여산송씨와는 큰집 작은집으로 통하고, 서산송씨는 조선조에 현신교위(顯信校尉)를 지낸 이석(而碩)을 시조로 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우리나라 송씨의 본관은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172본이나 전재지고 있으나, 여산(礪山)·은진(恩津)·진천(鎭川)·남양(南陽)·김해(金海)·덕산(德山)·문경(聞慶)·신평(新平)·야성(冶城)·양주(楊州)·연안(延安)·용성(龍城)·철원(鐵原)·청주(淸州)·홍주(洪州) 등 20여 본관만이 현존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 중에서도 여산·은진·진천 등 세 송씨가 전체의 90%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밖의 송씨는 거의가 여산이나 은진에서 분파되었다고 한다.
현존하는 송씨는 도시조(都始祖) 송주은(宋柱殷)의 후손임이 분명하며 오늘날에 와서도 송씨(宋氏)끼리는 이본이라도 통혼(通婚)하지 않는것이 관습으로 전해지고 있다.
송씨 본관과 중시조
강음(江陰)·김해(金海)·나주(羅州)·남양(南陽)·덕산(德山)·문경(聞慶)·서산(瑞山)·신평(新平)·안산(安山)·야성(冶城)·양주(楊州)·여산(礪山)·연안(延安)·용성(龍城)·은진(恩津)·의성(義城)·죽산(竹山)·진천(鎭川)·철원(鐵原)·청주(淸州)·홍주(洪州)
강음송씨
시조는 송도보(宋道輔). 세계나 본관의 유래는 알 수 없다. 인구수 75(1985).
김해송씨
시조는 송천봉(宋天逢). 고려 충숙왕 때 괴과(魁科)에 장원하였고 감찰장령(監察掌令)·대사헌(大司憲)·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에 이르고 김해군(金海君)에 봉해져 김해를 관향으로 삼았다.
그 후 세계가 실전되어 송길정(宋吉貞)을 중조(中祖)로 하여 세계를 잇고 있다. 인구수 1만 6785(1985).
나주송씨
시조는 송용억(宋龍億). 송상계(宋商繼)의 아들로 1774년(영조 50)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전적(典籍)에 이르렀다 한다. 인구수 197(1985).
남양송씨
시조는 송규(宋奎). 당(唐)나라 말기에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있다가 신라에 와 경순왕조에 이부상서(吏部尙書)가 되었고 신라가 망하자 남양 송주동(宋主洞)에 퇴거, 여생을 마쳤다고 한다.
송세보(宋世輔)를 1세조로 하는 도촌파(道村派)와 송공절(宋公節)을 기세조(起世祖)로 하는 안서파(雁西派)가 종문(宗門)을 이룬다. 인구수 1만 8754(1985).
덕산송씨
시조는 송호산(宋壺山). 고려 때에 찬성사(贊成事)를 지냈다. 증손인 송문(宋文)이 호조판서로 공을 세워 덕성군(德城君;덕성은 지금의 덕산)에 봉해져 그의 후손이 본관을 덕산으로 하였다. 인구수 3961(1985).
문경송씨
시조는 송신경(宋臣敬). 고려 말 선덕랑(宣德郎)으로 북부령(北部令)을 거쳐 공부(工部)와 이부전서(吏部典書)를 지냈다. 고려말 정국이 혼란하였을 때 원주(原州)로 낙향한 후 다시 문경으로 피신, 은거하여 후손들이 문경을 관향으로 삼았다. 인구수 5459(1985).
서산송씨
시조는 송이석(宋而碩). 조선시대에 현신교위(縣信校尉)를 지냈다고 한다.
세계나 본관의 유래는 알 수 없으며, 다만 후손들이 여산에서 분적(分藉), 그를 시조로 삼고, 서산을 본관으로 세계를 이었다. 인구수 1432(1985).
신평송씨
⑴ 시조는 송구진(宋丘進). 고려 때 봉익대부(奉翊大夫)·서운관정 겸 습사도감판관(書雲觀正兼習射都監判官)을 지냈다. 여산송씨의 시조 송유익의 12세 손인 송말선(宋末善)이 홍주(洪州)의 신평에서 살았다고 한다.
신평에 세거한 송씨는 중간에 병화(兵火)로 보첨(譜牒)을 잃고는 계대(繼代)를 밝힐 수가 없게 되어 신평송씨와 홍주송씨로 갈라지게 되었다. 신평송씨는 다시 나누어져 송구진과 후손인 송자은(宋自殷)을 시조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인구수 542(1985).
⑵ 시조는 송자은(宋自殷). 조선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과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 등을 거쳐 순창군수(淳昌郡守)를 지낸 뒤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인구수 220(1985).
안산송씨
시조는 송유(宋維). 고려 때 호장(戶長)·중윤(中尹)을 지냈다. 문헌이 전하지 않아 세계를 알 수 없다.
인구수 63(1985).
야성송씨
시조는 송맹영(宋孟英). 고려 목종 때 간의대부(諫議大夫)·총부의랑(摠部議郎)을 지내고 야성군(冶城君)의 봉호와 야성현(冶城縣)의 식채(食采)를 받았다고 족보에 전한다. 인구수 1만 605(1985).
양주송씨
시조는 송도성(宋道成). 조선 장악원정(掌樂院正)을 지냈다. 본래 여산송씨에서 분관(分貫)했으며, 세계는 알 수 없다. 인구수 1632(1985).
여산송씨
시조는 송유익. 고려 때의 진사(進士)로 여산군(礪山君)에 봉해졌다. 그리고 4세손 송송례(宋松禮)가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에 봉해져 그를 중시조로 하고, 여산을 관향으로 계대한다. 인구수 20만 323(1985).
연안송씨
⑴ 시조는 송경(宋卿). 고려 공민왕 때, 찬성사(贊成事)·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등을 지냈으며 연안부원군 (延安府院君)에 봉해졌다. 연안을 본관으로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인구수 1만 271(1985).
⑵ 시조는 송지겸(宋之兼). 신라 박혁거세(朴赫居世) 때, 전고랑(典考郞)을 지냈다. 그 후 고려 태조 때, 소부소감(小府少監)을 지내고 염주백(鹽州伯)에 봉해진 송위(宋瑋)를 중시조(中始祖)로 하고, 고려 고종 때, 정조호장(正祖戶長)을 지낸 송한(宋罕)을 기세조(起世祖)로 하였다. 염주는 연안의 옛 이름으로 후손들이 관향을 연안으로 삼았다. 인구수 378(1985).
용성송씨
시조는 송엄향(宋嚴鄕). 조선 초 문과에 급제하여 창성부사(昌城府使)를 지냈고 용성군(龍城君;용성은 華城郡에 있던 지명)에 봉해졌다. 그 뒤 정변이 잇따르자 창원(昌原)의 오가리(五佳里)에 터를 잡고, 용성을 관향으로 삼았다. 인구수 3334(1985).
은진송씨
시조는 송대원(宋大原). 고려 때, 판원사(判院事)를 지냈고 은진군(恩津君)에 봉해졌다. 족보에 의하면 은진송씨의 시조는 송천익이나 그 이후의 세계를 실전하여, 후손 송대원을 시조로 하여 기세(起世)하고 본관을 은진으로 하였다. 인구수 17만 9247(1985).
의성송씨
시조는 송인창(宋仁昌). 1432년 (세종 14) 문과에 급제하여 헌납(獻納)을 지냈다고 한다. 본관의 유래는 알 수 없다. 인구수 287(1985).
죽산송씨
시조는 송광언(宋光彦). 별장(別將)을 지냈다고 하나 어느 시대 사람인지는 알 수 없다. 인구수 174(1985).
진천송씨
시조는 송순공(宋舜恭). 신라시대 대아찬(大阿飡)을 지냈다. 그 후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시대 진천백(鎭川白)에 봉해진 송인(宋仁)을 17세조로 하고 있다. 인구수 2만 5194(1985).
철원송씨
시조는 송화길(宋和吉). 고려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내고 동주군(東州君;동주는 철원의 옛이름)에 봉해졌다 한다. 인구수 522(1985).
청주송씨
시조는 송춘(宋椿). 고려시대 자헌대부(資憲大夫)·예부상서(禮部尙書)를 지냈다. 아들 송유충(宋有忠)이 청원군(淸原君)에 봉해졌고 손자 송훤(宋喧)이 서원군(西原君;서원은 청주의 옛이름)에 습봉됨으로써 후손이 청주를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인구수 7290(1985).
홍주송씨
시조는 송평(宋枰). 조선 세조 때, 조지서별제(造紙署別提)·세자익위사익위(世子翊衛司翊衛)를 지냈다. 그가 홍주에 세거했기 때문에 후손들이 홍주를 본관으로 삼았다. 인구수 6765(1985).
송(宋) 작자 미상, 송나라 사람이 그린 인물(宋人 人物)
화첩(畵帖), 비단에 수묵담채, 29 x 27.8 cm “역대화폭집책(歷代畫幅集冊)” 첫 번째 폭
이 그림은 한 선비가 평상에 걸터 앉아 깊은 생각에 빠져 붓을 들고 무언가를 쓰려고 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 옆에는 거문고와 바둑, 책과 그림 네 가지 물건과 음식이 놓여있고 동자가 옆에서 술을 따르고 있다. 평상 뒤에는 병풍에는 선비의 초상화가 그려진 족자가 걸려있다.
그림 속의 주인공은 문인이 즐기는 고상한 완상물(玩賞物)들을 곁에 두어 여유롭고 우아한 생활을 표현하고 있다. 그림 속의 인물은 왕희지(王羲之, 303-361)를 회상하는 것 같은데, 실제 송대 문인의 생활을 반영하고 있다. 남송시대에 유행했던 “향을 사르고, 차(茶)를 즐기며, 그림을 걸고, 꽃을 꽂아 장식하는” 것을 즐기는 정취가 북송 말에 이미 서서히 발전 중이었다는 사실을 이 그림을 통해 알 수 있다.
보통 “그림 속의 그림”인 병풍은 산수화가 그려져 있는 경우가 대부분으로 이 그림은 특이하게 화조화로 장식되어 있는데 이러한 예는 매우 드물다. 이 그림 속의 그림은 북송 말기 물가에서 노니는 새를 그리던 화조화의 양식이 반영되어 있을 뿐 아니라 화조화가 매우 유행했던 송 휘종(徽宗) 때의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
이 그림은 송나라 휘종(徽宗)과 고종(高宗) 그리고 청(清) 고종(高宗: 건륭) 등 황제의 소장품이었다.
청 고종은 그림 속 인물에 대해 매우 깊은 관심을 가지고 요문한(姚文瀚)에게 비슷한 구도의 작품을 그리도록 하였는데 그림 속의 인물은 선비의 옷을 입은 건륭 황제로 대치되어 건륭황제의 우아하고 한적한 문인 생활에 대한 동경을 드러내었다.
(국립고궁박물원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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