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星州) 고산정(高山亭) - 1
성주(星州) 고산정(高山亭) 마을의 유래(由來)
고산정은 야성송씨(冶城宋氏) 충숙공파(忠肅公派)의 집성촌(集姓村)으로 유가(儒家)의 법도(法度)와 입향조(入鄕祖) 야계(倻溪) 송희규(宋希奎)선생의 충효정신(忠孝精神)을 460여 년간 이어온 전통이 살아 숨 쉬는 마을로 행정구역은 성주군 초전면 고산리이다.
음촌(公西 : 음지뜸), 양촌(公東 : 양지뜸), 닭실(酉谷), 금련(金蓮) 4개의 자연부락으로 되어 있고 초전면에서 서북으로 약 2Km 떨어져 있으며 유곡계(酉谷溪)의 세천(細川)이 마을 앞으로 흐르고 남쪽으로 가야산의 지맥인 별뫼(星山 : 白馬山) 줄기가 뻗어 내려온 성산(城山)이고 동북으로 금오산, 동남으로 멀리 가야산이 바라보이는 곳에 자리 잡은 아늑하고 풍광(風光)이 뛰어난 마을이다.
1500년경부터 손씨(孫氏) 몇 세대가 마을에 살며 고산(孤山)이라 하였는데 1551년 야계(倻溪) 송희규(宋希奎 1494~1558) 선생께서 사헌부(司憲府) 집의( 執義)로 있을 때 문정왕후의 밀지 사건의 부당함과 윤원형 등의 비행을 탄핵하다 전라도 고산(高山)으로 귀양을 갔다가 5년 뒤에 사면(赦免)되어 돌아와 고향 송천(松川) 근처 봉암산(鳳巖山) 아래 백세각(百世閣)을 짓고 환란(患亂)을 잊지 않기 위해 동네 이름을 고산(孤山)에서 고산(高山)으로 바꾸고 종기(宗基)를 잡았는데 이후 손씨(孫氏)들은 모두 이주(移住)해 가고 야계(倻溪) 후손(後孫)들이 마을을 이루어 대를 이어 자자손손(子子孫孫) 동성대촌(同姓大村)의 세거지(世居地)를 만들어 살아가고 있다.
백세각(百世閣)이 자리 잡은 음촌 뒤쪽은 봉암산(鳳巖山)으로 봉황(鳳凰)의 머리를 이루고 우측은 난산(卵山)이 자리해서 봉황(鳳凰)이 알을 품고 있는 포란지형(抱卵之形)의 지형적 특성을 갖춘 명당이다.
야계(倻溪)선생이 이곳에 종기(宗基)를 잡으신 뒤로 한결같이 향화(香火)가 끊이지 않고 학덕(學德)이 현저(顯著)한 효제충신(孝悌忠臣)이 그치지 않고 배출되니 이런 연유에서 길지(吉地)라 한다.
70년대 후반까지도 백 여호 이상이 모여 사는 집성촌(集姓村)으로 이른바 야성송씨(冶城宋氏)를 고산정송씨(高山亭宋氏)라 부를 정도로 큰 마을이었으나 지금은 다른 농촌과 같이 산업화의 뒤안길에서 도시로 떠나고 비어있는 집들과 성주 특산물 참외를 재배하는 비닐하우스에 둘러싸인 마을에 몇몇 채의 고가(古家)와 재실(齋室)들이 지난날의 고산정(高山亭)을 말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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