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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星州) 고산정(高山亭) - 4

공간(空間) 2024. 4. 8. 20:27

성주(星州) 고산정(高山亭) - 4

 

계(倻溪)선생의 연보(年譜)

 

 

 

* 성종 25(1494) 성주 송천리 본제(本第)에서 출생하다.

 

* 연산군 6(1500) 선생 7

  소학(小學)을 읽고 다음과 같이 시를 지어 주위를 놀라게 하였다.

  『몸가짐은 다만 효도하고 공경하며 뜻을 세움은 요컨대 신의와 충성이다.

  만약 사람마다 이도리를 안다면 어찌 나라가 망하고 집이 망할 일이 있으 리오. (持身

  祗是孝而悌 立志要當信興忠 若使人 人知此道 則何亡國敗家有)

 

* 연산군 10(1504) 선생 11

   행정(杏亭) 도형(都衡) 선생(先生)에게 수학(受學)하시다.

 

* 중종 8(1513) 선생 20

   봄에 향시(鄕試)와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가을이 회시(會試)3등으로 합격하

   시다.

 

* 중종 9(1514) 선생 21

   선산김씨(善山金氏)에게 장가드시었으니 부인은 증참판(證參判) 광좌(匡佐)의 따님

   이시다.

 

* 중종 10(1515) 선생 22

   성균관(成均館)에 유학(游學)하였다. 이때 회재(晦齋) 선생과 도의지교(道義 之交)

   맺고 성균관(成均館)에서 함께 수학     하다.

 

* 중종 12(1517) 선생 24

   아들 현()이 태어나다.

 

* 중종 14(1519) 선생 26

   칠봉(七峯) 김희삼(金希參)이 와서 수학하였다.

   가을 별시향거(別試鄕擧) 3등 하였고, 10월에 병과(丙科) 2등으오 등과 하였 다.

 

* 중종 15(1520) 선생 27

   봄에 성균관(成均館) 학유(學諭), 학록(學錄), 학정(學正)을 역임하였다.

 

* 중종 18(1523) 선생 30

    5월에 부친 사직공(司直公)의 상고(喪故)를 당하여 8월에 선영하에 후()히 장사하

   였다. 효성이 지극하여 부친이 살아 계실 때에 몸과 마음을 다하여 봉 양 하였고 시

   탕(侍湯)을 할 때는 대변의 달고 씀을 맛보고 처음부터 끝까지 있는 힘을 다하였고

   상주(喪主)가 되어서는 여묘(廬墓)에서 3년을 매일 슬피 울면서 가사에는 마음 쓰지

   않았.

 

* 중종 20(1525) 선생 32

   7월에 상기(喪期)를 마치고 성규관 박사에 제수 되었다가 곧 교체되고 파직 되었다.

  조카 신연공(新淵公) 송사이(宋師頤)가 수학하였다. 신연공은 과거를 포기하고 성리

  학에 통달하였으며 한강(寒岡), 동강(東岡), 최영경(崔永慶) 등 이 그를 따랐으며

  명(南冥)선생은 그의 높은 학덕에 감동하여 조그마한 글 방 집 한 칸을 마련해 주었

  다고하며 그의 높은 도덕을 기리기 위해 향토의 사류들이 회연서원(繪淵書院) 곁에

  사우(祠宇)를 세웠다.

 

* 중종 21(1526) 선생 33

   처가(妻家)가 있는 선산(善山) 평성(坪城)으로 이거 해서 용암(龍巖) 박운(朴 雲),

   락당(眞樂堂) 김취성(金就成), 구암(久庵) 김취문(金就文)과 더불어 도 의를 강마(

   磨)하며 즐겁게 지냈다.

   3월 양정(羊汀)에서 동년회(同年會)를 하였는데 이회재(李晦齎), 태서암(太西 庵),

   조석당(曺石塘), 박훤(朴萱), 구사종(具     嗣宗), 정흠(鄭噷), 최세도(崔世 道), 류윤

   (柳潤), 손린(孫璘)이 모여 창수(唱酬)를 하였다.

 

* 중종 22(1527) 선생 34

   6월에 군직(軍職)에 서임(敍任) 되었고 7월에 다시 박사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 중종 23(1528) 선생 35

   6월에 전적(典籍)에 승진 임명되어 사직상소를 올렸으나 윤허하지 않아 취임 하였

   고 8월에는 공조좌랑에, 9월에는 병조좌랑으로 옮겼다.

 

* 중종 24(1529) 선생 36

   모부인 봉양을 위해 외직에 보이을 청해 현풍현감(玄風縣監)에 제수 되었다. 비슬산

   (琵瑟山) 도적 떼 수백명이 행인을 겁탈하고 고을을 노략질하여 사람 들의 걱정이

   많았으나 선생이 계책을 세워 포획해서 목을 베니 남은 도적들 은 놀라 달아나서 일

   대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았다.

 

* 중종 27(1532) 선생 39

   6월에 곽위(郭瑋)의 사건을 논하는 상소를 올리다가 체직되어 고향에 돌아 왔다.

 

* 중종 28(1533) 선생 40

   정월에 전적(典籍), 5월에 호조 정랑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11월 에 예조

   정랑에 임명되어 조정에 돌아왔다.

 

* 중종 29(1534) 선생 41

    윤2월에 흥해군수(興海郡守)에 제수되어 옥산의 회재(晦齋)선생과 자주 왕래 했다.

    고을 사람들이 추모하여 유허비를 세웠다.

 

* 중종 34(1539) 선생 46

   정월에 임기가 만료되어 체직되고 선공감(繕工監) 부정(副正)에 제수 되었다. 2월에

   제용감(濟用監) ()에 전임되고 3월에 상주목사(尙州牧使)에 제수 되었다.

 

* 중종 36(1541) 선생 48

   4월에 모부인 황씨가 별세하여 부친 사직공 묘소 뒤에 안장하고 예를 지키 고 애통

   한 심정으로 극진히 여묘살이로 3년상 을 마치기를 전상(前喪)과 같이 하였다.

 

* 중종 38(1543) 선생 50

    6월 상기(喪期)를 마쳤고 이달에 사재감(司宰監) ()에 임명되었다가 얼마 뒤 사

   헌부 장령에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아     체직되고 군자감(軍資監) () 에 임명

   되었다. 8월에 김해부사(金海府使)에 제수되고 다시 장령에 임명되어 시정(時政)

   논하는 차자(箚子)를 성지(聖旨)를 거역하였다 하여 체직되고 성균관 사예(司 藝)

   임명되었다가 다시 김해부사에 제수 되었다.

   남명(南冥) 조식(曺植), 송계(松溪) 신계성(申季誠)과 김해 산해정(山海亭)을 자주 왕

   래하며 도의(道義)를 강마(講磨) 하였다.

 

* 중종 39(1544) 선생 51

    3월에 병으로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왔다.

    8월에 상의원(尙衣院) ()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1월에 중종대왕이 승하하여 도성의 곡반(哭班)에 참가하였다.

 

* 인종원년 (1545) 선생 52

   정월에 장령에 임명되었으나 의원(醫院) 류지번(柳之蕃)이 녹봉을 지나치게 많이

   받고 품계가 중가(重加) 되었다는 이유로 논계(論啓)하여 체직되고 사 예(司藝)

   옮겨 임명되었다. 2월에 제용감정에 임명되고, 4월에 종부시 정 에 임명되었고,

   5월에 사헌부(司憲府) 집의(執義)에 승진 임명되었다.

   7월에 인종이 승하하고 명종이 즉위하였다.

   821일 문정대비의 밀지(密旨) 문제로 중학(中學)에 모여 윤원형의 간사함 을 논

   하여 탄핵하였다.

   윤원형은 윤임과 중종 재위시부터 권력 싸움을 벌여 왔는데 중종 승하 후 유충(

   沖)한 명종이 즉위하여 문정대비(文定大妃)가 수렴천정하게 되자 윤 원형이 때를

   만난듯 그의 심복인 이기(李芑), 정순붕(鄭順朋), 임백령(林百 齡)등과 더불어 큰소

   리치면윤임은 대신(大臣) 류관(柳灌), 류인숙(柳仁淑) 등과 더불어 계림군(桂林

   君) ()와 봉성군(鳳城君) ()을 임금으로 추대 하려는 모임을 하고 있다하고

   또 부도덕한 말로써 윤임의 글을 거짓으로 만들어 공의대비(恭懿大妃)에게 올리는

   것처럼 꾸며 대궐 뜰에 떨구어 문정 대비를 동요케 한 다음 자지(慈旨)를 비밀리에

   받아 양사(兩司)에 부탁하여 탄핵을 하게 하였다.

  선생이 제일 먼저 그 모의를 알고 동료들에게 대신이 과연 죄가 있다면 마땅히 죄를

  밝히고 저자에서 처형하여 그 시체를 군중에게 보이면 되는 것이지 안으로 밀지를

  내리는 것이 어찌 성세(盛世)에 할 일이겠는가하였다. 이날 중학회의에서 대사헌

  민제인(閔齊)과 대사간 김광준(金光準)이 관원 들을 달래고 협박하여 지금 한 두

  대신이 자전(殿)의 의심을 사서 밀지가 안에서 내려왔는데 먼저 발설치 않으면 국

  가에 화를 끼칠까 두렵다하니 지평 김저(金儲)이것은 특별히 윤임만 처치하기

  위해 발의 한것이 아니라 충현(忠賢)들이 어육(魚肉)이 조짐이 여기에 있다. 지금 기

  묘사화(卯士禍)는 말만 들어도 참혹하여 콧마루가 시큰시큰한데 지금의 군자들이

  또 남곤(南袞), 심정(沈貞)무리가 했던 행위를 밟으려 하느냐.하니 선생이 소리

  를 가다듬고 나로서는 비록 내 뼈를 마디마디 잘라서 부순다 해도 이 일을 결단코

  따를 수 없다하였다.

  대사헌 민제인등이 종일토록 달랬으 나 끝내 동의를 얻지 못해 회의를 마쳤다.

  822일 모든 대신들이 충순당에 입대(入對)하였고 선생이 밀지를 받들지 못하는

  사연을 동료들과 더불어 계()로 올리고 사직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계의

  내용은 민제인과 김광준 등이 윤임 등 3인을 논죄하고저 하였으나 신 등의 생각으

  로는 3인이 비록 논할만한 일이 있더라도 주상이 어리고 나라가 안정되지 못한 이때

  를 당하여 간사한 무리 들이 서로 부언 (浮言)으로 선동하여 대신을 논계하는 것은

  심히 때가 아니요

  자칫 간계에 빠져 사화(士禍)를 더할 염려가 있다고 여겨 회의를 파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기(李芑)등이 아뢴 바를 보면 그 논의가 나올수록 더 새로워져 서구설

  로 다투기가 어렵게 되었으니 신 등은 언관(言官)의 직분상 뜻을 바 꾸어 따를 수는

  없으니 청컨대 신등을 체직하여 조정의 의논을 한결같이 하 소서하였다.

  선생은 823일 윤원형을 내치라고 청하는 계사(啓辭)를 갖추어 놓았으나 올리지

  못하고 파직되었다. 선생은 무자년부터 을사년에 이르기까지 상소한 것이 두 번,

  상차(上箚) 한 것이 한 번, 계사를 올린것이 세 번인데 난리 끝에 글은 모두 없어지고

  다행히 남아있는 것 또한 대략도 갖추지 못하였으니 애석하다.

 

* 명종원년 (1546) 선생 53

     4월 예빈시(禮賓寺) ()에 제수되었다.

    아들 현()이 사마시(司馬試) 양장(兩場)에 모두 합격하였다.

    10월에 중시(重試)2등으로 합격하여 통정대부에 진계(進階)되어 절충호군(折衝

    護軍)임명되었다가 대구부사(大邱府史)에 제수 되었다.

 

* 명종2(1547) 선생 54

     9월에 양제역 벽서사건 때문에 을사제현(乙巳諸賢)들에게 크게 죄를 가하여 선생

     은 전라도(全羅道) 고산(高山)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적소에서 거처하는 집을 양정(養正)이라 이름 짓고 날마다 재생들과 더불어 강학

     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귀양살이를 하고 있었으나 화복(禍福)으로써 마 음을 동요

     치 않고 경학(經學)에 잠심하여 마음 편하게 자적(自適)하였으며 고을 선비들이 따

     라서 수학하는 사람이 심히 많았다.

     손자 유경(惟敬)이 와서 수학(受學)하였다.

 

* 명종6(1551) 선생 58

    이 해에 사면(赦免)되어 고향에 돌아와서 고산정(高山亭)에 방을 꾸미고 거 처하며

    자호(自號)야계산옹(倻溪散翁)이라 하고 유유자적(悠悠自適)하면서 다시는 벼슬

    에 나가지 않았다.

    10월에 부인 김씨가 별세하였다.

 

* 명종7(1552) 선생 59

    부인 김씨를 고을 북쪽 손동(遜洞) 곤좌(坤坐)에 장사하였다.

    1551년에 시작한 백세각(百世閣)이 완성되었다.

 

* 명종11(1556) 선생 63

    2월에 아들 현()이 별시문과에 등과하여 승문원 부정자가 되었으나 신참례 (新參

    禮)의 후유증으로 불행히 12월에 요절(夭折)하였다.

    현()은 총명온수(聰明溫粹)하며 어려서부터 학문에 전념하였고 일찍이 퇴계선생

    을 서울에서 뵙고 경서와 출처의 뜻을 묻고 논변하였으며 회재선생 문하에 들어가

    위기지학(爲己之學)의 방도를 얻었으니 양()선생의 문도이셨다.

 

* 명종13(1558) 선생 65

    4월에 환우가 있더니 18일 집에서 별세하셨다.

    9월에 손동(孫洞) 김부인(金夫人)의 묘소 오른쪽에 장사하였다.

 

* 명종22(1567)

   10월에 어명으로 관직이 회복되었다.

 

* 효종7(1656)

   본주(本州)의 사림들이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위판을 봉안한 천곡서원 (川谷書

   院) 동편에 사우(祠宇)를 세우고 위판을 봉안하였다.

 

* 영조11(1735)

    7월에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경연 의금부 성균관 춘추관사 홍문관제학 세자좌

    부빈객 오위도총부 부총관(嘉善大夫吏曹參判兼同知經筵義禁府成均館 春秋館事弘

    文館提學世子左副賓客五衛都摠府副摠管)으로 증직 되었다.

 

* 정조10(1786)

    본주(本州)의 사림들이 봉강서원(鳳岡書院)을 세워 위판을 봉안하고 신연선생(

    淵先生)을 병향(幷享)하였다. 봉강서원은 고산정 북쪽 명곡(椧谷) 아래 있으며 번

    암(樊巖) 채제공(蔡濟恭)이 원액(院額)을 썻다.

 

* 고종7(1870)

    12월에 자헌대부 이조판서겸 지경연 의금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춘추

    관성균관사오위도총부도총관(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經筵義禁府事弘文 館大提學

    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成均館事五衛都摠府都摠管)에 가자(加資) 증 직(贈職)되었

    다.

 

* 고종8(1871)

    충숙(忠肅)이란 시호(諡號)가 하사 되었다.

    임금을 섬기는데 절개를 다 하였으니 충()이라 하고, 자기 몸을 바르게 하 고 아랫

    사람들을 잘거느렸으므로 숙()이라 한다. (事君盡節曰忠正己攝下 曰肅).

 

공은 나면서부터 영오(穎悟)하고 준수하여 범상치 않았으며 소년 시절부터 강한 용기를 가지고 있었으며 학업에 뜻을 세워서는 스승인 행정(杏亭) 도형(都衡)에게 가르침을 받음에 아침저녁으로 하루도 거르질 않았고 성균관에 유학하면서 명성과 칭찬이 자자 하였으며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과 도의지교를 맺었다.

효도와 우애는 천성에 근본 한 것으로 부모 공양과 장례, 제사에 정성과 공경을 다하여 부모의 전후 상에 모두 여막(廬幕)에서 지키고 집으로 가지 않았으며 두 형 및 세 동생과 우애가 매우 돈독하여 선인(先人)의 자산은 모두 형제에게 밀어주었으며, 집안에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가산을 털어 보살펴 주었으니 그 시혜(施惠)가 종당(宗黨)에 까지 미쳤고 고향 사람들이 그의 행위(行誼)에 감복하였으며 행적이 조정에 알려졌고 경상관찰사 이언적의 장계로 중종38(1543) 9월 효우(孝友)의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성품이 검소하여 집안에 좋은 물건이 없으며 현풍(玄風), 흥해(興海) 김해(金海), 상주(尙州), 대구(大邱) 등 다섯 고을을 맡아 다스리면서도 돌아올 때는 이사하는 짐이 초라했으며, 아전들이 두려워하고 백성들을 사랑하여 가는 곳마다 선정을 베풀었다. 평소에는 정다움으로 사람들과 쉽게 친해졌으나 일에 임해서는 의심 없이 확실하게 결단하였다.

또한 간관(諫官)인 사헌부(司憲府) 집의(執義)시에는 윤원형이 문정대비(文定大妃)를 동요시켜 밀지(密旨)를 받들어 대간 들을 유혹하고 위협해서 정적을 일망타진하려는 흉계를 꾸밀 때 공이 제일 먼저 이 모의를 알고 논의에 부치지 못하게 막고 말하기를 나는 비록 머리가 부서지고 뼈가 가루가 되더라도 따를 수 없다.하고 시종일관 절의를 지키셨다. 이때의 일로 을사제현(乙巳諸賢)들이 귀양을 가게 되었으며 공은 전라도 고산현(高山縣)에서(지금의 완주군) 5년간 유배생활을 마치고 사면(赦免)되어 고향으로 돌아와 다시는 벼슬에 나가지 않고 학문과 시주(詩酒)를 즐기며 유유자적(悠悠自適)하였다.

갈암(葛巖) 이현일(李玄逸)의 묘비명(墓碑銘)에 이르기를 송공은 타고난 성품이 강열하여 얼굴빛을 정하게 해서 조정에 나아가니 아무도 그 뜻을 꺾지 못하였고 좌우에서 두드리고 흔들수록 절의와 지조는 더욱 굳었도다. 비록 다른 사람에 비해 기인이었으나 하늘에는 한 점 부끄러움이 없었도다. (有偉宋公 天賦剛烈 正色立朝 莫能撓奪 左右敲撼 節操愈堅 雖畸於人 不槐干天)라고 한 것을 보아 공의 성품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