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 세종대왕 왕자태실(世宗大王 子胎室)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에 있는 조선시대 세종대왕 왕자들의 태실 2003년 3월 6일 사적 제 444호로 지정되었다.
세종대왕의 아들 8대군과 10군의 태실 18기와 세손(단종)의 태실 1기로 전열에 11기, 후열에 8기가 서있다.
세종대왕 자태실(世宗大王 子胎室)은 성주군 월항면 선석산 아래 태봉(胎峰) 정상에 있으며, 세종의 적서(嫡庶) 18왕자와 세손 단종의 태실 등 19기가 군집을 이루고 있다. 태실(胎室)은 왕실에 왕자나 공주 등이 태어났을 때 그 태를 넣어두던 곳을 말한다. 전체 19기중 14기는 조성당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나 세조의 왕위찬탈에 반대한 다섯 왕자의 태실의 경우 방형의 연꽃잎이 새겨진 대석을 제외한 석물이 파괴되어 남아 있지 않으며, 세조 태실의 경우에는 즉위한 이후 특별히 귀부를 마련하여 가봉비(加封碑)를 태실비 앞에 세워두었다. 조선 세종 20년(1438)에서 24년(1442)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태봉(胎峰)은 당초 성주이씨의 중시조(中始祖) 이장경(李長庚)의 묘가 있었는데 왕실에서 이곳에 태실을 쓰면서 그의 묘를 옮기고 태를 안치하였다고 한다. 한편 1977년 태실에 대한 보수시 분청인화문대접·뚜껑, 평저호 및 지석(誌石) 등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원래는 1438년 (세종20년)에서 1442년까지 수양대군을 비롯하여 세종의 적서 18왕자와 단종등 20여기의 태실이 있었으나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하자 이에 반대하여 단종복위를 도모하다가 죽은 금성대군과 한남군, 영풍군, 화의군 및 안평대군의 태와 장태비는 1457년(세조3년) 태봉 아래로 파내어 쓰러뜨려졌다.
이 5기의 기단석은 1975년 보수, 정화하면서 찾아 원자리에 앉혔다.
세조가 등극한 뒤 세조의 태비 앞에 홍윤성이 글을 지어 비석으로 세웠으나 지금은 심하게 마모되어 판독이 거의 불가능하다.
화강암으로 깍은 19기의 태실은 조선태실 의궤형식으로 지하에 석실을 만들고 그 안에 백자로 된 태호를 넣었다.
태호속에는 태항과 태주의 이름 및 생년월일을 음각한 지석을 넣고 지상에는 기단, 간석, 옥개의 형식을 갖춘 석조물을 안치하는 한편 각 왕자의 태실을 가리키는 표석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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