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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10년 5월 1일 홍문관 부제학 유희춘의 졸기
홍문관 부제학 유희춘(柳希春)이 졸하였다. 희춘은 대대로 해남현(海南縣)에 살았는데, 고적한 신분으로서 떨쳐 일어나 문학(文學)으로 출세하였다. 을사 사화(乙巳士禍) 때 희춘은 김광준(金光準)과 이웃에 살았으며, 임백령(林百齡)은 같은 고향 출신으로 친분이 있었으므로 내지(內旨)를 받들어 따르도록 은밀히 타일렀으나, 희춘은 응하지 않았다. 그리고 중학(中學)의 모임에서 송희규(宋希奎) 등과 함께 민제인(閔齊仁)·김광준의 의논을 배척하였다. 광준 등은 희춘이 자신들의 위협에 따를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나, 그에게 크게 좌절(挫折)당하자 원한이 더욱 무거워져 기필코 죽이려 하였다. 처음에 제주도로 귀양을 보냈는데 논자들이, ‘제주도는 해남에 가깝다.’ 하여 북계(北界)의 종성(鍾城)으로 이배(移配)시키니, 고향의 집과는 3천 리가 떨어진 거리였다. 20년이 지나서야 가까운 곳으로 옮겼고, 1년이 지나 상이 즉위하자 사면을 입어 다시 등용되었다. 그는 유배지에 있을 때, 곤궁한 처지에서도 태연스럽게 여겨 깊이 사색하고 저술하며 입으로는 글을 외고 손으로는 책을 베껴 밤낮을 쉬지 않았다. 변방의 습속은 글자를 아는 사람이 적었는데, 희춘의 가르침으로 인하여 이로부터 글을 배우는 사람이 많아졌다.
조정에 돌아오자 오랫동안 경연에서 임금을 모시면서 지성으로 아뢰어 속에 품고 있는 것을 다 말하니, 상은 그의 정밀하고 박식한 것을 기뻐하였다. 그리고 자문(諮問)할 적마다 대답하는 데 있어 반드시 옛일을 끌어다 증거하여 분명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상은 그의 기특함을 칭찬하였다. 희춘은 기억력이 남보다 뛰어나 경서(經書)나 사서(史書)를 한 번 보기만 하면 외니, 당대의 박학(博學)한 유신(儒臣)인 기대승(奇大升)·김계휘(金繼輝) 등이 모두 첫째 자리를 양보하였다. 천성이 온화하고 후하여 모나지 않았으며 조용하고 검소하여 마치 빈한한 선비처럼 처신하였다. 다만 서적을 몹시 좋아하여 음악과 여색에 빠진 것처럼 하였다. 연로해지자 물러가기를 청하면서 사직하는 소장이 간절하였으나, 상은 곧 아끼어 머물게 하고 많은 물품을 하사하였다. 물러간 뒤에 다시 부제학을 제수하자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에 특별히 자헌(資憲)의 품계(品階)로 올리고, 또 교지를 내리기를, ‘경이 오랫동안 경연에서 수고한 것을 생각하여 특별히 자헌으로 올렸으니, 경은 올라와서 사은(謝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지금 봄옷도 마련되었을 것이고 날씨 마저 온화하여 여행하기에 매우 온편할 것이니, 속히 올라와서 나의 뜻에 부응하라.’ 하였는데 교지를 받고 감격하여 사은하고 물러가려 하였는데, 도착하자 병이나서 끝내 졸하니, 상이 슬퍼하며 좌찬성을 증직하도록 하였다.
희춘은 사장(詞章)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가 찬술(撰述)하고 편집한 것이 매우 많았는데, 그가 올린 《유선록(儒先錄)》·《신증유합(信增類合)》은 모두 간행하도록 하였다. 또 《육서부주(六書附註)》·《강목고이(綱目考異)》·《역대요록(歷大要錄)》·《속몽구(續蒙求)》·《천해록(川海錄)》·《주자대전어류전석(朱子大全語類箋釋)》 등의 책은 모두 경전(經傳)을 보충하고 고금(古今)을 파헤친 것으로 후학들에게 도움이 있었다. 만년에 교지를 받들어 《경서구결언석(經書口訣諺釋)》·《선주대학석의(先奏大學釋義)》를 찬정(撰定)하였고, 나머지는 미처 완성 하지 못하고 죽었다.
【원전】 25 집 469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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