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야성송씨(冶城宋氏) 현령공파(縣令公派) - 3

공간(空間) 2024. 5. 15. 21:53

야성송씨(冶城宋氏) 현령공파(縣令公派) - 3

 

야성송씨(冶城宋氏)의 세거지(世居地) - 3

 

갈산3(葛山3= 아랫갈미)

 

체락정(棣樂亭)

 

1. 아랫갈미(下葛)의 지명유래

장수면사무소에서 예천 방향으로 2km쯤 가면 오른쪽에 아랫갈미(下葛)라는 마을이 있는데 혜계(慧溪)라고 부르다가 갈뫼 또는 갈미라고 불렀다.

이 마을은 조선조 1606(선조39)에 한양조씨 회계(檜溪) 조관(趙貫)등이 입향 하였는데 1698(중종24) 큰 수해를 당하여 조 씨들은 예천군 감천면 유동으로 이주한 후 야성송씨(冶城宋氏) 송사행(宋思行)의 후손들이 다시 개척하여 윗갈미와 구별하여 아랫갈미라 부르고 있다. 마을 앞에는 널찍한 들판이 있고 들판 너머로는 우곡천(파지천)이 흐른다. 우곡천 남쪽으로는 옥산”, 서북쪽으로는 성골”. “아랫갈미를 합쳐 갈산3리가 된다.

 

2. 갈미(葛味)로 이거(移居)

24세 휘() 사행(思行)공은 3형제(思孝, 思遠, 思行)중 셋째아들로 1766(영조42)에 출생하였다. 3형제분은 농사를 업으로 하시면서 소태고개(지천 : 지금의 경북 전문대 부근)에서 어렵게 사시다가 둘째분은 판관공파로 양자를 가시고 공께서는 가래(佳川) 으로 이거 하시어 생활하시다가 4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다. 이로 인하여 사행공의 부인과 세 아들(弘錄, 弘禎, 弘周)1815년 가래서 갈미로 입촌(入村)하게 되는데 견제공 집으로 양자를 간 장자 후 홍록(弘錄)공은 옥산에 자리를 잡았으며, 27세 휘 벽환(壁煥)공의 자손들은 여기에 속하며, 둘째 휘 홍정(弘禎)공은 아래살미에 자리 잡았는데 27세 규환(奎煥). 태환(台煥). 영환(英煥)공의 후손들이 여기에 속하며 셋째 휘 홍주(弘周)공은 성골에 자리 잡았는데, 26세 휘 상연(相淵), 상해(), 상순(相純), 상긍(相亘)공의 후손들이 여기에 속한다.

 

3. 체락회

갈미는 200여 년 전부터 우리 일가들이 살아온 집성촌이다. 지금까지 조상의 유업을 발전시켜왔고 예의범절을 숭상해오면서 효를 으뜸으로 여겨온 마을이다. 선조의 훈도로 말보다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을 보아오는 가운데 엄격한 가풍과 대가족에 대한 끈끈한 정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일찍부터 알게 한 전통마을이다.

체락회는 26세 상기(相錡)공의 아들인 규환(奎煥). 태환(台煥). 영환(英煥), 3형제분의 자손들로 이루어진 모임이다. 다시 말하면 갈미를 고향으로 하는 가까운 집안(親族)들의 친목 단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회원의 수는 360여 명이나 되지만 70여 명의 주소는 확인하기가 어려운 아쉬움도 가지고 있다.

갈미 소 문중 시제는 매년 음력 10월 두 번째 일요일이고, 갈미 체락정(棣樂亭) 유계에 모이는 날은 매년 음력 115일 날이다.

 

 

체락정(棣樂亭)

 

4. 체락정(棣樂亭)

체락정은 야성송씨(冶城宋氏)의 시조 휘() 송맹영(宋孟英) 공의 27() 규환(宋奎煥). 태환(台煥). 영환(英煥), 3형제분의 유정(遺亭)으로 형제간 우애소 문중 시제는 매년 음력 10월 두 번째 일요일이고, 가 남달리 돈독(敦篤)하여 사림(士林)에서 칭송이 자자했으며 특히 태환(台煥) 공은 법관(法官)으로서 승훈랑(承訓郎) 법관 양성소 교수(정육품)로 서울과 호남지방에서 애국애족의 명성이 높으시고 척강춘운(陟剛春雲)의 유지와 우애가 돈독함을 서술하여 종자(從子=조카) 모은 재수공(문예원 박사)의 주선으로 癸巳年(1933) 전면 3칸 측면 2칸 합 6칸을 건축 축대하고, 좌칸에 청심당 우칸에는 화락실당을 갖추어서 체락정(棣樂亭) 편액 하셨다. 사림에서 이에 부명(赴名)하고 매년 음력 115일 에는 유림회(儒林會) 정이로 정하고 유림들이 성시를 이루었다. 거사(居士) 이중철(李中澈) 및 호은 송계흠공의 기문(記文)과 지암 황영조공의 상량문등이 유하고, 체락정(棣樂亭)가 실기(實紀)가 간행(刊行)되었다. 그 후 1999(乙卯)년에 퇴락의 위험이 있어 정각과 기와 및 담장 등을 문회의 반론으로 중수(重修)하였다.

 

모은공(재수) 효행비

 

모은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