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곡(漆谷) 매남(梅南) - 4
《매양서원(梅陽書院)의 제향(祭享) 과 학문 (學問) 》
매향삼현지(梅陽三賢誌)[아헌(啞軒) 송원기(宋遠器), 매헌(梅軒) 송명기(宋命基),남촌(南村) 송리석(宋履錫)]
* 아헌(啞軒) 송원기(宋遠器)
본관(本貫)은 야성(冶城) 자(字)는 학무(學懋) 호(號) 아헌(啞軒). 명종(明宗) 6년(1548)에 성주의 유촌(柳村)에서 태어났다. 선조(宣 祖) 6년(1573) 생원(生員) 진사(進士) 양시(兩試)에 급제하였고, 선조(宣祖) 38년(1605)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錄勳)되 었으며, 광해(光海) 2년(1610) 경술년(庚戌年)에 문과(文科)에 급제 하여 권지성균관학유봉훈랑(權知成均館學諭奉訓郞)에 제수되었다. 인조(仁祖) 2년(1624) 동계(桐溪) 정온(鄭蘊)공이 경연(經筵)중에 청을 올려 사간원헌납겸춘추관기주관(司諫院獻納兼春秋館記注官) 증 직(贈職) 되었다.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묘갈을 썻고. 매양서원 에 제향되었다. 문집은 5권 2책이 있다.
어려서는 숙부(叔父)인 신연(新淵) 선생에게 수업하였고 한강(寒岡) 동강(東岡)의 문하에서 강론하여 학업이 날로 넉넉해졌고 덕행을 함께 수양하여 시묘살이 6년 동안 한 번도 집에 오시지 않고 예를 극진히 하였다. 장여헌(張旅軒) 서낙재(徐樂齋)등 여러 어진 분들과 도의(道義)로 교유하였다.
아헌(啞軒)선생의 문집서(文集序)에 말하기를 “공(公)은 한강(寒岡)보다 다섯 살이 적었으며 또 같은 마을에서 함께 자라서 선생이 공(公)을 보기를 염계(濂溪)¹⁸⁾ 선생이 초평(初平)을 대하듯 하였고 동래(東萊)¹⁹⁾선생이 반숙도(潘叔度)와의 관계 같았다. ”《公小寒岡五歲 而同里閈相長 先生之視也 則猶濂溪之初平 東萊之瀋叔度⟫라고 하였으니 선생과 공의 관계가 얼마나 돈독했는지를 알 수 있다.
공은 특히 문장(文章)에 탁월하여 가장(家狀)에 말하기를 “문장이 법도에 맞고 진중하며 온아하여 예원(藝院)²⁰⁾의 모범이 되어 당시 모든 유림의 상소하는 글과 사문에 관계되는 문장은 대부분 공의 손에서 나왔다.” 《文辭典重溫雅 爲藝苑模範 凡儒林疎章 及斯文關係文字 多出於府君之手 (家狀)⟫라고 하였다. 그 한 예로 모당일기(慕堂日記) 갑진(甲辰)(1604)년 4월 12일 조(條)에 말하기를 “학무사형첨지장이 추로(秋露)²¹⁾를 마시는 것으로서 좌우도통문(左右道通文)을 써와서 선생께 알리니 온당치 않은 곳이 많아 다시 학무를 맞이하여 의논하여 고치게 했다.”《學懋舍兄僉知丈 飮以秋露 書左右道通文 來證先生 多有未穩帖 更遨學懋 議改之 (慕堂日記)》라는 구절이 있다.
문집서(文集序)에 말하기를 “명나라의 진어사(陳御使)에게 올린 변무서(辨誣書)에 이르러서는 문장이 더욱 남보다 뛰어났다. 공(公)이 비록 조선의 보잘것없는 일개 선비였지만 눈을 밝게 하고 담력을 크게 하여 힘껏 임금이 모함당함을 밝혔으니 문장의 이치가 모두 완벽하여 서애(西厓)²²⁾와 월사(月沙)²³⁾ 두 노상(老相) 올린 문장보다 조금도 손색이 없었다.”《黃朝陳御使 辨誣一書 則其事 尤更卓絶 公以海外貌然匹士 跡不厠儐接之列 而乃能明目張 膽力伸 君父之見 誣其辭理俱臻 稍孫於厓沙兩老所呈呈文 (文集序)⟫라고 하였다.
참조 : 18) 염계(濂溪)선생 : 중국 북송시대의 유학자로 성리학의 기초를 닦았다.
정명도와 정의천 장횡거로 이어지는 도학의 단서가 되었다.
19) 동래(東萊)선생 : 중국 남송 시대의 학자 주자와 함께 북송시대의 도학 자들
이 어록을 편집하여 근사록을 엮었다.
20) 예원(藝院) : 전적(전적)이 모이는 곳을 말한다.
21) 추로(秋露) : 추로는 술을 말한다. 가을에 마시는 맑은 술인 듯 하 다.
22) 서애(西厓) : 선조 당시에 영의정을 지냈으며 퇴계의 문인 유성룡을 말한다.
23) 월사(月沙)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 자(字)는 성징(聖徵) 문장으 로
이름이 높았다.
여러 가지 실례를 들어 공(公)의 문장에 대한 사림(士林)에서의 명성을 알아보았지만, 이는 하나의 여사(餘事)에 지나지 않을 뿐 자랑할 일은 아니다. 정작 밝히고 싶은 것은 당시 조정에는 북인(北人) 정권이 득세하여 정권을 농단하고 있었는데 우리 아헌공(啞軒公)께서는 실세인 래암(來庵) 정인홍(鄭仁弘)²⁴⁾과도 학문적인 연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거기에 기대어 출세의 길을 가지 않았고 낙향하여 학문에 정진하며 초야에서 욕심 없이 일생을 마친데 있다 하겠다.
문집서(文集序)에 “공(公)이 사간원(司諫院) 헌납(獻納)에 증직(贈職)된 것은 동계(桐溪) 정온(鄭蘊)²⁵⁾이 경연(經筵) 중에 임금께 청한 것인데 후세에 위로 그슬러 올라가 말하는 사람들은 모두 덕행(德行)으로 보아서는 오히려 벼슬이 부족하다고 말하였다. 진실로 부귀는 얻기 쉽지만 명절(名節)은 세우기 어려운 것이다, 만일 공(公)으로 하여금 정인홍(鄭仁弘)과 이이첨(李爾瞻)²⁶⁾의 사이에서 힘써 거취를 분명히 하지 않고 녹봉과 벼슬의 기회를 탐하였다면 지금 후세의 공론을 이렇게 얻을 수 있었겠는가. 이것이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깊이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이다.”라고 하였다. ⟪公臺憲之 贈 實鄭桐溪筵中所陳請 而後之尙論者 咸曰視德 猶歉 信乎富貴易得 名節難立 而如使公 黽勉於弘瞻之間 去就不明 錄位不甚蹉跎 則其何能得此於後世之公論乎 是則讀是集者 尤宜着眼處也 (文集序)⟫
참조 : 24) 정인홍(鄭仁弘) : 조선 중기의 문신 남명 조식의 문인 호는 내암(萊庵) 북인
의 영수
25) 정온(鄭蘊) :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휘원(輝遠) 호는 동계(桐溪) 정 구의 문
인 시호는 문간(文簡)
26) 이이첨(李爾瞻) : 조선 중기의 문신 대북의 영수 연산군 때 무오사화 (戊午
史禍)를 일으킨 이극돈의 후손이다. 정인홍의 가르침을 받았고 허 균과 친
밀하게 지냈다.
* 매헌(梅軒) 송명기(宋命基)
본관(本貫)은 야성(冶城) 자(字)는 정부(定夫) 호(號) 매헌(梅軒)이 다. 공(公)은 숙종(肅宗) 6년(1680) 고평리(高平里)에서 태어났다. 영조(英祖) 3년(1727) 정미(丁未)에 성균진사(成均進士)에 급제하셨다. 그러니 당시 노론(老論)의 세상에 뜻을 펼칠 수 없음을 깨닫고 한양으로 올라가시다가 도중에 낙향하여 평생 학문에 뜻을 두었다. 매양서원(梅陽書院)에 제향 되었다.
공(公)의 학문은 성경(聖經)과 현전(賢傳)을 근본에 두었다고 심성이기설(心性理氣說) 등을 발명하여 그림을 그려 천명하니 평생 주자와 퇴계선생의 학문을 따랐다. 손수 퇴계서절요(退溪書節要) 7책을 집필하였으며, 매산(梅山) 정중기(鄭重器)²⁷⁾에게 보낸 편지에 말하기를 “퇴계절요를 만든 것은 애초에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노년에 정력이 두루 볼 수 없을까 하여 주제넘게 중요한 말을 끊어 취하여 죽을 때까지 공경히 완상할 생각이었다.” 《退溪書節要 初非爲人傳覽 老境精力 不能遍看 僭妄節取要語 以爲抵死敬玩之計⟫라고 하였다. 지금 이 퇴계서절요는 연인 되어 집안에 널리 보급되었으며 때때로 조상의 친필을 어루만지면 숨결을 느끼곤 한다.
매헌공(梅軒公)께서 평생에 학문적인 동지를 들자면 서헌(恕軒) 이세형(李世珩)²⁸⁾이다. 공(公)은 칠곡의 지천면 상지리에 거주하시어 매남과 지리적으로 가까워 많은 편지를 주고받았다. 매헌집(梅軒集)에는 서헌(恕軒)과 왕복한 편지가 10통이 실려 있다. 인심도심(人心道心)에 대한 논변이 3통, 천명신구도(天命新舊圖)에 대한 논변이 3통,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의 여러 강목(講目)에 대한 논변이 2통, 상례(喪禮)에 대한 논변이 1통, 사단칠정(四端七情)과 중용도(中庸圖)와 대학도(大學圖)에 대한 논변이 1통이다. 그리고 칠곡군 지천면에 신리에 살았던 벗 강계범(姜季範)²⁹⁾과 왕복한 편지 3통도 모두 학문에 대한 논변이다. 또 정중거(鄭仲擧)³⁰⁾에 보낸 편지 2통도 인심도심(人心道心)과 심통성정(心統性情)에 대한 논변이다. 이로 서 알 수 있듯이 일생을 성리학 연구에 깊이 매진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아헌공(啞軒公)의 문집에 90여 수의 시가 실려 있다. 그중 많은 수의 시들이 성리학의 근본 개념인 주역과 인심도심(人心道心)과 사단칠정(四端七情)등과 성현에 대한 경외를 읊은 시들이다. 그 가운데 1수를 소개한다.
讀退陶書 퇴계서를 읽다.
密室調安最得宜 밀실에 편안히 조섭하여 모두 마땅함을 얻고
靜中對越卷中師 고요한 가운데 책속에서 스승을 마주하네.
如承警誨如將見 만일 공경히 가르침 받들어 장차 뵐 듯이 하면
霽月光風卽此時 제월광풍³¹⁾ 같은 사람을 뵘이 바로 이때로 구나.
참조 : 27) 정중기(鄭重器) :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도옹(道翁) 호는 매산(梅 山) 이현
일, 정만양, 정규양의 문하에 종유 하였다.
28) 이세형(李世珩) :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초백(楚白) 호는 서헌(恕軒) 총명
이 무리에서 뛰어났으며 포부가 컷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고 위기지 학에
힘썻다. 칠곡군 지천면 상지리에 살았다.
29) 강계범(姜季範) : 본관은 진주(晉州) 휘는 해(楷) 자는 계범(季範) 호는 기헌
(寄軒) 진사시에 합격하여 제릉 참봉에 임명되었지만 나아가지 않았 다.
칠곡군 왜관 석전리에 살았다.
30) 정중거(鄭仲擧) : 본관은 동래(東萊) 휘는 한필(翰弼) 호는 이용당(易容堂)
자는 중거(仲擧) 선조 정추(鄭錐)의 양졸재실기(養拙齋實記)를 편찬 하였
다.
31) 제월광풍(霽月光風) : 북송시대의 황정견이 주돈이를 존경하여 한 말이다.
그의 인품이 심히 고명하며 마음결이 시원하고 깨끗함이 마치 맑은 날의
바람과 비갠 날의 달과 같다. 《其人品深高 胸懷灑落如光風霽月》
看朱子大全有感 주자대전을 보고 감회가 있어
逐日卷中對我師 날마다 책 가운데서 스승을 마주하니
我師臨座警昏癡 나의 스승 자리에 임하여 어리석음 깨우처 주네
毫分縷析無餘蘊 털끝같이 작은 것도 분석하여 남김이 없고
地負海涵難際涯 땅과 바다 같은 넓은 학문 다 함이 없네
不爲常行寧遠騖 항상 행하지 않으면 어찌 멀리 달릴 수 있을까
除非心得孰深資 제거하여 마음을 얻지 못한다면 어찌 깊어 질까
吁嗟大哉肥羹味 아 크도다! 기름진 국 맛이여
日嘬那能飽且知 한입에 어찌 배부르고 또 맛을 알 수 있으리오
退溪書節要後敬次先生讀朱書韻
퇴계서절요 뒤에 선생이 ‘주서를 읽은’ 운에 공경히 차운하다.
洛閩之學孔顔心 주자, 정자의 학문과 공자와 안자의 마음이
日月東方掃翳陰 우리 동방에 비추어 어둠이 걷혔네
有志後生求大道 뜻있는 후생이 큰 도를 구하고자 한다면
發端先向此書尋 학문의 단서를 먼저 이 책을 향하여 찾아야 하리
盆梅死而更生喜而作
분매가 죽었다가 살아나니 기뻐서 짓다.
窓外東風動小盆 창밖에 봄바람 직은 화분을 흔드니
忽看生意闖枯根 홀연히 생기가 마른 뿌리에 보이네
從今培養須加力 지금부터 복돋워 기르는데 힘을 더한다면
早晩萌芽長十分 조만간 싹이 십 분 자랄 수 있겠지
兒輩學琴 아이들이 거문고를 배우다.
小兒初學琴 어린아이들 처음 거문고를 배우니
指澁難成音 떨리는 손가락에 소리 나기 어렵네
不合今人聽 지금 사람들의 귀에 부합하지 않지만
猶含太古心 오히려 태고심³²⁾을 머금었네
참조 : 32) 태고심(太古心) : 태고심은 태고적의 순수한 마음을 말한다.
회재 선생의 시에 “아양곡의 거문고 소리 알아주는 사람 아무도 없어
나홀로 가슴속 태고의 순수한 마음 어루만지네”라고 하였다. 峨洋絃上無
人會 獨撫胸中太古心⟫
* 남촌(南村) 송리석(宋履錫)
본관(本貫)은 야성(冶城) 자(字)는 백수(伯綬) 호(號)는 남촌(南村) 숙종(肅宗) 24년(1698)에 태어났다. 제산(霽山) 김성탁(金聖鐸)³³⁾의 문인이다. 경종(景宗) 1년(1721) 신축(辛丑)에 성균관(成均館) 진사(進士)에 급제하였다. 매양서원(梅陽書院)에 제향 되었다. 문집 7권 3책이 있다.
공(公)의 행장(行狀)에 공(公)이 이미 가르침을 받아서는 문사(文辭)와 필예(筆藝)가 교독(敎督)³⁴⁾을 번거롭게 하지 않고도 일찍 성취하였다. 비록 열 살 안 밖의 나이였지만 한결같이 부모의 경계와 타이름을 따라 순종하여 자제로서의 허물이 없었다.
참조 : 33) 김성탁(金聖鐸) :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진백(振伯) 호는 제산(霽山) 갈암
이현일의 문인 1735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사헌부지평이 되었다.
1737년 이현일의 신원소를 오렸다가 제주로 유배되었다. 그 뒤 광양으로
옮겼다가 배소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현일 김성탁 유치명으로 이어지는
퇴계학 맥을 이었다.
34) 교독(敎督) : 가르침을 감독한다는 뜻으로 글방의 선생을 말한다.
정유(丁酉)년에 청주(淸州) 정씨(鄭氏) 취묵당(醉墨堂) 치운(致雲)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다. 취묵당(醉墨堂)은 문행(文行)에 감식(鑑識)이 있어 공의 덕기(德器)가 일찍 이루어짐을 보고 사람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이 사람은 나의 지기이다.”라고 하였다. 무신(戊申)년에 모부인의 상을 당하였다. 기해(己亥)년에 부친 매헌(梅軒)공이 돌아가시니 공의 나이 58세였다. 곡하고 슬퍼하여 몸이 쇠약해졌지만, 조석(朝夕)으로 잔을 올려 비록 병이 나더라도 중단하지 않았다. 삼년상이 끝났어도 더욱 선조를 받드는 절도를 게을리하지 않아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의관을 정제(整齊)하고 가묘(家廟)에 배알 하였다. 기일(忌日)이면 비록 겨울 일지라도 목욕하여 옷을 갈아입고 책상을 마주하여 꼿꼿이 않아 회재(悔齎)³⁵⁾ 선생이 지은 봉선잡의(奉先雜儀)³⁶⁾를 읽고 반복적으로 자세히 고찰하고 연구하여 살아 계시는 듯이 하는 정성을 다하였다. 제사 지낸 다음 날은 반드시 사당에 절하고 분향하여 고례(古禮)의 역제(繹祭)³⁷⁾의 뜻을 부쳤다. 부모의 산소와 선대(先代)의 분영(墳塋)은 집과의 거리가 가까워, 오고 가며 들려 배알(拜謁)하니 자못 찾지 않은 달이 없었다.
신축(辛丑)년 회방(回榜)³⁸⁾의 달에 부친 매헌(梅軒)공의 산소에 성묘를 가서 한참토록 통곡을 하니 산 아래의 백성들이 감동하여 울지 않음이 없었다. 한 아우가 연노(年老)하고 곤궁하니 우애를 더욱 독실히 하고 사랑을 베풀어 곡식을 끊어지지 않게 하여 굶주리지 않게 하였다.
여동생 중에 월성(月城) 최씨(崔氏) 문에 시집간 사람이 있었는데 나이가 이미 60세가 넘었고 공도 이미 늙어 가서 볼 수가 없었다. 일찍이 공에게 편지를 보내서 멀리 떨어져 오래도록 보지 못한 생각을 서술하니 공께서 그 편지를 보시고 창연히 오래도록 자리 곁에 부쳐두고 날마다 반드시 보시고 얼굴을 대면하는 듯이 하였다. 공의 춘추(春秋) 84세는 바로 진사(進士) 회방(回榜)의 해니 그해 4월 9일 자제들이 경연(慶宴)을 베풀어 일가친척들이 모두 모이고 오랜 벗들도 다 오시니 안색이 활짝 펼쳐졌고 거동이 가볍고 편안해 보였으며 난삼(襴衫)
³⁹⁾옷을 입고 머리에 연건(軟巾)을 쓰고 빈객을 맞이하였다. 맏아들 또한 난삼(襴衫)과 연건(軟巾)⁴⁰⁾을 갖추어 곁에서 모시고 모든 자손들은 차례로 축수(祝壽)를 올렸다. 공은 종일토록 피곤한 기색이 없었고 밤이 이미 깊어서야 취침에 드셨다. 새벽에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 빗고 의관을 갖추니 정신과 기운이 조금도 손상됨이 없었다. 사람들이 모두 탄복해하고 기이하게 여겨 마치 신선인 듯이 바라보았다.
참조 : 35) 회재선생 : 본관은 여강(驪江) 자는 복고(復古) 휘는 이언적(李彦迪) 조선
성리학의 선구적인 인물 주희의 주리론적 입장을 정통으로 확립 하여 퇴계
에게 전해졌다.
36) 봉선잡의(奉先雜儀) : 조선중기의 문신 회재 이언적이 조상의 제사를 모시는
제반 예식에 관하여 편찬한 책으로 주자의 가례와 선유들의 여 러설을 바탕
으로 하였다.
37) 역제(繹祭) : 제사 다음날에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 제사를 지내고 그 다음
날에 다시 역제를 지내야 제례의 절차가 끝나는데 이때에 제사에 사용한
고기를 나누어 준다.
38) 회방(回榜) : 과거에 급제한지 60년이 된 해를 말한다.
39) 난삼(襴衫) : 사마시에 합격한 사람이 입는 공복을 말한다.
40) 연건(軟巾) : 사마시에 합격한 사람이 백패를 받을 때 머리에 쓰는 관 이다.
교유(交遊)한 사람은 반드시 문학(문학)과 행의(行誼)가 있는 선비였으니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과 수구암(數咎菴) 최흥원(崔興遠)을 가장 공경하고 중히 여겼다. 사람을 접할 때에는 비록 낮고 어리고 어리석고 천 하드라도 평온하게 대우하니 모두 기쁜 마음을 얻었고 성품과 도량이 너그럽고 온화하여 일찍이 급한 안색이 없었다.
일찍 성균진사(成均進士)에 급제하여 사책(射策)⁴¹⁾에도 여러 차례 합격하고 혹은 장원(壯元)을 하기도 하였지만, 문득 대과(大科)에는 불리하니 붕우들이 혹 한스럽게 여기면 곧 말하기를 “나를 향하여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나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중년 이후에는 바깥일에 생각을 끊고 서재에 고요히 앉아 세상의 연고를 벗어 던지고 날마다 경사(經史)로서 스스로 즐기고 더욱이 논어(論語)에 잠심(潛心)하여 낮에는 일고 밤에는 외워 빈객을 맞이할 때가 아니면 그치지 않았다.
문수(汶洙)에서 때로 지팡이 집고 소요(逍遙)하시다가 행차가 매양(梅陽)의 집에 이르게 되면 자질(子姪)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매양(梅陽)에 돌아 올 때에 피곤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항상 출발에 임하여 논어(論語)를 암송하니 큰 편은 아직 모두 외우지 못하고 집에 도착하지만 향당편(鄕黨篇)등과 같은 것은 집에 도착하면 이미 모두 외울 수 있다. 이 때문에 비록 걸어서 올지라도 피로함을 알지 못한다.” 하였다.
참조 : 41) 사책(射策) : 중국 한나라 때 과거의 한 과로 경서나 대책을 죽간에 써 놓고
수험자로 하여금 그 죽간을 뽑아 해석하게 하고 그것으로 우열을 정하던
시험.
정유(丁酉)년 여름에 공이 이미 80세에 수도산(修道山) 아래 무흘정사(武屹精舍)를 찾아 장서각(藏書閣)에 들어가서 아직 보지 못한 책을 열람하고 핵심적이고 중요한 말을 따내어 등사하여 책을 만드니 무흘장서각초록(武屹藏書閣抄錄)이라 이름하였다. 또 집에서 소장하고 있는 퇴계선생언행록(退溪先生言行錄)과 퇴계서절요(退溪書節要) 심경(心經) 아헌유집(啞軒遺集) 등서는 모두 이 해를 전후하여 손수 쓴 것이다. 문장(文章)은 여사(餘事)로 생각하여 저술을 즐겨 하지 않았다. 그러나 혹 다른 집의 자질이 선조(先祖)의 아름다움을 천양하고 사림(士林)이 청하는 것이 유림(儒林)의 일에 관계됨이 있으면 때때로 부응하여 지시하는 말과 운용하는 뜻이 반드시 절실하고 전아하게 하여 비록 안부를 묻는 서찰이라도 뜻을 방만히 하여 어지럽게 쓰지 않았고, 또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대신 쓰게 하지 않았다.
자제(子弟)들에게 서사(書史) 읽기를 권하여 행의(行誼)를 우선하게 하고 문예(文藝)를 뒤에 두게 하여 일찍이 말하기를 “세상의 자제들이 과거(科擧)의 문장에 뜻을 둔 자는 기교가 공교로울수록 마음은 더욱 파괴되니 이는 알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였다.
일찍이 한양에서 온 손님이 공에게 예를 바쳐 말하기를 “선생을 앙모한지 오래였습니다.” 하니 공이 말하기를 “선생이라 칭하니 어째서인가.” 하니 객이 말하기를 “문장이 있고 행실이 있는 분을 선생이라 합니다.” 하였다. 공이 소리를 크게 질러 말하기를 “객은이 말로 나에게 아첨하고자 하는가.” 하였다. 객도 사죄하고 떠났다.
경상감영(慶尙감영)에서 학덕으로 천거할 때 읍쉬(邑倅)⁴²⁾가 일찍이 공을 감사(監司)에게 알리고자 하니 공이 급히 읍쉬(邑倅) 대인에게 편지를 보내어 읍보서(邑報書)를 정지하기를 청하여 두 번에 이르니 읍쉬가 그 정성을 알고 마침내 그만두고 보고하지 않았다.
임인(壬寅)년 11월 10일 고종(考終)⁴³⁾ 하시고 명년 정월에 매남촌 후산 임좌(壬坐) 언덕에 장사지냈다.
공이 이미 몰하시니 향인(鄕人) 이익중(李益中)⁴⁴⁾과 이동헌(李東獻) ⁴⁵⁾등이 여러 사람에게 알려서 말하기를 “공(公)은 마땅히 호(號)가 있어야 하는데 일찍이 자호(自號)함이 없다. 이는 공이 이름 내기를 좋아하지 않은 뜻이다. 그러나 고인(古人)은 사사로이 시호(諡號)를 의논함이 있었으니 어찌 호(號)를 지어 후생(後生)의 존경하고 앙모(仰慕)⁴⁶⁾하는 정성을 부치지 않겠는다.” 하니 향인 들이 모두 옳다고 말하고 마침내 남촌선생(南村先生)이라고 호(號)를 지었다.
참조 : 42) 읍쉬(邑倅) : 고을 수령을 말한다.
43) 고종(考終) : 오복 중의 하나로 제 명대로 다 살고 편안히 죽음을 말 함.
44) 이익중(李益中) :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자삼(子三) 호는 한지당(寒 知堂)
이며 대사헌(大司憲)을 지낸 박곡(朴谷) 이원록(李元祿)의 증손이 다.
1729년(영조2)에 태어났다. 1759년 (영조 35)에 생원시에 합격하 였다.
기개와 도량이 뛰어나고 학문과 행실이 있었다. 칠곡군 지천면 신 리에
살았다.
45) 이동헌(李東獻) : 경북 칠곡군 지천면 신리에 살았다. 진사시에 합격했 다.
46) 앙모(仰慕) : 덕망이나 인품 때문에 우러르고 사모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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