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성송씨(冶城宋氏) 현령공파(縣令公派) - 2
야성송씨(冶城宋氏)의 세거지(世居地) - 2
호구실(송호-松湖)
송고정(松辜亭)
호구실은 약 400년의 야성송씨(冶城宋氏) 세거지로서 우리 송문(宋門)이 처음 입촌하여 살게 된 것은 1617년 고송헌(孤松軒) 선조(1601~1676). 20世. 휘(諱) 시옹(時雍)께서 영주 휴천(休川)리 고택에서 분가하여 새살림을 차림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때는 1498년 우리 야성송씨(冶城宋氏) 영주 입향조인 눌재(訥齋, 선조(1454~1524, 15世 휘(諱) 석충(碩忠))께서 영주로 내려 오신지 119년의 세월이 지난 뒤의 일이다.
후손인 호은(湖隱) 선생이 쓴 고송헌 유사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선생은 15세에 결혼하고 그 해 가을에 종손(宗孫)이자 백부인 동추공(同樞公)을 따라 성주 회동(檜洞) 성묫길에 정 한강(鄭 寒岡) 장여헌(張旅軒) 두 대현(大賢)의 문하에 입문하였고, 17世에 이곳 호구실에 이사하게 되었는데 이곳을 찾게 된 동기가 따로 있었다고 한다. 당시 호구실은 강주군(剛州郡) 서면(西面) 호문촌(好文村)으로 서면에 자리한 의산서원(義山書院)을 중심으로 많은 유생들이 모여들어 학구열이 대단했던 터라 강서문풍(剛西文風)을 일의 킬 때라고 했다.
한편 광해군의 폭정과 잦은 북방 호적(胡敵)의 변란은 과거(科擧)의 뜻을 접게 하였고 두문불출하며 경사(經史)를 읽는 독서에 몰두하면서 세보(世譜)를 편찬하는 일,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금남(錦南) 최부(崔溥), 등 5현(賢)이 동석한 정지교부계회 영정(影幀)을 보수하는 일과 같은 문사에 열중하였다. 또 한 병자호란 때는 하성(下城)의 소식을 듣고 분개하여 평융론(平戎論)을 지어 뜻을 보이기도 했다.
호구실이란 전래 동명도 이 무렵 선생의 거처 호고재(好古齋)에서 연유했고, 송호(宋湖)란 지명도 ‘물은 송호요 잡은 고송이니·····’하는 스스로 지은 글에서 연유한 것이라 한다.
구전(口傳)에 따르면 송문(宋門)이 들어와 살기 전에도 몇 안 되는 원주민이 살고 있었는데 처음에는 능성구씨(綾城具氏)가 다음으로 의성김씨(義城金氏)의 마을로 지금도 뒷 등성이의 고총(古塚)들은 실전(失傳)되거나 절손(絶孫)된 그들의 묵뫼라고 전해지고 있으나 확인할 길이 없다.
약 400년간 후손들은 200세대 가까운 가구로 불었으며, 고송헌공파(孤松軒公派)에 속해 있으나 대다수가 생업 따라 외지로 떠나 살게 되었으며 고향을 지키는 가구는 10여 세대에 불가한 실정이다. 멀리 미국, 중국, 등에 이주하여 타 국적을 가진 후손들도 10여 세대나 되고 있어 이와 같은 국제화 추세는 계속될 전망이다.
고송헌공파 외에도 일가를 찾아든 이들과 함께 전성기를 이룬 때가 아마도 20세기 초엽인 것 같다. 효자 송고공(松皐公)(1839~1883, 29世 휘(諱) 정흠(程欽)의 누정(樓亭) 송고정(松皐亭)이 세워지고 당대에 고명한 학자이며 친아우인 호은공(湖隱公)(1856~1934, 29世 휘(諱) 계흠(啓欽)은 이곳을 학당으로 삼고 원근 각처에서 찾아온 문도들을 모아 훈육 편달에 열정을 쏟은 결과 훗날 오래도록 문인들이 뜻을 모아 학계(學契)를 만들어 보은의 의와 동문의 정을 도모하게 되었다.
호구실의 누정(樓亭)으로는 1918년 청송공(聽松公) 휘(諱) 위익(渭翼)이 선고(先考)의 지극한 효성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마을 서쪽 산기슭에 지은 정자로서 선인(先人) 호를 따서 송고정(松辜亭)이라 편액을 걸었다.
유적과 기념물로 “이종나무, 황새바위, 달방방구(달맞이 바위), 복고개(벗고개-붕현(朋峴), 고총(古塚)재, 밀방간(연자방앗간).” 들이 있어 온갖 전설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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