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각사 (麟角寺)
2023년 3월 16일 오전 10시 대구를 거쳐 군위 화산 전망대에 갔다가 근처에 있는 인각사를 10년만에 찾았다.
인각사는 일연선사가 삼국유사를 쓴 곳으로 유명하다,
인각사(麟角寺)는 경상북도 군위군 삼국유사면 삼국유사로 250,(옛주소)군위군 고로면 화북리에 자리잡고 있다 .
인각사에서는 2013년도에 갔을적의 발굴현황(지난 1992년도부터 2009년 1월 현재 절의 옛 모습을 추정하기 위해 발굴이 계속되고 있는 실정이다 .
현재 제 10 차 발굴까지 계획되어 있으며 발굴 조사 중이고, 고려시대 (일연스님 당시)의 절 규모를 밝혀내어 복원할 계획이다 . 따라서 현재는 절의 아름다운 모습을 기대할 수 없는 실정이다 .
인각사는 전설상의 동물인 기린의 형상을 닮은 화산의 자락에 있고, 절이 자리 잡은 터는 기린의 뿔끝에 있어 인각사라 이름 하였다.
기린은 사슴의 몸에 말의 발굽과 소의 꼬리를 갖고 있으며 온몸에 영롱한 비늘이 덮여 있다는 상상의 동물이다.
중국인들은 성인 (聖人 )이 태어날 때 나타난다는 전설이 있으며, 산 풀을 밟지 않을 뿐 아니라 머리에 돋은 뿔이 살로 되어있어 다른 짐승을 해치지 않는 인자한 동물이기도 하다 . 희망과 행복을 전해주는 기린은 용 , 봉황 , 거북과 함께 상서로운 네 영물의 하나이다.
기린(麒麟 )은 길상(吉詳 )의 사령(四靈 :용, 기린, 봉황, 거북 )중 하나로 성인 (聖人)이 세상에 태어날 징조로 나타나는 상징의 동물로서 우리에게 희망과 성공, 그리고 행복을 전해준다 .
이와 같은 기린의 전설과 상징 때문에 재주가 뛰어나고 지혜가 비상한 사람을 가리켜 기린아(麒麟兒)라 부르는가 하면 , 신라시대에는 기린문양(麒麟文楊)을 부조(浮彫)한 벽돌을 만들어 건축에 이용하였으며, 고려시대에 이르러는 왕을 호위하는 호위군을 기린군(麒麟軍)이라 칭하고 기린을 수놓은 기린의장기(麒麟儀仗旗 )를 세워 그 위용을 떨쳤다 .
이와 같이 인각사는 우리 민족이 기린과 같이 인자하면서도 재주가 뛰어난 인걸(人傑)이 많이 나타나기를 기원하며 세워진 절이 아니었을까?
인각사는 사적 제 374호로 지정된 문화재 보호지역으로써 행정구역상 (옛주소)경상북도 군위군 화북리 (軍威郡 華北理 ) 612, 613 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 교통 상으로는 영천-안동 간 28번 국도상에 있는 화수 삼거리에서 동으로 위천 상류를 따라 나 있는 908번 지방도를 따라 약 2.5km 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
인각사의 주변지세는 남쪽은 속칭 절 뒷산 (해발 364m)으로 불리우는 화산 (해발 760m)의 지맥이 뻗어있고 북쪽은 인각(麟角)의 전설을 가지고 있는 학소대 (鶴巢臺 )와 옥녀봉 (해발 564m)이 병풍처럼 높은 단애로서 가로막고 있으며 , 그 앞으로 위천 (渭川 )이 동서로 좁았다 넓었다 하면서 서류 (西流 )하고 있다 . 그리고 동과 서는 소위 인각 (麟角 )의 뿔로서 알려진 화산 (華山 )의 지맥 (支脈 )이 인각사의 동과 서로 흘러 내려와 소위 풍수상의 좌청룡 우백호를 이루고 있다 . 즉 동쪽은 조산 (造山 )이라고 불리우는 산자락이 흘러 내려와 있고 서쪽은 현재는 논으로 경작되고 있는 상황이다 . 그러나 과거 1973 년에 정리되었던 지적도에 서쪽의 논들이 산으로 표시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인각사의 과거 지형은 동과 서가 화산의 지맥이 흘러 내려와 있는 오목한 곳에 자리를 잡았던 것으로 보인다 .
극락전과 삼층석탑
삼층석탑
극락전의 중앙(아미타부처님), 왼쪽(대세지보살), 오른쪽(관세음보살)
미륵당(문이 열리지않아 안을 볼수 없었다)
산령각(산신각)
보각국사 탑비
보각국사 일연선사
<삼국유사 >의 저자 일연은 몽고 침략과 간섭이 계속되던 매우 어려운 시기에 주로 활동했던 인물이다. 그는 9세에 무량사에 가서 취학하고 14세에 진전사(陳田寺)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 일찍부터 그의 명망은 자자했고, 승려의 최고 고시인 선불장에서 상상과에 합격한 바 있는데, 그때의 나이는 22세였다. 그 후 그는 대구 비슬산의 무주암에서 몽고의 병난을 피하면서 조용히 수행했다. 원종의 부름을 받아 강화도의 선월사에 머물면서부터 그의 교화 활동은 활발해졌고 또 충렬왕 때에는 국사에 책봉되어 왕과 신하들로부터 지극한 존경을 받기도 했다. 그는 1289년 84세의 나이로 인각사에서 입적할 때까지 수행과 교화를 하루도 게을리하지 않았고, 노모를 지극한 효성으로 모시기도 했다. 그는 선사였음에도 불구하고 100여권의 방대한 저술을 남길 정도로 교학에도 힘썼고, 백가에 두루 통했을 정도로 학문의 폭을 넓혔다. 이러한 사실을 놓고 볼 때, 일연선사는 그 시대를 살고 있던 어떤 지식인보다도 역사의식을 뚜렷이 가지고 있었다고 보여 진다. 몽고의 병화로 불타버린 황룡사의 참혹한 광경을 둘러보기도 했다.
그는 이민족의 침략과 간섭으로 인한 민족적 수난을 겪는 동안 그 현실적 수난을 극복하기 위해 과거 역사전통의 재인식을 통해 민족의 자주정신을 강조하고자 했다. 물리적인 힘의 대결이 이미 어려운 상태에 이른 13세기 고려인들의 공통적인 과제는 역시 민족의 자주적인 역사전통을 바로 세우는 일이었다. 이러한 민족적인 숙원과제를 가장 잘 해결해준 것이 <삼국유사>였다.
일연선사는 우리나라의 역사전통을 불교중심으로 파악하면서 그의 역사의식을 불교적인 정신사관으로 전개시키고 있다. 이점은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김부식의 유교적인 정치사관과는 크게 다른 점이다. 신라 시대이후 고려시대까지의 문화적, 사상적, 종교적 기반이 불교에 있었음을 감안하면 일연의 이와 같은 인식은 절체정명의 과업이었다.
석불좌상
명부전
국사전
일연선사 생애 일부
보각국사 일연스님이 경상도 경주의 속현이었던 장산군(章山郡: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에서 태어난 것은 고려 희종(熙宗)
2년(1206)이다 . 이름은 견명 (見明)이었으나 뒤에 일연(一然)으로 바꿨다. 자(字)는 회연(晦然)이며, 호(號)는 목암(睦庵)이다. 아버지 김언필(金彦弼)과 어머니 이씨(李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벼슬을 하지 않았으나 국사의 덕으로 좌복야(左僕射)를 증직 받았으며 어머니 역시 낙랑군부인(樂浪郡夫人)에 봉해졌다. 어머니 이씨는 해가 삼일 동안이나 계속 집에 들어와 자신의 배를 따스하게 비춰주는 태몽을 꾸고 스님을 잉태하였다. 그래서인지 일연스님은 어려서부터 용모가 매우 준수하고 몸가짐과 예절을 갖춤에 있어서도 매우 단정하였다. 아홉 살이 되던 해인 고종 1년(1214)에 스님은 벌써 세속을 벗어나려는 뜻이 있어 해양(海陽: 지금의 광주지방)의 무량사(無量寺)로 들어가 공부를 시작하였다. 장성하면서 친구간에 쓸데없는 농담은 나누지 않았고 품성이 가식할 줄 모르며 , 매사에 매우 차분하고 진지하였다 . 군중에 둘러싸여 있어도 그들과 어울리지 않고 마치 홀로 있는 것처럼 처신했고 신분이 높아질수록 더욱 겸손할 줄 알았다. 까닭에 배움에 있어 스승에게 배워서 깨쳤다기 보다는 스승의 가르침없이 자연히 통해 깨닫는다, 불유사훈 자연통효(不由師訓 自然通曉)라는 말처럼 터득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이곳 인각사에서 약 1km 떨어진 곳에 일연선사의 모친 묘소가 있다
국사전
요사채
발굴된 주춧돌들~
학소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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