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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곡(漆谷) 매남(梅南) - 3

공간(空間) 2024. 3. 30. 23:40

칠곡(漆谷) 매남(梅南) - 3

 

야성송씨(冶城宋氏)의 세거지(世居地)

 

10世 절도공(節度公) 희미(希美) 후손은 칠곡군(漆谷郡) 도촌(道村), 성주군(星州郡) 죽내(竹內), 용인군(龍仁郡) 송문(松門)등에 세거하고 있으며,

10世 감사공(監司公) 구(構)는 1345년 경상감사(慶尙監司)로서 재상어사(災傷御史)가 되어 성주(星州)를 지나다가 송천(松川)에 터를 잡고 합천 야로(冶爐)로부터 이거(移居) 해서 살았으므로, 성주(星州) 입향조(入鄕祖)이며,

13世 선교랑(宣敎郎) 진잠현감(鎭岑縣監) 수겸(守謙)은 아들 다섯을 두셨는데 소(紹)의 후손은 성주(星州), 계(繼)의 후손은 경남 산청(山淸), 집(緝)의 후손은 대구 공산(公山), 륜(綸)의 후손은 영주(榮州), 회(繪) 후손은 칠곡군 오곡(梧谷)에 세거하고 있고 소(紹)이 손자(孫子) 덕규(德奎)의 후손은 성주 송천(松川), 응규(應奎)의 후손은 대구 매남(梅南), 희규(希奎)의 후손은 성주 고산정(高山亭)에 세거해 오고 있다.

 

고려말 감사공(監司公) 휘(諱) 구(構)께서 성주 송천리(松川里)로 이거(移居) 한지 250여 년 후에 아헌공(啞軒公)께서 한강(寒岡) 정구(鄭逑)선생을 모시고 대구로 오시니 선생께서는 사수(泗水)에 기거하셨고, 아헌공(啞軒公)께서 매남(梅南)에 이거(移居) 하셨다. 그러나 매남(梅南)은 한강(寒岡) 선생과의 인연으로 옮겨 온 곳이 아니라. 일찍부터 공(公)과는 인연이 닿아있었으니 서재의 도씨(都氏) 문중이 외가(外家)였고, 처가인 인천이씨(仁川李氏) 문중이 매남(梅南)에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참조 : 1) 아헌(啞軒) 공(공)의 휘(諱)는 원기(遠器)요 자(字)는 학무(學懋)이다.

              선조(宣祖) 6년(1573) 생원 진사 양시에 합격하였고, 선조(宣祖) 38년(1605)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錄勳)되었으며, 광해(光海) 2 년(1610)

             경술년(庚戌年) 문과에 급제 하였다. 동계(桐溪) 정온(鄭蘊)선생 이 경연(經筵)

             중에 선조(宣祖)에게 청을 올려 사간원 헌납 겸 춘추관 기주 관(司諫院獻納兼

             春秋館記注官) 증직(贈職) 되었다. 갈암(葛庵) 이현일(李 玄逸)이 묘갈을 찬하

             였다.

         2) 정구(鄭逑) 선생의 휘(諱)는 구(逑)요 자(字)는 도가(道可)이고 호(號)는 한강

              (寒岡)이고 시호(諡號)는 문목(門穆)이다. 일찍이 오건(吳健)에게 수 학하였고

              남명(南冥)과 퇴계(退溪) 양문에 출입하였다. 대구의 연경서원에 배향되었다.

              아헌공(啞軒公)과는 다섯 살 차이로 어려서 성주의 유촌(柳 村)에서 함께 자

              라 일찍 선생을 뵈었다.

        3) 사수(泗水) : 대구시 북구 사수동(지금 선생을 기념하여 사양정사가 세워 져있

             다.

        4) 매남(梅南) : 대구시 북구 매천동(매양서원이 서 있는 곳이다.)

        5) 도씨(都氏) : 아헌공(啞軒公)은 팔거(八莒) 도씨(都氏) 종사랑(從仕郎) 도균

            (都均)의 외손이며 생원(生員) 도이경(都以敬)의 외증손이다.

        6) 인천이씨(仁川李氏) : 아헌공(啞軒公)의 배위(配位) 종사랑(從仕郎) 이윤

             (李潤)의 따님이며 정난원종공신(靖難原從功臣) 이이(李儞)의 증손녀이다.

 

복합적인 요인이 있지만 처음 한강 선생을 쫓아 아헌공(啞軒公)께서 정확하게 언제부터 매남(梅南)의 우소(寓所)에 오셔서 계셨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최초의 기록은 모당(慕堂) 손처눌(孫處訥)의 모당일기(慕堂日記) 기유(己酉)(1609)년 2월 21일 조(條)에 “정자(正字) 숙(叔)과 희노(希魯)와 더불어 대곡(大谷)으로 향하는 길에 한강 선생께서 납실(納室)에 와서 제사를 드린다는 말을 듣고 급히 달려 학무(學懋)의 우소(寓所)에 들어가니 선생은 이미 산에 올라갔고 행보(行甫)는 이별을 말하고 학무(學懋)의 우소(寓所)에 있었다. 행보(行甫)가 일찍이 선생에게 연경서원(硏經書院)을 방문해주시기를 청하였으나 도움을 받지 못하였는데 나는 크게 기뻐하며 이로 말미암아 행보(行甫)와 함께 연경서원(硏經書院)에 동행 할 계획을 세워 산에 들어가 길에서 선생께 절하니 팔거현(八莒縣)의 관암산(關巖山)에서 비석(碑石)에 쓸 돌을 보고 계셨다.”라고 기록되어있다. 여기서 언급된 우소(寓所)는 지금의 매남(梅南)에 있었기 때문이니 이 구절로서 입향(入鄕)의 최초의 증거로 삼을 수 있다. 이때가 공(公)의 연세(年歲) 62世로 광해군(光海君) 2년(1609) 이었다.

비록 기록은 1609년이 최초의 기록이지만 사실상으로는 그보다 훨씬 이전이라고 말할 수 있으니 다만 이 기록은 입향(入鄕)의 기준점으로서의 의의가 있을 뿐이라 하겠다.

또 다른 기록을 살펴보자면 문양재사기(汶陽齋舍記)에 “옛날 우리 문목공(文穆公) 선생께서 만년에 사양(泗陽)에 터를 잡으셨고 우리 선조 아헌공(啞軒公)께서 또한 선생을 쫓아 매남(梅南)에 와서 우소(寓所)  하셨으니 매남(梅南)은 사양(泗陽)과 고개를 격한 가까운 곳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 후에 “아헌공(啞軒公) 손자 대(代)인 참의공(參議公)에 이르러 부모님을 모시고 매남(梅南)에 이거(移居) 하시니 이씨(李氏) 묘와 전원이 이곳에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여러 구절로 미루어 볼 때 아헌(啞軒) 선생께서 한강 선생과 함께 매남(梅南)에 오신 것은 분명하나 이때 에 매남(梅南)으로 완전히 이거(移居) 하신 것은 아니며, 다만 우거(寓居) 하셨을 뿐, 완전한 이거(移居)는 손자 대(代)라고 말할 수 있겠다.

 

참조 : 7) 우소(寓所) : 임시적으로 거처하는 곳을 말한다. 당시에 아헌공(啞軒公) 의

              우소(寓所)가 납실(納室)과 가까운 매남(梅南)에 있었다.

          8) 손처눌(孫處訥) :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일직(一直), 자(字)는 기도 (幾道)

             호는 모당(慕堂)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인이다.대구의 청호서원(靑湖

             書院)에 제향.

         9) 희노(希魯) : 본관은 일직(一直), 휘(諱)는 손처악(孫處約) 광해 5년 계축(癸丑)

             증광시(增廣試) 진사(進士) 손처눌(孫處訥)의 아우.

       10) 납실(納室) : 경북 칠곡군 지천면 연호리를 말한다.

       11) 학무(學懋) : 아헌공(啞軒公)의 송원기(宋遠器) 자(字)는 학무(學懋)이 다.

       12) 행보(行甫) :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의 자(字)가 행보(行甫)이다.

             선생은 조선 중기의 학자이다.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인으로 주자학

            (朱子學)과 퇴계(退溪)를 깊이 있게 연구하였다. 대구의 이강서원(伊江書院)에

           제향 되었다.

      13) 정자숙... 비석돌 : 興正字叔 及希魯 向大谷路 聞來納室 馳入學戀寓所 先生

            曾己山 行甫己告別發程 在學戀寓處行甫 曾輤先生訪硏經 置助未得 見 我大

           喜語此由 仍留行甫  同行之計 入山 拜先生於路次 八莒縣 關巖山 看碑石品

           《慕堂日記》

     14) 문목공(文穆公) : 한강 정구선생의 시호(諡號)이다.

     15) 옛날... 가까운 곳이다. : 昔我文穆公先生 晩年 卜地於泗陽 惟我先祖 啞軒公

          亦追先生 而來居於梅南 梅南於泗陽隔一嶺 崇朝之地也 《梅軒集 (汶陽齎舍記)》

     16) 참의공(參議公) : 아헌공(啞軒公)의 증손자 송세은(宋世殷)을 말한다. 인조 12

          년(1634)에 생하였다. 통정대부(通政大夫) 호조참의(戶曹參議) 에 증직 되었다.

     17) 아헌공.... 때문이다. : 其後 我曾祖奉親 於居梅南 以李氏丘墓田園之在此故也

          《汶陽齎舍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