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星州) 고산정(高山亭) - 5
고산정(高山亭)의 유적(遺蹟) - 1
● 백세각(百世閣)
조선조 명종6년(1551)에 야계(倻溪) 송희규(宋希奎, 사헌부(司憲府) 집의(執義)가 양재역 벽서사건에 추론되어 을사명현(乙巳名賢)으로 전라도 고산(高山)으로 귀양을 갔다가 5년 만에 사면(赦免)되어 고향으로 방환(放還)하여 봉암산(鳳巖山)아래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포란지형(抱卵之形)의 길지(吉地)에 정면 7칸 측면 7칸 맞배지붕 입구(口)자 집을 지어 1552년에 완공하였으며 다시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학문 강론에 힘쓰며 제현(諸賢)들과 교유하며 유유자적(悠悠自適) 하였다. 백세각(百世閣)이란 당호는 “백세청풍(百世淸風)”에서 따온 것인데 봉암산 아래 종기(宗基)를 정한 야계선생께서 앞으로 자손들이 군자의 맑고 높은 덕(德)을 오래오래 이어가고 무궁토록 번성하기를 기원 했다고 한다. 이 집을 지을 때 못을 사용하지 않고 구멍을 뚫고 싸리로 얽었으며 대패질을 하지 않고 자귀만으로 깍아 다듬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집을 사용할 당시 수탉이 들어가면 울지 못하고 독수리가 날다가 집 위를 지나면 집의 기운을 이기지 못해 떨어져 날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으며 근년까지도 독수리 박제한 것이 집에 걸려 있었다.
또한 비가 오는 날 자정이 되면 말발굽 소리가 요란히 들려오기 때문에 이 집은 종손이 아니면 무서워 잠을 못 잔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또한 이 집은 1919년 3·1운동 이후 당시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우리의 독립을 요청하는 독립청원서를 보낼 것을 모의하고 성주 장날 만세운동을 준비한 곳이다.
당시 서울에서는 손병희 외 33인의 민족대표들이 대한독립선언서를 만들어 천하에 포고하고 모두가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칠 때 오직 유림(儒林)의 선비들만이 같이 동참하지 못해 뜻있는 선비들이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던 때에 파리에서 약소국가의 독립을 위해 만국평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을 접하고 공산(恭山) 송준필(宋浚弼)을 중심으로 종친(宗親)들이 모여 문회(門會)를 열어 독립운동에 문중이 다 함께 참여할 것을 결의하고,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과 더불어 의논하여 거창 다전(茶田)의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성주(星州)의 회당(晦堂) 장석영(張錫英)께 함께 거사할 약속을 승낙받고 통고국내문(通告國內文)을 작성해서 봉강서원(鳳岡書院) 대청마루가 감나무라 한 장을 빼내 목판을 만들어 수천 매를 인쇄하여 가기에 배포케 했으며 파리장서 초안을 가지고 10여일 동안 국내 유림인사들을 찾아가 서명을 받아오게 하였으니 파리장서에 서명한 인사가 137인이었다. 또한 백세각에서 성주 장날 만세운동에 사용할 태극기를 만들어 보관하고 종친들과 공산선생의 문도들로 하여금 만세에 참여할 사람들을 규합하여 선동 지휘하였다.
이 건물에는 백세각(百世閣)이란 당호(堂號)와 야계고택(倻溪古宅)이란 현판(懸板)이 있었으며 글씨는 한석봉(韓石峰)이 섰다고 하는데 1995년 화재로 인하여 소실 되었다.
건물 앞마당에 심은 연대는 정확한 고증이 없어 알 수는 없으나 400여 년이 넘었으리라 생각되는 회화나무 3그루가 이 집의 고색창연(古色蒼然)함을 더 해주는데 이 나무들은 풍수지리(風水地理)에서 봉소포란지형(鳳巢抱卵之形)이 화기(火氣)가 강해서 비보(裨補)로 심었다는 얘기도 전해온다.
건물 좌측에는 야계선생 불천위(不遷位)를 모시는 사당(祠堂)이 있으며 사당의 단청(丹靑)은 특이하게 사군자로 채색이 되어 있어 학문을 숭상하고 유풍(儒風)을 이어가는 조상의 음덕을 느끼게 한다.
1980년에 경상북도 유형 문화재 163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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