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일반상식

[스크랩] 한문(韓文)은 있어도 한문(漢文)은 없다

공간(空間) 2012. 12. 16. 22:57

 삼대유산(三大遺産)


광개토경 평안호태왕비(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고구려(高句麗) 인이 고구리 문자로 쓴 우리 사적(史蹟)이다.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고려(高麗) 인이 고려 문자로 쓴 우리 경전(經典)이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근세조선(朝鮮) 인이 조선 문자로 쓴 우리 사서(史書)이다.


이를 한문韓文 문화권인 중국인/일본인이 그들 소리로 읽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렇다 해서 그들의 것은 아니다.

그 기록문자가 그들의 것이 될 수는 없다. 


우리민족은 19세기까지 4천년 역사동안 남의 문자를 쓴 적이 없다.

자국(自國) 문자를 쓰고 자국 음으로 읽으며 살아왔던 것이다.


                    漢文은 없다.


한(韓)은 일만여 년 역사를 지닌 한국(韓國)의 대명사이다.

한(漢)은 육천여 년 역사를 지닌 중국(中國)의 대명사이다.


韓文이지 漢文이 아닌 것은 漢의 자전/사전 명칭으로도 알 수 있다.

한(漢)이 만든 이아爾雅로부터 강희자전康熙字典에 이르기까지

중요 서책書冊 어디에도 漢文이라 쓴 곳이 없다.

당-송-원-명-청 어느 대에도 감히 쓰지를 못한 것이다. 


왜냐?

중국학자는 그들이 쓰는 문자가 조선족 글의 차용임을 알기 때문이다.

문자/언어는 문화이고 민족/문화는국경이 없기 때문이다.


♣ 따라서 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가

  중국 땅에 있어도 우리 사적이지 중국 사적이 아닌 것이다.


            한문韓文을 한문漢文이라 하는 자는?

 

위 세 사료는 韓文이 우리 글(?→契)이었다는 등기문서이고

중국의 역대 자전/사전은 중국인이 인정하는 증거물이다.


그러함에도 국내에는 한문을 중국문자로 아는 한심이가 아주 많다.

영어와 같은 외국어라고 말하는 한단지보(邯鄲之步) 학자도 그러하다.


모두 족보를 모르는 서출(庶出) 같은 자들이다.

 

일제에 의해 순치(馴致 : 길들여짐)되고

최근까지도 박정희 같은 반도사관/사대주의 친일파들에 의해

한글전용의 사면 색벽(塞壁)에 갇혀 정통성을 말살 당한 희생자들이다. 

 

절운(切韻)과 훈민정음의 탁월성


훈민정음(1443) 반포(1446) 전에는 한문 발음기호를 어떻게 표기했는가?

절운(切韻)으로 표기했다.


청국(淸國) 때 만들었고 가장 많은 글(49,030자)을 수록한

강희자전(康熙字典)에도 모두 절운으로 되어있다.


절운법이란 발음방법을 훈민정음 ① 초성 ② 중성 또는 중+종성으로

나누어(절切해서) 표기한 방식이다.


♣ 그래서 훈민정음 반포문에 나라말(韓文)이 어렵다 한 것이다.


작별 인사 再見(다시 보자)의 발음방법을 예로 들면 훈민정음 전에는

作代切(작대절), 經電切(경전절)이라 표기했다.


작대절은 에서 초성 을 취하고, 에서 초성 을 뺀 를 취하여

ㅈ + ㅐ → 로 읽는다. 라는 발음부호이다.


경전절은 에서 을 취하고 전/뎐에서 ㅈ/ㄷ을 빼고 언/연을 취하여

ㄱ + 연 → 으로 읽는다. 라는 발음기호이다.


그러나 훈민정음이 나오면서 再見의 발음을 작대절 경전절 이라

어렵게 표기하던 것을 바로 이라 표기하게 된 것이다.


훈민정음의 탁월성은 28자밖에 안 되는 음소(音素)로

수 만개의 절운을 재견처럼 간명하게 표기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일자일음 절운과 입성(入聲)


절운의 특징은 일자일음(一字一音)이다.

예외가 없다.


조선족은 모든 한문을 절운대로 일자일음(一字一音) 발음하나

한족(漢族)은 못하는 자(字)가 있는바 입성(入聲)이 대표적이다.


입성은 평성-상성-거성-입성의 사성(四聲) 중

ㄱㄹㅂ 밭침이 들어가는 말/글이다.


그런데 漢族은입성의 일자일음 발음을 못한다.

그래서 그들이 만든 자전/옥편과 달리 변형하여 쓰고 있는 것이다.


경(京)     : 베이징   ♣ 北 : 必墨切 →   補妹切 →

림(林)     : 린     ♣ 吉 : 激質切 →

륜궁(倫宮) : 룬궁   ♣ 法 : 弗乏切 → 폅 →


한족(漢族)과 조선족을 구분하는 것은 비교적 간단하다.

제2차 대전 때 미국이 일본 첩자를 L R 발음으로 구분한 것처럼

우리도 입성발음을 시켜보면 어렵지 않게 구분할 수 있다.


韓文의 생성과 변천사를 알면,

중국과 일본에서 쓰고 있는 韓文이 우리글임이 더욱 확실해진다.

그러나 지면관계상 생략한다.


韓文이 중국 글 漢文이라 하는 한심이/사이비 식자는

하루라도 빨리

강단(講壇), 문단(文壇), 언론계, 문화계, 정계 등에서 사라져야한다.

한문은 우리 글(契)

어문일치(한국)와 어문불일치(중국)

      

우리는 한문을 절운대로 정확하게 1자1음(一字一音) 발음을 한다.

그러나 중국인은 거의 1자2음(一字二音)절 이상의 변형된 발음을 한다.


 예 1 : 北京(북경)


  北 : 박묵절(博墨切) : 중국자전에서 北을 찾으면 이 말부터 나온다.

       우리 :의 초성 을 묵(墨)의 ㅁ자리에 넣어 이라고

              절운(자전의 발음표기법)대로 발음한다.

       중국 : 자전 발음표기법과 달리 베이(pei)라 발음한다.


  京 : 거경절(居卿切) :우리 큰 한한자전 자 밑에도 나온다.

       우리 : 거(居)의 초성 을 경(卿)의 ㄱ자리에 넣어 이라발음

       중국 : 자전 발음과 달리 (ching)이라 발음한다.


 예 2 : 六(육) ㆍ七(칠) ㆍ 十(십)


  六 : 력?절(力竹切) : 마찬가지로 <초성 + 중ㆍ종성 륙>

       우리 : 륙     , 동, 관순이 원래 훈민정음 발음     

       중국 : liu


  七 : 척실절(戚悉切) : 초성 ㅊ + 중ㆍ종성 일 → 칠

       우리 :

       중국 : ch'i


  十 : 식(씩)입절(寔入切) : 초성 + 중ㆍ종성

       우리 : 십(씹)   ♣ 훈민정음의 정통발음은 이었다.

       중국 : shih


이처럼 중국인은 ㄱㆍㄹㆍㅂ 받침이 있는 입성(入聲)발음을 못한다


♣ 입성발음을 시켜보면 중국인과 조선족이 금방 구분된다.

제2차대전 때 미국이 일본인첩자를 L과 R 발음으로 색출한 것과 일맥상통


훈민정음의 우수성은 이처럼 어려운 9,353개나 되는 한문 절운을

28개로 압축하였음에도 많은 발음을 표기할 수 있는 문자라는 점이다.


말 나온 김에 20일 <훈민정음(국보 제70호) 해설>도 올리기로 한다.


         < 한문은 역사 정통성 회복의 보루이자 효자 >


중국이 아무리 긴 이름의

동북공정(동북변강역사여현상계열연구공정)을 해도 

한문이 자기나라 문자라고는 못 한다.

자기들이 대대손손 만들어 온 자전에서 동이/조선족만 할 수 있는 

일자일음(一字一音)의 절운(節韻)만은 조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문이 우리역사의 정통성 회복에 크게 기여할 것은 자명하다.

우리선조 동이(東夷)는 요동ㆍ서토(西土) 정도가 아니라

중원대륙에서 최초의 상형문자(글)를 만들어 보급한 선진문화민족이다.

분서갱유 때 절개를 지키며 희생당한 460명의 선비도 동이족이었다.


♣ 동이(東夷)의(夷)를 오랑캐 이로 아는 사람이 있다.

   이는 공자-맹자의 경칭(敬稱) 자(子)아들 자(子)로 아는 것과 같다.

   

   동방종족이름 夷(이) = 큰 大(대) + 활 弓(궁)

   곧, 동이(東夷)는 활을 잘 다루는 동쪽의 큰 민족이라는 말이다.


동이가 중국변방의 소수민족도/속국도 아니었음이

한문(一字 一音의 節韻)으로 자동 입증된다

중ㆍ일과 친일파가 왜곡/파손시켰어도 이것만은 손대지 못했다. 

 

현실적으로도 한글의 모태(母胎)

우리 어간의 70% 이상인 한문을 모르면 국어를 아는 것이 아니다.

한문을 모르고는 국어에 담긴 함의(含意)와 역사를 바로 알 수 없다

♣ 그래서 한계효용 영 이하의 댓글(말-말-말)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한문을 알면 국어가 쉽다.

국어를 잘하면 독해력이 좋아 다른 공부도 잘한다.

역사의식과 정통성도 그만큼 깊어진다.


      < 왜 노예흑인이 뿌리 없는 미국인이 되었는가? >


자기 모국어/민족 언어를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도 일제때 우리말/글을 지키지 못했으면 일본에 동화되었을 것이다.

 

중국에서 대대손손 살아온 우리 교민이 왜 중국인이 아니고 조선족인가?

우리말을 잃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이 모국인 것이다.

 

한문이 중국글이라 여기게 된다면

중국종속의 역사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언어는 민족과 운명을 같이하는 민족 얼이자 역사-문화의 화석이다.

언어가 의사전달수단이고 시대에 따라 변함은 공리로 논외이다.


일모도원(日暮途遠), 해는 저물고 갈 길이 먼 사람이다.

   가기 전에 후학들에게 정통교육의 중요성을 전하고 싶을 뿐이다.

   될성부른 나무와 진리에 목마른 심령이 가난한 분은 알아들을 것이다.


제발 앞으로는

<한문은 중국 글>이라느니, <한문도 영어와 다를 것이 없다> 는 식의

족보를 모르는 서자 같은 막말은 사라지기를 기대한다.

 

차제에 교육부는

민족의 뿌리이자 얼인 <우리글 교육>부터 제대로 할 것을 촉구한다.

 

 

<부록>

           1. 문자의 창제와 변천  : 글(契)에서 한문까지


한웅천황(BC 3897-3898)은 신지혁덕(神誌赫德)에 글 창제를 명했다.

당시 끈으로 매듭을 매서 쓰던 결승(結繩)문자가 불편하였기 때문이다.


신지혁덕은 사냥터 모래바닥에 난 사슴발자국 무늬(鹿足印)를 보고

칼(刀)로 가로(?) 세로(?)로 그어서 쓰는 글(契)을 창안하였다.

<太白逸史>


한웅(桓雄) : 환웅이 아니라 <한웅>이 옳은 발음이다.

   한문발음을 절운(切韻)방식으로 표기하는데 桓은 호단절(胡端切)이기 때문이다.


   절운이란 호단절 호의 초성 ㅎ을 자리에 대신 넣어 한이라 읽는

   한문 발음표기법이다.


   옥편, 강희자전 등 모든 중국자전과 우리말 큰 한한(漢韓)사전에 보면

   胡端切(호단절)처럼 글자마다 <무슨 절>이라 발음방법이 표기 되어있다.


오늘의 한문(漢文)에 이르기까지 글의 변천과정을 정리하면 이러하다.

글(契)→글문(契文)→서글(書契)→진전(秦篆)→설문(說文) → 한문


글(契) : 한문의 원조(元祖) : 큰 대()가 없는 <글>이다.

             신지혁덕이 만든 동방 최초의 상형문자이다.

  

글문(契文) :

 

   중요하고 큰 약속은 글(契)로 하면서 큰 大가 가획되었다.

   이때의 글약서(契約書)가 오늘의 계약서가 된 것이다.


서글(書契) : 붓 시대 : 춘추(BC 770-249) 전국시대(BC 403-221)


   글 서(書) = 붓 율(聿) + 가로 왈(曰)


   글 (書)는 말(曰)을 붓(聿)으로 기록한 글(契)이라는 의미이다.

   곧, 칼 대신 붓을 사용하면서 글(契)이 서글(書契)로 바뀌었다.


   공자(孔子 BC 551-479), 맹자(孟子 BC 372-289)는 이 시대 인물이다.


진전(秦篆) : 진시황 때 이사(李斯)가 9,353문을 죽간(竹簡)에 기록


   진시황은 BC 221년 천하통일 후 문자통일의 필요성을 느꼈다.

   7국(한-조-위-초-연-제-진)의 문자가 제 각각이었기 때문이다.


   이사가 <글문(古語) 9,353자>를 죽간에 정리한 전문(篆文)을 

   진나라에서 정리하였다 하여 이를 진전(秦篆)이라 한다.


♣ 이 문자통일 과정에서 분서갱유(焚書坑儒) 사건이 있었다.

   무신(武臣) 중심의 진나라는 천하통일은 했지만 학문후진국이었다.

   따라서 흡수당한 6국의 유능한 학자의 영입이 절실히 필요하였다.

   전문을 정리한 이사도 초나라 사람(순자의 제자) 이었다.  

   

   그러나 절개에 살고 죽는 패망6국 선비가 협조하지 않았다.

   진시황은 회유가 안 되자 의약-복술-농사서를 제외한 모든 책을 태우고,

   목숨을 걸고 그 부당함의 항소를 일삼는 선비 460명을 생매장 하였던 것이다.


   <이 부분을 거론할 때마다 5.17. 광주사태가 연상된다.>


설문(說文): 종이시대 :AD107 허신(許愼)이 죽간진전을 채륜지에 씀


   채륜지란 후한 AD 105년 채륜(蔡倫)이 개발한 종이 이다.

   허신이 이사의 죽간진전을 채륜지에 옮겨 쓰면서 설명을 붙였는데

   그래서 설문(說文)이라 한다.


   그 뒤 1807년 (청 인종 때) 단옥재(段玉裁)가

      설문에 해자 주(解字注)를 달고 설문해자 주(說文解字注)라 하였다.

      지금 많은 우리대학과 서당에서 이 책을 교재로 쓴다.


한문(漢文) : 우리 용어 : 중국은 한문이란 말을 못 쓴다.


   이처럼 후한(後漢) 때 설문이 나오면서 

   서글(書契)한문(漢文)이라 하기 시작하였다.


   설문 이후 중국이 편찬한 역대 자전의 제호(題號)는 다음과 같다.

   당운(唐韻 : 당), 광운(廣韻 : 송), 집운(集韻 : 송),

   홍무정운(洪武正韻 : 명), 강희자전(康熙字典 : 청) 등


   이처럼 중국은 한나라 이후에 그들이 편찬한 자전 어디에도

   한자자전(漢字字典) 또는 한문자전이라는 책명을 사용하지 못하였다.


   한문은 한(韓)민족 동이(東夷)가 만든 (契)의 변칭(變稱)이지

   자기 한(漢)민족이 창제한 글이 아니기 때문이다.


♣ 초대 문교부장관(안호상)이 중국 임어당한테 망신당한 일화는 지금도 유명하다.


   임 어당 : 초대 교육부 장관하시기가 어떻습니까?

   안 장관 : 당신네 한문이 어려워 해먹기 어렵습니다.

   임 어당 : 무슨 소리!

   한문은 당신네 선조 동이가 만든 당신나라 글입니다.....

  중국은 빌려 써온 것입니다...ㅉㅉㅉ

출처 : ♣인생종합대학♣
글쓴이 : 보드라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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