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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성송씨(冶城宋氏) 현령공파(縣令公派) - 5

공간(空間) 2024. 5. 17. 10:12

야성송씨(冶城宋氏) 현령공파(縣令公派) - 5

 

영주(榮州) 현령공(縣令公) 선조의 유사(遺事)

 

 

 

 

()의 휘는 윤()이요 자는 윤언(允言)이다. 송씨(宋氏)가 야성(冶城) 사람이 된 것은 고려조에 야성군(冶城君)에 봉해지고 벼슬이 간의대부(諫議大夫)인 휘 맹영(孟英)으로부터 비롯되었다.

10()를 전해 내려오는 휘 길창(吉昌)은 벼슬이 개성윤(開城尹)으로써 세습(世襲)하여 야성군(冶城君)에 봉해졌으며 휘 천우(千祐)는 벼슬이 판결사(判決事)요 휘 수겸(守謙)은 벼슬이 현령(縣令)이니 바로 공의 증조(曾祖)와 조부(祖父)와 아버지시다. 어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이니 우의정(右議政) 벼슬을 지낸 진()의 따님이며 다섯 장부(丈夫)의 아들을 두었으니 공이 그 넷째 아들이다.

아모 연월일(年月日)에 출생하여 젊어서부터 영특하고 뛰어나며 준수하고 민첩하여 실정에 어둡고 융통성이 없으며 정도가 아니게 엄격함은 달갑게 여기는 바가 아니었다.

조선 세조(世祖)8년 계미(癸未)(1463)에 무과(武科)에 등제(登第)하였으니 대체로 을해년(乙亥年)(1455)에 세조(世祖)가 왕위를 찬탈하고부터 선비들이 대부분 강직한 기개가 없이 남에게 영합하여 순종하며 자신을 편안하게 함을 보고 마음에 느낀 바가 있어 탄식하여 붓을 던지고 스스로 무과를 택하였다.

벼슬이 돈영부주부(敦寧府主簿)와 문의현령(文義縣令)과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와 개성경력(開城經歷)을 지냈으며 위계(位階)가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이르렀는데 임금에게 충간(忠諫)하는 말이 시대 상황에 어그러져서 영유현령(永柔縣令)으로 좌천(左遷)되었다.

조선 성종대왕(成宗大王) 2년 신묘(辛卯)(1471)에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참여했으며 아모 연월일(年月日)에 서울의 집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금천신림역(黔川新林驛)의 신좌(辛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배위(配位)는 청주한씨(淸州韓氏)이니 감사(監司) 벼슬을 지내고 영의정(領議政)에 증직된 청주부워군(淸州府院君) ()의 따님인데 아들 하나와 딸 넷을 낳았으니 아들 석충(碩忠)은 생원(生員)이요 딸은 공인달(孔仁達)과 이몽석(李夢石)과 손덕원(孫德源)과 벼슬이 병사(兵使)인 소희식(蘇希軾)에게 출가했으며 생원인 석충(碩忠)은 호가 눌재(訥齋)인데 호가 한훤당(寒暄堂)인 김굉필(金宏弼) 선생과 도의(導議)의 교분을 맺었으며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앞서서 영천(榮川)으로 물러 나와 살았고 자손이 많기를 3,000여 명에 이르렀으니 그 덕()이 있는 사람의 후손이 잘됨은 당연하다.

지금 생각하건데 세대(世代)가 멀어지고 서적(書籍)이 흩어지고 없어져서 그 영향(影響)을 찾을 수는 없지만 약간(若干)의 시문(時文)이 남은 것을 보면 모두 빼어나게 아름다워서 외어 볼만하고 필법(筆法)은 한 세상에서도 신묘하여 국가와 조정의 전자(篆字) 학문의 으뜸이 되었으며 호가 창계(滄溪)인 문경동(文敬仝) ()이 쓴 금강전문(金剛篆文)의 발문(跋文)에 말하기를 마음이 바르면 필획(筆劃)도 바르다고 했는데 지금 송후(宋侯)의 글씨에서 믿을 수 있다.” 라 했고 또 말하기를 여러 곳의 고을 수령을 지냈지만 받음과 줌에 있어서 구차하지 아니했다.”라고 했으며 남효온(南孝溫)공이 공()을 애도하는 만사(輓詞)에 말하기를 비단옷 물리치고 시서(詩書)를 했으며 크게 성취할 문한(文翰)이었네.”라 했고 또 말하기를 천추(千秋)에 나라를 떨치게 할 송경산(宋京山)일세.”라고 했으니 이는 백세(百世) 토록 믿을 수 있는 필적이니 어찌 후세 사람들의 말을 기다리겠는가?

젊을 때 한성(漢城)에서 장가들어서 경상도 경산(京山 : 경상도 성주(星州)의 옛 이름)으로부터 서울에 정착해 살았으며 스스로 호를 경산자(京山子)라고 했다. 공은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고관의 집안인데 또 권문경(權文景)공의 외손(外孫)이고 한청천(韓淸川)의 매부(妹夫)였다면 의지하여 더위잡고 올라갈 세도가 없다고 근심하지 않을 것인데 아래 관료로 낮게 돌면서 벼슬이 현달하지 못했으니 생각하는 바를 알 수 있을 따름이다.

 

 : 유사(遺事) · 전인(前人)이 남긴 사적(事跡)

 

진성이씨(眞城李氏)의 후손 이만인(李晩寅) 삼가 짓다.

현령공(縣令公) 16代孫 홍준(鴻俊) 

 

 

참고 : 冶城宋氏 縣令公派 야성춘추 2011년 봄호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