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스크랩] 조선왕조실록의 충숙공(忠肅公) 관련 사료(명종,明宗)

공간(空間) 2017. 1. 2. 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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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 원년 08/06(병신) / 대사간 김광준이 과거에 논박당한 일을 들어 체직을 청하나 불윤하다

대사간 김광준(金光準)이 아뢰기를,
  “신은 영락한 가문의 후손으로 문자를 대강 익혀 일찍이 등과(登科)하여 선왕조에서 여러 차례 은총을 입고 분수에 넘치는 자리에 앉아 있은 지 30년 가까이 되었습니다. 그 동안 풍습(風濕)의 중병을 무릅쓰고 부지런히 직무에 임하여 견마(犬馬)의 정성을 바쳤으나 조금도 돕지는 못하고 매양 청반(淸班)을 더럽히기만 하였으므로 부끄럽고 두려워 어쩔 줄 모르고 있는데, 어찌 이제 다시 그릇 전하의 권면을 입어 이렇게 선임(選任)될 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감격스러움을 이기지 못하여 눈물이 저절로 흘러 내립니다. 다만 신은 기질이 혼암(昏暗)하고 생각이 거칠어서 기해년 본직에 제수되었을 때 계사(啓辭)가 잘못되어 간관의 체통을 잃은 것이 많아 중한 논박을 받고 체직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러한 정사의 처음을 당하여 임금을 보좌하는 직임은 더욱 신중히 선택해야 하는데, 조정에 있는 동렬(同列)들로서 누군들 신을 오활하고 어리석어 일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고 여기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신은 전일 상중(喪中)에 있을 때 형의 집에서 무고(巫蠱)의 옥사(獄事)가 있었는데 그 뒤로는 가문의 누로 여겨 항상 부끄러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명기(名器)를 더럽히게 되면 비단 소신이 불안할 뿐 아니라 명기가 이 때문에 손상될 것입니다. 신의 직을 갈아 여론에 응하고 언관의 책임을 중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여러 대 동안 청반(淸班)을 역임하였으니 비록 한때 계사의 착오로 체직되었다고 하더라도 어찌 이 때문에 복직될 수 없겠는가. 가문의 일로 피혐하는 것은 더욱 불가하니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김광준이 재차 아뢰기를,
  “이러한 때에는 국정은 오로지 대신에게 의지하고 인재 등용하는 일은 모름지기 전조에 맡겨야 합니다. 모든 관직을 주의(注擬)할 때에는 반드시 수망(首望)을 뽑고 그 나머지는 비록 공론에 흡족하지 못하더라도 구차히 망(望)에 충당되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망에 든 자라고 반드시 적격자는 아닙니다.【김광준은 이 직에서 단지 부(副)에 의망되었으므로 하는 말이다.】 그리고 의논할 때에 모든 재결하는 일은 장관에게 달렸기 때문에 양사의 장관은 더욱 중한데, 신과 같이 노둔하고 용렬하며 구차히 망에 충당된 사람을 임명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속히 신의 직을 갈으소서.”
  하니, 답하기를,
  “사직하지 말라는 뜻을 이미 다 말하였다.”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광준의 아비는 일찍이 그의 첩과 첩의 소생들을 지나치게 사랑하여 재산을 많이 나누어 주고 적자들은 박대하여 적게 나누어 주었으므로 항상 원망과 분노를 품고 있었다. 그 아비가 죽었을 때 광준은 대사간으로 상중에 있었는데, 마침 그 형이 병사하자 형의 아내를 시켜 관에 거짓 고소하기를 ‘서모(庶母)와 서동생들이 요사스러운 술책으로 우리 남편을 죽게 했으니 잡아다가 죄를 다스리소서.’ 하였다. 상주 목사(尙州牧使) 송희규(宋希奎)가 증거가 없는 것을 의심하여 즉시 따르지 않으니, 광준이 쪽지를 송희규에게 보내 속히 가두어 국문하도록 은밀히 부탁하였으므로 희규가 부득이 서모와 서동생 몇 사람을 가두고 형신(刑訊)을 하였다.
  이때 우참찬(右參贊) 이언적(李彦迪)이 근친(覲親)하러 가던 도중 상주를 지나다가 온당하지 않다는 뜻을 말하자, 이희규는 주머니 속에서 광준의 편지를 꺼내 보이면서 ‘이렇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그렇게 했다.’고 하였다. 이언적이 또 광준에게 편지를 보내 책망했으나 그 답서에는 조금도 스스로 뉘우치는 뜻이 없고 분해하고 유감으로 여기는 내용이 많았다. 문경 현감(聞慶縣監) 안경우(安景祐)도 추관(推官)으로서 역시 그 사건이 사실이 아님을 알고 언적을 만나 잔인한 정상을 남김없이 다 말하였다. 광준은 상을 마치고 복직하자 그 사실이 공론에 발의될까 몹시 두려워하다가 이제 대사간이 되자 이 사실을 들어 아뢰었다. 을사년의 화를 틈타서는 자기를 논란한 사람들을 모두 제거하여 그들의 입을 막으려고 권간(權奸)에게 청탁하여 송희규·안경우를 모두 멀리 유배시키기까지 하여 그 정상이 환히 드러났으니 흉참하기 짝이 없다.】

  【원전】 19 집 285 면

명종 원년 08/11(신축) / 조강에서 《소학》을 강하고, 홍언필 등이 그 뜻을 아뢰다

상이 조강에 나아갔다. 《소학》을 강했는데 영경연사 홍언필이 아뢰기를,
  “《소학》은 상께서 이미 읽으셨겠지만 지금 자세히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소하고 응대하고 진퇴하는 등 일상 생활의 행동이 비록 소소한 일이기는 하나 처음 학문을 할 때는 이것으로 근본을 세우는 것입니다. 나무로 말한다면 뿌리가 튼튼한 뒤에라야 가지와 잎이 무성하게 되고, 물로 말한다면 근원이 깨끗한 뒤에라야 흐르는 물이 맑습니다. 임금 역시 반드시 마음을 바르게 한 뒤에라야 백관과 조정을 바르게 할 수 있습니다. 고금의 임금들이 마음을 바르게 하지 못했던 것은 사욕(私慾)이 많기 때문이었습니다. 궁궐 안에 계실 때에 언제나 사욕이 없도록 하신다면 나라를 다스리는 일도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새로 정사하는 처음에는 큰 근본이 세워진 뒤에라야 치도(治道)를 이룰 수 있습니다.”
  하고, 지경연사 권벌이 아뢰기를,
  “천지 사이에서 사람이 가장 영묘(靈妙)하고 천품이 순수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학문을  한 뒤에라야 고금의 사실과 의리의 근원을 알아서 일을 처리하고 사물을 대응함에 모두 그 정당함을 얻게 됩니다. 옛날 사람들은 8세에 소학(小學)에 들어갔다고 했으나 그 곳에서 배운 책은 보지 못하였고, 주자(朱子)가 처음으로 《예기(禮記)》 중에서 뽑아내고 또 옛사람의 가언(嘉言)과 선행(善行)을 모아 이 책을 완성했습니다. 주자는 일곱 살에 《효경(孝經)》을 읽고는 ‘이것을 모르면 성인(成人)이 될 수 없다.’ 하였습니다. 만약 힘써 배운다면 시원하게 통달하게 되어 마치 나무를 심는 자가 그 뿌리는 북돋우고, 건물을 세우는 자가 그 토대를 튼튼히 하는 것 같을 것이니 모든 일을 처리하고 사물을 대할 때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하고, 사간(司諫) 박광우(朴光佑)가 아뢰기를,
  “고금의 임금과 학자들이 누군들 《소학》을 읽지 않았겠습니까마는 입으로 외고 귀로 듣기만 했기 때문에 진정으로 배운 것은 대개 적습니다. 그러므로 위로는 어진 임금이 없고 아래로는 어진 신하가 없었습니다. 만약 이것을 힘써 실천한다면 날마다 달마다 점차 변화되어 성현의 경지에 이르게 될 것이니 성현이 되기가 어렵다고 하지 말고 기필코 배워야 합니다. 요순도 다른 사람과 같습니다.”
  하고, 집의(執義) 송희규(宋希奎)가 아뢰기를,
  “주공(周公)은 성왕(成王)을 보좌하면서 전후 좌우에 바른 사람만 있게 하고, 바른 일만 보게 하고, 바른 말만 듣게 했기 때문에 성왕의 학문이 천고에 빼어났습니다. 한 소제(漢昭帝)는 8세에 즉위했는데도 타고난 자질이 영민하여 곽광(쥦光)의 충성심과 상관걸(上官桀)의 거짓을 알았으니 진실로 성왕의 자질보다 못하지 않았는데, 곽광이 학술이 없어 성정(誠正)의 학문으로 가르치지 못했기 때문에 끝내는 중등 임금밖에 되지 못했습니다. 전하께서는 어린 몸으로 즉위하였으니 대신들은 주공이 성왕을 보필한 법도를 본받고, 전하께서는 대신의 말들을 성심으로 대하셔서 마음 속에 간직하여 잊지 않고 궁인이나 환시(宦侍)의 말은 심중에 접하지 못하게 한다면 언동과 호령이 모두 정도(正道)에 맞게 될 것입니다. 임금의 마음이 이미 바르고 대신을 신뢰하며 대간과 시종(侍從)의 말을 듣는다면 종묘 사직과 생민의 복이 무궁할 것입니다.”
  하고, 시독관(侍讀官) 곽순(郭珣)이 아뢰기를,
  “주공이 성왕을 잘 보필하였으나 끝내 참설의 의혹을 면하지 못하였고 소제는 충성되고 거짓됨을 알아서 분별하였으니, 타고난 자질은 소제가 우수했습니다. 그런데도 끝내 소제의 어짊이 성왕에 미치지 못한 것은 배웠느냐 배우지 못했느냐의 차이 때문입니다. 국가에 있어서 참설의 해는 큽니다. 주공은 숙부였는데도 참소당하는 것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후세에 국가가 패망하게 된 원인은 모두 참소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지금엔 유교(遺敎)를 받은 대신들에게 위임하셔야 합니다. 소제는 크게 어진 임금이 아닌데도 곽광을 신임함이 저와 같았으니 전하께서는 진실로 유념하지 않으시면 안 됩니다.”
  하고, 박광우는 아뢰기를,
  “참설이 들어오는 것은 반드시 환관이나 궁첩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옛사람들은 엄격하게 대하도록 경계했습니다. 송 철종(宋哲宗)이 10세에 즉위하자, 그 당시 범조우(范祖禹)와 정자(程子)는 항상 환관과 궁첩을 대하는 시간은 많고 어진 사대부를 접하는 시간은 적다고 지적하였습니다. 지금 경연의 석상에서 사대부들이 어찌 간사한 말을 하겠습니까. 궐내에 들어가셔서 어떠하신지를 모르겠습니다. 만약 안에서나 밖에서나 한결같이 하신다면 학문이 반드시 쉽게 고명한 경지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철종은 10세로 아직 어렸는데도 범조우는 만약 2∼3년 지나면 필시 전일(專一)하지 못할 것이라고 여겼으니, 대개 나이가 점점 많아지면 생각하는 것이 많아져 학문에 정성을 다하지 못하게 되고 이로 말미암아 참설 또한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사람들이 두려워했습니다. 대행 대왕께서는 궁중에 계실 때 항상 엄정하시어 아랫사람들을 가까이 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이러한 걱정은 없었습니다. 지금 어린 임금이 즉위하여 필시 궁중의 잡된 말들이 계달되기 쉬우니 모름지기 처음부터 엄금하소서.”
  하고, 권벌은 아뢰기를,
  “좌우의 모든 대부와 나라 사람들이 모두들 어질다고 한 뒤에 등용하고, 모두들 죽여야 한다고 한 뒤에 죽인다는 것은 공론을 따라야지 독단으로 처리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무릇 사람의 심술은 끝까지 가리울 수가 없어 진실로 사심(邪心)이 있다면 모를 리가 없게 됩니다. 대행 대왕께서 전하께 전위하시어 온 나라를 주셨으니 일이 막중합니다. 밤낮으로 효성을 잊지 마시고 조종께서 부탁하신 중임을 생각하시면 국가의 모든 일이 반드시 잘 처리될 것입니다. 대행 대왕께서는 공도(公道)로 일을 처리하셨기 때문에 즉위하신 지 오래지 않아 중외(中外)가 열복(悅服)하였으니 상께서도 모름지기 공도를 생각하소서. ‘방심(放心)을 거두라.’고 한 말은 맹자(孟子)의 말이며 ‘대본(大本)을 세우라.’ 한 것은 《중용(中庸)》의 말입니다. 마음이 방일(放逸)하지 않고 대본이 확립된다면 공도는 시행될 것입니다.”
  하고, 곽순은 아뢰기를,
  “방일하게 되는 것은 욕심이 있기 때문이니, 방심을 거둔다는 것은 다만 그 욕심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사 이래 제왕들이 욕심을 버릴 수 없었던 까닭은 뜻을 세울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요순같은 성인이 되기를 기약하고 먼저 그 뜻을 세운 뒤 말하거나 행동할 때마다 ‘요순도 이런 말을 했던가?’ ‘요순도 이런 행동을 했던가?’라고 하여 요순이 했음직한 말을 하고 행했음직한 행동만 하며, 요순이 하지 않았을 말은 하지 않고 행하지 않았을 행동은 하지 않기로 마음먹는다면 방심을 거두는 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원전】 19 집 287 면

명종 원년 08/22(임자) / 집의 송희규 등이 윤임의 일을 논계하지 못한 일로 체직을 청하나 불윤하다

집의(執義) 송희규(宋希奎), 사간(司諫) 박광우(朴光佑), 장령(掌令) 정희등(鄭希登)·이언침(李彦?), 헌납(獻納) 백인걸(白仁傑), 지평(持平) 김저(金썚)·민기문(閔起文), 정언(正言) 김난상(金鸞祥)·유희춘(柳希春)이 아뢰기를,
  “어제 대사헌 민제인, 대사간 김광준이 윤임 등 3인을 논계하려고 신들과 회의할 때에 신들이 ‘3인은 비록 논란할 만한 일이 있지만 임금이 어리시어 국가가 위태로운 때에 간사한 무리가 거짓말을 퍼뜨리어 인심을 선동하니 논계할 때가 아니고, 그저 간사한 계략에 빠져서 사림의 화만 더 할 것이다.’고 하여 의논이 통일되지 못하고 파하였습니다. 이렇게 중대한 일을 즉시 논계하지 못하였으니 직임에 매우 충실하지 못한 것입니다. 신들을 체직시키소서.”
  하니, 답하기를,
  “임금이 어려 나라가 위태로운 때에 간사한 무리들이 인심을 선동하는 일은 크게 종사에 관계된 일이기 때문에 조정의 의논으로 이미 그 죄를 정하였으니 어찌 사림에 화가 있겠는가. 이미 의논이 일치하지 못하여 중지했으니 사직할 것 없다.”
  하였는데, 송희규 등이 아뢰기를,
  “반복해서 생각해도 직에 있을 수 없으니 물러가 물론을 기다리겠습니다.”
  하였다.

  【원전】 19 집 298 면

명종 원년 08/23(계축) / 송희규 등이 윤임에 대해 일치된 의견을 아뢰지 못한 일로 체직을 청하다

집의 송희규와 사간 박광우 등이【위에 보인다.】 아뢰기를,
  “당초 회의할 때에 이미 윤임 등을 논계해야 할 단서를 듣고도 식견이 얕아서 장관의 의견을 어겨 일치된 의견으로 아뢰지 못하였으니 혼암하게 직임을 다하지 못한 점이 많습니다. 결코 그대로 언관의 지위에 있을 수 없으니 신들의 직을 갈아 주소서.”
  하였는데, 답하기를,
  “의견이 통일되지 않은 때문이다. 대신이 출사를 청하는 것이 어찌 까닭이 없겠는가? 고집 부릴 것이 없다.”
  하니, 송희규와 박광우가 아뢰기를,
  “반복해서 생각해봐도 결코 직에 나갈 수 없습니다. 물러가 물론을 기다리겠습니다.”
  하였다. 민제인과 김광준이 아뢰기를,
  “어제 집의 송희규 등이 한 말은 간절하고 바르니 이것이야 말로 공도(公道)를 부양하고 뒤폐단을 구제할 지극한 뜻입니다. 신들이 처음 의논하여 아뢰려다가 결정을 보지 못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어제 명소(命召)하시었을 때 신들은 동료들의 의논을 돌아보지 않고 급하게 들어와 아뢰었으니 잘못한 점이 많습니다. 동료들로부터 논박을 받을 뿐 아니라 사림도 모두 괴이하게 여길 것이니 이러한데도 구차하게 직에 나아간다면 신들의 파렴치함은 더욱 심해지고 대간의 체통은 완전히 없어질 것입니다. 신들은 피혐하기 위해서만이 아니고 끝내 명기(名器)를 더럽힐 수 없어서입니다. 전하께서는 신들 두 사람의 거취 때문에 공론의 소재를 돌보지 않으셔서는 안 됩니다. 속히 신들의 직을 갈으셔서 대간의 체통을 중하게 하소서.”
  하자, 답하기를,
  “이것은 작은 일이 아니라 종사에 크게 관계되기 때문에 명소하여 대신과 결정한 것이다. 대신이 어찌 범연히 헤아리고 출사를 청했겠는가. 더욱 굳이 사피해서는 안 된다.”
  하니, 민제인·김광준이 아뢰기를,
  “옛날부터 대간이 이와 같이 하고서 직에 나온 일은 없었습니다. 밤이 깊었으므로 우선 물러가겠습니다.”
  하였다.

  【원전】 19 집 299 면


명종 원년 08/23(계축) / 헌납 백인걸 등이 윤임의 일을 원상과 의논하지 않은 것이 부당함을 아뢰다

헌납(獻納) 백인걸(白仁傑)이 아뢰기를,
  “위의 정사는 아무리 미세한 일이라도 광명 정대하게 하고 나라 사람들이 모두 알도록 해야 합니다. 이번 윤임의 일은 마땅히 원상(院想)에게 의논하여 처리하셨어야 했는데 내간에서 윤원형(尹元衡)에게 밀지(密旨)를 내려 몇몇 재상들로 하여금 직계(直啓)하도록 하고 경상(卿相)들을 명초(命招)하여 그 죄를 정했습니다. 죄를 결정한 것은 옳았으나 죄를 준 방법은 크게 사체(事體)를 잃었습니다. 위에서 밀지를 원상에게 내리지 않고 윤원형에게 내렸으니 필시 뒷날 간사한 무리들이 이것을 단서로 삼아 뜻을 얻을 것입니다. 더구나 죄인은 정당한 명목으로 죄를 정해야 나라 사람들이 모두 ‘누구는 무슨 일로 무슨 죄를 받았다.’고 할 것인데 윤임 등 3인의 죄는 단지 ‘원찬(遠竄)·파직(罷職)·체차(遞差)’라고만 하였고 전지의 사연이 없으니 역시 국법의 상도가 아닙니다. 윤원형은 지친(至親)으로서 전지를 받은 처음에 방계(防啓)하기를 ‘이처럼 비밀스러운 일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조처하게 하더라도 뒤폐단이 있을 것인데 하물며 지친으로서 순순히 따라 거행한다면 장차 폐단을 구제하기 어려울 것이다.’라고 했다면 위로는 일을 잘못 처리하신 실수가 없고, 아래로는 폐단을 끼칠 걱정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급급하게 스스로 재상과 통하여 국법이 광명 정대한 데서 나오지 못하게 하였으니 지극히 그릅니다. 추고하소서.
  대사헌 민제인과 대사간 김광준이 윤임을 논계하는 일에 관해 신들과 의논할 때에 신들은 ‘나라에는 대신이 있고 또 육경이 있는데 이 일은 여기에서 나오지 않고 밀지에서 나왔으니 그릇됨이 심하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각자 의견을 주장하였고 민제인과 김광준도 그렇게 생각하여 드디어 논계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잘 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면대하여 윤원형의 잘못을 아뢰었어야 하는데 아뢰지 않았으니 또한 잘못이었습니다. 더구나 민제인은 헌부의 장관으로서 밀지가 내렸다는 것을 듣고는 전령(傳令)하는 군졸처럼 재상의 집으로 쫓아다녔으니 이것이 비록 윗전을 위로하려는 생각에서 나왔다고 하더라도 대간의 체통이 쓸어버린 듯이 없어졌습니다. 집의 송희규, 사간 박광우, 장령 정희등(鄭希登)·이언침(李彦?)·지평 김저(金썚)·민기문(閔起文), 정언 김난상(金鸞祥)·유희춘(柳希春)은 신이 아뢴 뜻과 시종 서로 같았으나 즉시 결단하여 아뢰지 않고 번거롭게 사피하여 머뭇거리는 행동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언관으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않은 것으로 역시 잘못입니다. 아울러 체직시키소서.”
  하니, 답하기를,
  “종사에 화가 닥쳤기 때문에 부득이 밀지를 내려 조정과 의논하여 결정한 것이다. 아뢴 뜻은 조정과 다시 의논하여 조처하겠다.”
  하였다.【당시 백인걸이 부름을 받고 예궐하여 이를 아뢰려고 할 때에 그의 어미와 처에게 고하기를 ‘내가 지금 가면 필시 의금부(義禁府)에 하옥되어 유배되는 사태가 발생할 것이니 놀라지 말라.’ 하니 어미와 아내가 울면서 말렸으나 듣지 않았다.】
  【사신은 논한다. 심하도다. 소인이 국가에 해를 끼침이여! 자기와 뜻을 달리하는 사람을 해치려고 하는데 조정이 따르지 않을 듯하자 자전을 현혹시켜 밀지를 빙자하여 협박으로써 공명 정대해야 할 임금의 거조를 암매(暗昧)한 지경으로 빠지게 하고, 당시의 공론을 봉쇄하여 일망 타진할 계략을 폈으니 하늘까지 닿을 그 죄를 이루 다 주벌할 수 있겠는가. 백인걸은 분발하여 자기 자신의 안전을 돌보지 않고 낯빛을 바로하고 직언을 하였으니 비록 그의 말이 조금도 시행되지 않고 곧바로 죄를 받아 배척되기는 하였으나 여러 간신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올바른 사람들의 기상을 씩씩하게 하기에는 넉넉했으니 우주간에 이러한 행동이 없어서는 안 된다. 옛날 장남헌(張南軒)이 호전(胡銓)의 봉사(封事)를 일컬어 일월과 광명(光明)을 다툴 만하다고 하였는데, 신은 백인걸의 이 계문도 또한 그렇다고 하겠다.】

  【원전】 19 집 300 면


명종 원년 08/24(갑인) / 비망기를 내려 윤임 등과 관련된 자들의 죄에 대해 논의할 것을 명하다

비망기(備忘記)를 영의정 윤인경 등에게 내리기를,【우의정 이기, 좌찬성 이언적, 우참찬 신광한(申光漢), 이조 판서 임백령, 호조 판서 허자, 예조 판서 윤개, 병조 판서 권벌, 형조 판서 정옥형, 한성부 판윤 윤사익(尹思翼)이 명을 받고 경회문(慶會門)에 모였다.】
  “내가 홍문관【22일에 보인다.】 헌납(獻納)이【백인걸(白仁傑)이다. 어제 기사에 보인다.】 아뢴 것을 보니 모두 밀지를 그르다고 논한 것이다. 밀지 같은 것을 어찌 위에서 하고 싶어 했겠는가. 임금이 어리고 나라가 위태로운 때에 윤임은 본디부터 흉심(兇心)을 기르며 집권 대신과【유관·유인숙을 가리킨다.】 결탁하여 종사를 위해(危害)할 음모를 꾸몄다. 이렇게 위급한 데도 대간과 시종은 난을 구제할 한 마디의 직언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고례(古例)에 의거, 할 수 없이 밀지를 내린 것이다. 다행히 조정 공론에 드러났으나 가벼운 죄를 준 것은 상하가 민심을 진정하고자 함이었다. 이러한 본의는 면대할 때에 재상들도 모두 이미 알았다. 지금 밀지가 정당하지 않다고 가탁, 도리어 동료와 장관을 논박하여 국사를 깊이 걱정하는 사람을 명을 전달하는 군졸 같다고 하니 이것은 정도(正道)를 가탁하여 역적을 비호함이 분명하여 국사를 깊이 걱정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편안히 직무를 다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시종과 대간이 모두 바른 말을 못하는데 만약 밀지를 내리지 않았더라면 우리 모자는 고립되어 앉아서 죽기를 기다렸어야 한단 말인가. 이 사람이 아뢴 것은 지극히 해괴하고 놀랍다. 이것은 사체에 크게 관계되니 통탄을 금할 수 없다. 백인걸은 반드시 간사한 무리들의 말을 듣고 이러한 의논을 내었을 것이니 먼저 파직시켜 금부에 가두고 엄하게 추문하라. 집의(執義)【송희규(宋希奎).】 사간(司諫)【박광우(朴光佑).】 이하를【장령 정희등(鄭希登)·이언침(李彦?), 지평 김저(金썚)·민기문(閔起文), 정언 김난상(金鸞祥)·유희춘(柳希春).】 아울러 파직하라. 또 윤임 등에【유관·유인숙.】 대한 정죄(定罪)가 매우 가볍기 때문에 결탁한 자들이 이와 같이 간사한 논의를 하는 것이다. 율에 따라 죄를 정할 일을 의논하여 아뢰라.”
  하고, 이어 전교하기를,
  “내전에 변고가 있어 이것을 발설하게 되면 반드시 큰일이 일어나겠는데 대행왕이 빈전(殯殿)에 있으므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끝내 종사를 구하지 못할까 걱정이 되어 부득이 밀지를 내린 것이다. 조정에서 함께 의논하여 결정하였고 나 역시 한결같이 조정이 아뢴 대로 처리하여 의심이 없었는데 지금 도리어 나라를 위하는 자들을 바르지 못하다고 공격하니 끝내 어떻게 될지 지극히 한심하다. 처음에는 인심을 진정시키려 힘썼으나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뒷날의 일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영부사(領府事)【홍언필.】 공조 판서가【정순붕.】모두 처음 의논할 때는 참여했었으나 지금은 와서 모이지 않았으니 속히 사관을 보내 비밀히 의논하여 오라.”
  하였다.【당시 비망기가 내려오자 좌우가 묵묵히 한참 있다가 임백령이 먼저 ‘간관을 죄주는 것은 어떠한가?’ 하니 이언적·권벌·신광한 등도 계속해서 구원하는 말을 하였다. 이에 이언적이 좌우와 더불어 의논해 계사(啓辭)를 초안(草案)하였다.】 윤인경 등이 아뢰기를,
  “백인걸이 아뢴 것은 과연 지나칩니다. 그러나 예로부터 밝은 임금은 대간의 말이 아무리 과격하더라도 임금은 너그럽게 용납하여 죄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언론의 책임을 맡은 자들은 마음 속에 있는 말들을 숨기지 않고 다 말했기 때문에 곧은 언론이 날마다 어전에 진달되었습니다. 지금은 새로 정치를 하는 처음인데 대간이 말 때문에 죄를 받게 된다면 이로부터 선비들의 기상이 꺾여 비록 위망의 화가 조석간에 박두하더라도 말하는 자가 없을 것이니 뒤폐단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백인걸이 아뢴 것은 윤임 등을 유배한 사실을 그르다고 한 것이 아니고 다만 밀지로 인하여 사림의 화가 다시 일어날까 두려워한 것뿐이니 어찌 다른 뜻이 있겠습니까. 전일 면대할 때에 위에서 인심을 진정시키시려는 것이니 뒤에 사림의 화가 없을 것이라고 정녕하게 하교하신 데 대하여 군신(群臣)들이 감격했는데 지금 죄를 준다면 전일 하교하신 아름다운 뜻에 크게 어긋날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실망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그 어리석고 망녕됨을 용서하여 뒷날의 언로를 생각하신다면 종사가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송희규 등도 의논이 귀일되지 않아 즉시 장관과 같은 말로 계달하지 못했는데, 지금 만약 죄를 준다면 훗날에는 구차스레 의견을 같이하는 폐단이 있을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너그럽게 용납하심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이어 아뢰기를,
  “하교하신 것을 의논함이 마땅하겠으나 이 일이 급박하므로 먼저 아룁니다.”
  하였는데, 답하기를,
  “내가 전일 면대할 때 대신에게 이른 뜻을 대신은 잊었는가? 간관이 만약 당시의 폐단 및 임금의 과실을 논했다면 말이 아무리 과격하더라도 죄를 주는 것은 불가하나 이번 일은 그렇지 않다. 임금은 어리고 나라는 위태로운 때에 믿는 것은 대신과 대간·시종뿐인데, 이처럼 간사한 정상을 조정에서 모르지 않으련만 한 마디 하는 사람이 없었다. 위급하게 되어서야 할 수 없이 밀지를 내렸는데 인심이 어떤지는 모르겠다. 이 사람은 정론(正論)을 가탁하여 종묘 사직을 걱정하는 사람을 논박했으니 그는 어떠한 심사였던가? 만약 다른 일이라면 광명 정대하게 처리하여 뒷날의 계책을 우려해야 하겠으나 이것은 급한 일이라 뒤폐단을 헤아릴 겨를이 없었다. 사림이 바르다면 그만이거니와 바르지 않다면 어찌하여 사림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국사가 바야흐로 글러져 가므로 대신만 믿을 뿐인데 대신이 다스림을 늦춘다면 무엇을 믿을 것인가. 국세가 유지된 뒤에라야 다른 일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인데 이와 같이 아뢰니 매우 실망된다. 조종조에도 말을 잘못한 죄로 하옥한 일이 있으니, 이 사람은 내가 반드시 엄하게 다스리려고 한다.”
  하였다. 윤인경 등이 아뢰기를,
  “백인걸의 말에 ‘죄를 결정한 것은 옳으나 죄를 준 경과가 그르다.’고 하였으니 실로 어리석고 망령된 생각에서 나온 실언입니다. 그 말의 실수는 신들 역시 그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의 본심이 다르다면 신들은 실로 죄를 청하여야 마땅할 것인데 어찌 구원하겠습니까. 언관이 새로 정치하는 처음에 죄를 얻는다면 관계되는 바가 가볍지 않으므로 감히 아룁니다. 당초 윤임 등을【유관과 유인숙.】 찬축·파직·체차할 때에 죄명을 붙여 중외가 알도록 하려고 했으나, 면대하여 아뢴 말씀이 있으니 사람들이 저절로 알 것이라 생각하고 중지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백인걸이 아뢴 글에 ‘전지에 사연이 없어 불분명하다.’고 했으니, 이 때문에 후세의 논란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이 사람들의 죄상을 다시 전지를 받들고자 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보통 때의 예사 일이라면 새로 정사를 하는 처음에 대간을 이렇게 다스리겠는가. 이 일은 종사에 관계된 까닭이다. 비록 죄를 정한 것은 옳다고 하였으나 이어서 종사를 걱정하는 사람에게 명령을 전달하는 군졸과 같다고 하였으니 그의 마음씀이 어찌 옳다고 할 수 있겠는가. 전일 면대할 때에 어찌 내 생각을 말하지 않았던가. 힘써 인심을 진정시켜 사림의 화를 제거하는 데 대해서는 나도 역시 대신과 생각이 같으나 일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대간이라 하여 치죄하지 않을 수 없다. 하교한 대로 하는 것이 가하다. 다시 승전(承傳)을 받드는 일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당시 대신이 백인걸을 가두라는 명을 완화시키려고 일부러 이렇게 두 번이나 아뢰었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여 비로소 갇혔다.】 윤인경 등이 아뢰기를,
  “대간은 이목(耳目)과 같은 관원이므로 말이 비록 과격하더라도 예로부터 임금은 반드시 너그럽게 용납했었습니다. 백인걸이 이미 금부에 하옥되었는데 이름이 대간이면서 말 때문에 갇히게 되니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의아해 합니다. 그 말의 옳고 그름을 외부 사람들이 어찌 다 알겠습니까. 그의 말이 광망하면 들어주지 않으면 될 것을 어찌하여 반드시 이렇게 하십니까. 소신이 어찌 범연히 헤아리고 아뢰겠습니까. 위에서 자세히 살피심이 어떠하시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이와 같이 여러 차례 아뢰는데 나 역시 어찌 여기에 대해 헤아려 보지 않았겠는가. 평소에는 임금의 잘못이 있다면 대간은 끝까지 간하여 바로 잡아야 하니 비록 과격한 말이 있다고 해도 너그럽게 용납함이 마땅하나, 이 일은 종사에 크게 관계가 되기 때문에 조정과 의논하여 결정한 것이다. 지금 종사를 걱정하는 사람을 그르다고 지목하니 그런 말을 한 것은 반드시 다른 사정이 있을 것이므로 너그럽게 용납할 수 없다. 종사에 관한 큰일인데 어찌 대간임을 따지겠는가. 그 실정을 추문함이 가하다.”
  하였다. 윤인경 등이 아뢰기를,
  “백인걸이 아뢴 것은 신들도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니 그 말은 실로 어리석고 망령됩니다. 다만 대간은 국가의 원기를 부지하는 것인데 간관이 말을 하다가 죄를 얻게 되면 한때 사람들만 놀랄 뿐 아니라 후세에도 반드시 놀라고 의아해 할 것입니다. 일시적으로 구언(求言)할 경우 아무리 망언을 하는 자가 있어도 구언했다는 이유 때문에 죄를 주지 않는데, 하물며 이는 언론의 책임을 맡은 자이니 그 말이 아무리 그르다고 해도 어떻게 죄를 줄 수 있겠습니까. 지금 새로 정치를 하는 마당에 간관을 죄주는 것은 관계되는 바가 크니 백인걸 한 사람을 위한 것만은 아닙니다. 신들이 어찌 범연히 헤아리고 아뢰겠습니까. 다시 자세히 헤아리소서.”
  하니, 답하기를,
  “지금처럼 임금이 어리고 나라가 위태로운 때에는 종사의 대계를 헤아려야만 하는 것이니 어찌 사사로운 생각을 쓸 수 있겠는가. 나라를 위한 충절은 진실로 이런 때에 볼 수 있는 것이니 장차 어느 때에 볼 수 있을 것인가. 일이 종사에 관계되니 한갓 대간이라고 해서 너그럽게 다스릴 수는 없다. 조종조에도 대간에게 죄가 있으면 간혹 외방에 내친 일도 있으니 지금은 추문하지 않을 수 없다. 추문하여 죄를 정할 때에도 참작하여 조처할 수 있다.”
  하였다. 인경 등이 전지를 고쳐서 입계하기를,
  “전일 면대할 때에 아뢰기를 ‘죄를 여기에서 그치면 죄 또한 알맞게 되고 인심이 안정될 것입니다.’ 하여 위에서 윤허하셨습니다. 상하의 의견이 이미 결정되었는데 지금 또 개정하기가 미안하나 위에서 반드시 고치려 하시므로 감히 개정합니다. 윤임은 극변(極邊)에 안치함이 가합니다. 유관은 대신의 지위에서 하루아침에 진퇴시키는 것은 불가하니 천한 직책으로 체직시키는 것도 가벼운 벌이 아닙니다 유인숙 역시 종일품으로 있다가 파직되었으니 역시 부족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 사람의 의견은 지금 만약 고치면 전일 상하가 결정한 뜻이 잘못된 것이라고 합니다. 이 정도에서 그친다면 인심 또한 안정될 것입니다. 한때의 의논으로 다시 그 죄를 더한다면 국사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감히 아룁니다.”
  하였다. 이때 대신 등이 의논하여 전지를 받들었는데 이르기를,
  “윤임은 남을 해치려는 마음을 간직하고 즐겨 뜬소문을 지어내어 궁중에 사단을 일으키려 계획한 형적이 드러났는데 지금까지 불안한 마음을 품고서 사곡(邪曲)되게 스스로 보존할 계략을 구몄으니 사실대로 죄를 따진다면 법에 용서받을 수가 없다. 다만 선후(先后)의 지친을 갑자기 율문대로 적용하는 것은 내 마음에 미안하여 관대한 법에 따라 차마 못하는 마음에서 극변에 안치한다. 유관은 국가가 위태한 때를 당하여 대신의 지위에 있으면서 뜬소문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계획한 일이 경솔 천박해서 인심이 안정되지 못하게 하였으니 매우 대신의 체모를 잃었으므로 체직시킨다. 유인숙은 윤임의 집안과 혼인을 맺고 서로 결탁하여 오늘에까지 이르렀고 또 불안한 마음을 품은 형적이 있으니 파직한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백인걸의 일을 위에서 죄를 정할 때에 참작하겠다 하시므로 황공하여 즉시 다시 아뢰지 못하였습니다. 신들은 반복해서 생각해 보니 그 말이 망령되어 죄를 받는 것은 진실로 마땅하나 대간이 말로 죄를 받는 것은 매우 중대하므로 감히 아룁니다. 신들이 어찌 한 사람을 사랑해서 이렇게 하겠습니까. 사기가 이로부터 꺾일까 두려워서입니다. 이미 백인걸을 하옥시켰으니 반드시 그 죄를 스스로 알 것이고, 다른 사람들 역시 백인걸의 죄를 알 것입니다. 지금은 평상시와 달리 새로 정치를 하는 처음이므로 관계되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그의 말도 성명(聖明)을 믿었을 뿐이지 어찌 다른 마음이 있었겠습니까. 지금 추문한다고 해도 어찌 쉽게 승복하겠습니까. 대간은 국가의 원기를 부지하는 자이니 위에서 다시 자세히 헤아리심이 어떻겠습니까. 집의·사간 이하 인물들도 처음에는 의견을 통일하지 못하여 아뢰지 않은 것이고, 이튿날 사피할 때에는 ‘큰일을 아뢰지 못하여 직무를 감당하지 못한 것이 심하다.’고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비록 감히 가벼이 하지 못하여 즉시 아뢰지 않았으나 끝내는 스스로 그 잘못을 알았으니 파직시킴은 지나친 듯합니다. 이것도 모두 새 정치와 관계가 있으므로 감히 아룁니다.”
  하였다. 검열(檢閱) 한지원(韓智源)이 의논을 수합해 가지고 와서 아뢰었는데, 홍언필은 아뢰기를,
  “백인걸이 간관으로서 감히 천위(天威)를 범하며 아뢰었으나 지금 추문하여 다스리는 것은 불가합니다. 집의 송희규 등도 파직시켜서는 안 됩니다. 윤임 등의 죄를 정한 것은 전일 면대하며 아뢸 때에 이미 다 아뢰었으니 지금은 별도로 할 말이 없습니다.”
  하였고, 정순붕의 의논은,
  “백인걸은 종사의 대계를 고려하지 않고 도리어 밀지를 핑계하여 망령되게 동료를 공격했으니 이렇게 죄를 줌은 불가할 것이 없습니다. 윤임은 화심을 품었으니 실로 죄를 용서할 수 없지만 만약 율문대로 한다면 아마도 너무 무거울 것 같습니다. 유관·유인숙은 모두 집권 대신으로서 윤임에게 아부 결탁하여 종사를 위태롭게 하려고 계획했으니 그 죄가 아주 무거우나 세력에 눌려 따른 것일 뿐이니 같은 율로 처리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생각하옵건대 위에서 결단하소서.”
  하니, 윤인경 등에게 답하기를,
  “대신들이 이 사람들의 형적을 지금에야 처음으로 들은 것은 아니다. 전부터 어찌 몰랐겠는가. 종사에 관계된 일을 이와 같이 완만하게 다스리니 누구를 믿고 국사를 처리하겠는가. 율문을 따르는 것이 마땅하나 조정에서 새로 정치하는 처음이라 인심을 진정시켜야 한다고 아뢰었기 때문에 그 죄를 감하여 정하겠다. 유관은 재상의 지위에 있으면서 재상의 일을 했다면 재상으로 대우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어찌 재상으로 대접할 것인가. 윤임의 아들 윤흥인(尹興仁)은 연소한 무인으로 도성 안에 있어서는 안 되니 아울러 내치는 것이 가하다.”
  하고, 비망기를 내리면서 이르기를,
  “윤임은 절도(絶島)에 안치하고, 유관은 중도 부처(中道付處)하고, 유인숙은 먼 지방에 부처하고, 윤흥인은 먼 지방에 찬축(竄逐)하라. 윤임은 정유년에 국모(國母)를 위태롭게 하려고 계획한 것과 동궁(東宮)에 화재가 있은 뒤 한 일도 죄목에 아울러 기입하라. 유관과 유인숙은 은밀히 권간(權奸)과 결탁하여 종사를 위태롭게 하려고 한 것도 아울러 죄목에 넣어라. 전 대간 등은 공론을 가탁하여 국사가 기울어지는 것을 보고도 구하지 않았으니 파직시킴이 가하다. 양사의 장관은 이미 논박을 받아 필시 출사하지 않을 것이니 체직하는 것이 가하다. 또 옛말에 위협에 못 이겨 추종한 것은 다스리지 않는다고 했지만 종사를 돌보지 않고 역적의 무리를 구원하며 조정을 기망한 것이 오래되었다. 풀을 없앨 때 뿌리를 제거하지 않으면 종당에는 다시 돋아나는 법이다. 더욱 심한 자들을 조정에서는 반드시 알 것이니 서계(書啓)하라.”
  하였다.

  【원전】 19 집 300 면


명종 원년 08/25(을묘) / 양사가 송희규 등의 잘못으로 인해 모든 대간을 파직함이 부당함을 아뢰다

양사가 아뢰기를,
  “전 집의 송희규(宋希奎), 사간 박광우(朴光祐) 이하 여러 사람들은 당초 회의할 때에 위급한 사실을 듣고도 의논이 통일되지 아니하여 물러갔다가 아뢰지 않은 것이 잘못인 줄을 알고는 즉시 갖추어 계달했는데 이 때문에 대간을 모두 파직시킨 것은 처사가 옳지 못했습니다. 견책하여 체직시키면 될 것인데 파직시키는 것은 너무 지나치지 않습니까? 역시 성치(聖治)에 허물이 될까 두렵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집의와 사간 이하 등의 일은 근래 선비들의 풍습이 바르지 못하기 때문에 국가가 위급한 때를 만나도 충성을 다하는 사람을 볼 수 없다. 국가가 위태한 사실을 듣지 않았다면 그만이거니와 들었다면 비록 정당하지 못한 일이 있더라도 일에는 급한 일과 급하지 않은 일이 있으니 마땅히 먼저 급한 일을 구하고 급하지 않은 일은 뒤에 하는 것이 가하다. 양사의 장관들이 이미 위급한 일을 말했는데 밀지(密旨)가 정당하지 못한 일이라고 해서 국사를 구하지 않아도 되겠는가. 이미 발의한 뒤에야 미처 계달하지 못했다고 말하니 어찌 옳다고 하겠는가. 불충함을 깊이 미워하여 파직한 것이다. 그러므로 윤허하지 않는다.”

  【원전】 19 집 304 면

명종 원년 08/26(병진) / 나세찬 등이 송희규 등 양사의 아홉 관헌에 대한 체직이 부당함을 아뢰다

대사간 나세찬(羅世纘), 사간 정응두(丁應斗), 헌납 심봉원(沈逢源)이 아뢰기를,
  “하늘이 재앙을 내리시어 2성(聖)이 잇달아 승하하시니 온 나라의 신민이 호소할 곳조차 없어 한갖 40년간 끼친 덕을 사모할 뿐이었는데, 다행히 전하께서 어린 나이에 후사를 이어 성자(聖資)가 뛰어나신 것을 보고 모두들 마음과 힘을 합해 선왕의 성대한 덕화를 오늘 다시 보리라 기대하였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요즈음 일이 전하를 의구하게 하니 신들은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유관·유인숙이 죄는 진실로 있지만 그 마음들이야 어찌 이렇게까지 극도에 달했겠습니까. 신들이 삼가 어제 대신의 아룀에 대한 간곡하신 하교를 보고 뭇 신료(臣僚)는 마땅히 두려워하면서 반성하여 전하의 근심을 풀어드려야 한다고 생각하였는데, 하물며 대신으로서 종사의 큰 계책을 위하여 어찌 전하의 근심을 자기들의 근심으로 여기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멀리 유배하는 것이 과중하다고 하는 것은 죄가 없다고 생각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정사를 하는 처음에 선왕조의 옛신하를 급급히 유배하는 것은 아마도 성덕에 허물이 될까 두려워서 이렇게 미련을 갖고 아뢰는 것입니다. 어찌 그 사이에 털끝만큼이라도 사사로운 생각이 있어서 위로 전하를 저버리는 것이겠습니까. 전 대간 송희규(宋希奎)·박광우(朴光佑)·정희등(鄭希登)·이언침(李彦?)·김저(金썚)·민기문(閔起文)·김난상(金鸞祥)·유희춘(柳希春)은 당초 회의할 때에 비록 헤아림이 부족해서 말을 같이하여 아뢰지는 못했다고 하더라도 잘못을 알고서는 즉시 사유를 갖추어 피혐(避嫌)했으니 견책(譴責)으로 체직만 시켰어도 수치를 드러내 보이기에는 충분한데 양사(兩司)의 아홉 관원을 일시에 모두 파직시키시니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성조(聖朝)의 대간을 중시하는 본의에 어긋남이 있을까 두려워서 감히 아뢰는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이번에 간적(姦賊)의 무리들이 스스로 안심하지 못하여 흉악한 계략을 더욱 키웠는데도 도리어 종사는 생각하지 않고 이렇게 아뢰니 지극히 한심스럽다. 대간의 체모는 국가를 위하여 자신을 잊고 국사에 진력함이 가하다. 전일 면대할 때에 ‘이 사람들이 서로 결탁하였다.’고 했는데 서로 결탁하여 무엇을 하려고 했겠는가? 어찌 종사를 위태롭게 하려고 계획한 것이 아니겠는가. 불충(不忠)이 극심하여 죄준 것이 오히려 가벼운데도 이와 같이 여러 번 아뢰는가. 이렇게 종사가 위태한데도 바른 말을 하는 신하는 하나도 없고 도리어 적의 무리를 구원하니 더욱 한심하다.”
  하였다.

  【원전】 19 집 306 면

명종 원년 12/01(경인) / 윤원로·윤위·백인걸 등의 서용을 명하다윤위·백인걸 등의 서용을 명하다

전 첨정 윤원로(尹元老), 전 현감 윤위(尹緯),【윤원필(尹元弼)의 아들이며 윤원로의 조카이다. 평택(平澤)이 박하다 하여 칭병하고 부임하지 않아 파면되었었다.】 전 헌납 백인걸(白仁傑), 전 집의 송희규(宋希奎), 전 장령 이언침(李彦?), 지평 민기문(閔起文), 전 정언 김난상(金鸞祥)·유희춘(柳希春), 전 검열 조박(趙璞)을 서용하라고 명하였다.

  【원전】 19 집 371 면

 

명종 1년 10/23(정미) / 주세붕·정언각·홍담·송희규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주세붕(周世鵬)을 홍문관 직제학으로, 정언각(鄭彦慤)을 전한(典翰)으로, 홍담(洪曇)을 의정부 사인(舍人)으로, 송희규(宋希奎)를 대구 도호부사(大丘都護府使)로 삼았다.

  【원전】 19 집 462 면

 

명종 2년 09/18(병인) / 부제학 정언각이 양재역 벽에 붙은 익명서를 가져와 관련자의 처벌을 논의하다

부제학 정언각(鄭彦慤)이 선전관 이노(李櫓)와 함께 와서 봉서(封書) 하나를 가지고 입계(入啓)하기를,
  “신의 딸이 남편을 따라 전라도로 시집을 가는데 부모 자식 간의 정리에 멀리 전송하고자 하여 한강을 건너 양재역(良才驛)까지 갔었습니다. 그런데 벽에 붉은 글씨가 있기에 보았더니, 국가에 관계된 중대한 내용으로서 지극히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이에 신들이 가져와서 봉하여 아룁니다. 이는 곧 익명서이므로 믿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국가에 관계된 중대한 내용이고 인심이 이와 같다는 것을 알리고자 하여 아룁니다.”
  하고, 이노도 아뢰기를,
  “정언각의 딸은 곧 신의 형(兄)의 며느리입니다. 함께 오다가 보았는데, 아주 참담한 내용이었기에 함께 아뢰는 것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이는 뜻을 얻지 못하여 웃사람을 원망하는 자의 소행이다. 지금 내가 보기에도 매우 참혹하다. 더구나 신하가 보기에 어찌 예사로왔겠는가.”
  하고, 이어 정원에 전교하기를,
  “영부사와 삼공을 속히 명소(命召)하라.”
  하였다. 조금 후에 삼공이 이르렀다. 도승지(都承旨) 조언수(趙彦秀)가 삼공의 뜻으로 아뢰기를,
  “우찬성 민제인(閔齊仁), 판중추부사 허자(許磁), 예조 판서 윤원형(尹元衡)도 명소하소서.”
  하니, 그리하라고 전교하였다. 허자는 즉시 이르렀고, 민제인과 윤원형은 아직 이르지 않았는데, 정언각이 올린 글【그 글은 붉은 글씨로 썼는데 ‘여주(女主)가 위에서 정권(政權)을 잡고 간신(奸臣) 이기(李틒) 등이 아래에서 권세를 농간하고 있으니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서서 기다릴 수 있게 되었다. 어찌 한심하지 않은가. 중추월(仲秋月) 그믐날.’이라고 하였다.】을 빈청에 내리면서 이르기를,
  “요즈음 재변이 매우 많다. 하늘의 견책(譴責)이 어쩌면 이렇게 심하단 말인가. 염려됨이 적지 않아 잠시도 안심할 수가 없다. 비록 분명하게 지적할 수는 없으나 각별히 해야 할 일이 있을 듯하여 경들을 불러서 묻는 것이다.”
  하니, 윤인경 등이 회계하기를,
  “이 주서(朱書)를 보건대, 단순히 미련한 자의 소행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는 익명서이니 믿을 수는 없습니다. 다만 신들이 들으니, 요즈음 사론(邪論)【죄인을 가리켜 무복(誣服)했다 하고, 훈신(勳臣)을 가리켜 무공자(無功者)라고 한 것이다.】이 떠돌고 있는데 어디서 나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대간과 시종들도 모두 들었으나 말이 나온 출처를 알지 못합니다. 신들이 이미 들은 것을 사실대로 아뢰고자 하였으나 다만 사론이 나온 출처를 모르기 때문에 아뢰지 못하였습니다. 이 글은 비록 믿을 수는 없으나 이것을 보면 사론이 떠돈다는 것이 거짓이 아닙니다. 명소한 인원(人員)이 모두 오면 마땅히 들은 것을 의논하여 아뢰겠습니다.”
  하였다. 조금 뒤에 민제인과 윤원형이 이르렀다. 전교하기를,
  “아뢴 뜻은 알았다. 외간(外間)의 사론을 위에서야 어떻게 알겠는가. 어찌하여 세월이 이미 오래되었는데도 사론은 아직도 그치지 않는가? 매우 망극한 일이다. 그 글은 구석진 곳, 사람들이 잘 보지 못하는 데에 써 붙인 것이 아니고 사람이 다 볼수 있는 역관(驛館)의 벽에다가 그렇게 써 붙였으니, 어찌 본 사람이 없었겠는가. 심상하게 여기고 말하지 아니하였으니 또한 그 뜻을 알 수가 없다. 주사(朱砂)는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물건이 아니므로 역관 가운데 반드시 아는 자가 있을 것이니, 잡아다가 물어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윤인경 등이 회계하기를,
  “하인을 잡아오면 반드시 폐단이 있을 것입니다. 행인들이 출입할 때에는 역관에 숙직하는 사람이 항상 있어서 비워 둘 때가 없으므로, 반드시 아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찰방(察訪)으로 하여금 자세히 묻게 하면 적발해낼 수가 있을 것이므로 신들이 이미 찰방을 불러 놓았습니다.”
  하였는데,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조언수가 삼공의 뜻으로 아뢰기를,
  “이조 판서 김광준(金光準)도 명소하소서.”
  하니, 그리하라고 전교하였다. 조금 뒤에 김광준이 이르렀다. 윤인경·이기·정순붕·허자·민제인·김광준·윤원형이 함께 의논하여 그것을 써서 단단히 봉(封)하여 서명(署名)하고 입계(入啓)하기를,
  “지금 이 서계는 이 벽서(壁書)를 보고서 비로소 서계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들이 의논한 지가 여러 날 되었습니다. 당초에 역적의 무리에게 죄를 줄 적에 역모에 가담했던 사람을 파직도 시키고 부처(付處)도 시켜서 모두 가벼운 쪽으로 하여 법대로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론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공신(功臣)이 긴요하지 않다는 말까지도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 분명한 일에 사론이 그치지 않고 있으니, 이것은 화근이 되는 사람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신들이 함께 의논하여 아뢰니, 즉시 죄를 정하여 교서에 자세히 기록해서 중외가 다 알게 하소서.”
  하고, 또 종이 한 장에 써서 아뢰기를,
  “생원 허충길(許忠吉)이 관중(館中)에서 말하기를 ‘이덕응(李德應)은 곤장을 참을 수가 없어서 무복(誣服)한 것이다. 그것이 어찌 사실이겠는가. 허위이다.’ 하였으니, 추문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전교하기를,
  “당초에 죄인들의 간사한 정상은 의심할 여지없이 환하게 드러났으나, 죄를 정할 때에 그 괴수(魁首)만 처벌하고 추종자들을 다스리지 아니한 것은, 허물을 뉘우치고 스스로 새로운 사람이 되어서 한 마음으로 나라를 위해 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래서 차마 엄중한 율(律)로써 죄주지 아니하고 모두 가벼운 쪽으로 다스리게 했던 것인데, 사론이 지금까지 그치지 않는 것은 엄하게 다스리지 않아서 그러한 것이다. 아뢴 뜻이 당연하니 아뢴 대로 하라. 다만 이완(李췀)은 지금 먼 곳에 귀양가 있으며 숨만 붙어 있어 조석(朝夕)을 보장하기 어려 운 형편이니, 이미 정한 죄를 다시 고칠 것은 없다. 허충길의 일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삼공이 봉진(封進)한 글은 다음과 같다.
  “완(췀)·송인수(宋麟壽)·이약빙(李若氷)은 일죄(一罪)에 처하고, 이언적(李彦迪)·정자(鄭磁)는 극변안치(極邊安置)하고, 노수신(盧守愼)·정황(丁?)·유희춘(柳希春)·김난상(金鸞祥)은 절도안치(絶島安置)하고, 권응정(權應挺)·권응창(權應昌)·정유침(鄭惟沈)·이천계(李天啓)·권물(權勿)·이담(李湛)·임형수(林亨秀)·한주(韓澍)·안경우(安景祐)는 원방부처(遠方付處)하고, 권벌(權쮫)·송희규(宋希奎)·백인걸(白仁傑)·이언침(李彦?)·민기문(閔起文)·황박(黃博)·이진(李震)·이홍남(李洪男)·김진종(金振宗)·윤강원(尹剛元)·조박(趙璞)·안세형(安世亨)·윤충원(尹忠元)·안함(安쐦)은 부처(付處)하소서.”】
  윤인경 등이 회계하기를,
  “신들이 이른바 화근이라고 한 것은 오로지 완(췀)을 가리킨 것입니다. 어찌 범연히 생각하여 아뢰었겠습니까. 종사를 위한 대계(大計)이니, 진실로 사사로이 용납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대의(大義)로 결단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골육(骨肉) 간에 서로 죽이는 것은 예로부터 중대한 일이었다. 더구나 먼 지역에 내쳐서 숨만 겨우 붙어 있으니, 여얼(餘孼)이 없다면 다시 무슨 일이 있겠는가. 고칠 수 없다.”
  하였다.【삼공이 사사로이 서로 말하기를 ‘이것은 여기에서 그치고 말 일이 아니다. 다만 밤이 깊었으니 뒤에 다시 아뢰어야겠다.’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이기(李틒) 등이 을사년 사람들을 역적이라고 하고 그 일을 실증(實證)하기 위하여 중종(中宗)의 아들인 이완(李췀)까지 죽이자고 계청하였으니, 너무 심하다.】
  조언수가 아뢰기를,
  “이른바 ‘일죄(一罪)’라는 것은 사사(賜死)하는 것입니까, 율(律)에 의해서 처리하는 것입니까? 감히 묻습니다.”
  하니, 사사라고 전교하였다.

  【원전】 19 집 528 면

명종 2년 /09/19(정묘) / 송인수·이약빙을 사사하고 이언적·노수신·유희춘 등을 귀양보낸다는 교서
중외의 대소 신료와 기로(耆老)·군민(軍民)들에게 교서(敎書)를 반포하였다.
  “제왕의 인덕(仁德)으로서는 간흉에게 추종한 자들을 용서해 주는 것이 귀한 것이나 《춘추(春秋)》의 대의(大義)로서는 사실 난적(亂賊)에 동조한 자는 엄하게 다스려야 하는 것이다. 이는 법으로는 당연한 것이고 일로서는 그만둘 수가 없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어린 내가 이 큰 기업(基業)을 이어 받아 바야흐로 많은 혼란을 견디어 내지 못할까 근심하였었는데, 지난번 여러 간흉들의 반란에 걸리었다. 사나운 올빼미가 어미를 잡아먹는 악행(惡行)을 쌓았고, 미친 개가 주인에게 짖는 음모를 길렀으니, 이는 사람에게 용납될 수가 없다. 진실로 그들의 털을 뽑아 계산하더라도 그들의 가죽을 벗겨 방석을 삼아 마음에 통쾌하게 하고자 한다.
  풀을 제거하는 데는 마땅히 그 뿌리를 뽑아버리기에 힘써야 하고, 간흉을 없애는 데는 종자를 남기지 말아야 한다. 다만 차마 못하는 정사로서 추종자는 다스리지 않는다는 법을 본받아, 사악한 생각이 사라지게 하여 흉당(凶黨)들이 스스로 조심하기를 기다렸었는데, 세월이 이미 오래되었는데도 기만하는 행위는 더욱 심하여 아직도 물수리 같은 소리를 고치지 않고 감히 독이 있는 꼬리를 흔들고 있다. 훈구(勳舊)를 지적하여 공이 없이 훈적(勳籍)에 기록되었다고 하고, 역적의 무리를 편들어 사실이 아닌 죄를 받았다고 한다. 간사스런 입을 놀려 화기(禍機)를 선동하는데, 이는 왕법이 엄하지 아니하여 인심이 안정되지 못한 탓이다. 마땅히 상전(常典)을 적용하여 분명하게 위엄을 보여야 하겠으나, 그래도 옥(玉)과 돌이 구별없이 다 타버릴까 염려하여 시조(市朝)에서 죽이지 아니하고 모두 말감(末減)해서 우선 하형(下刑)으로 조치한다.
  이에 송인수(宋麟壽)·이약빙(李若氷)은 사사(賜死)하고, 이언적(李彦迪)·정자(鄭磁)는 극변안치(極邊安置)하고, 노수신(盧守愼)·정황(丁?)·유희춘(柳希春)·김난상(金鸞祥)은 절도안치(絶島安置)하고, 권응정(權應挺)·권응창(權應昌)·정유침(鄭惟沈)·이천계(李天啓)·권물(權勿)·이담(李湛)·임형수(林亨秀)·한주(韓澍)·안경우(安景祐)는 원방부처(遠方付處)하고, 권벌(權쮫)·송희규(宋希奎)·백인걸(白仁傑)·이언침(李彦?)·민기문(閔起文)·황박(黃博)·이진(李震)·이홍남(李洪男)·김진종(金振宗)·윤강원(尹剛元)·조박(趙璞)·안세형(安世亨)·윤충원(尹忠元)·안함(安쐦)은 부처(付處)하고자 한다.
  아! 신하는 간특한 짓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인데, 스스로 죄를 지었으니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나라에 의형(義刑)과 의살(義殺)이 있어 그 법이 나에게 있는데, 감히 폐지할 수 있겠는가. 이에 이렇게 교시(敎示)하는 것이니, 두루 자세히 알기를 바라노라.”

  【원전】 19 집 530 면

명종 011 06/02/26(갑신) / 우찬성 김광준이 병으로 인해 사직을 청하자 불허하다

우찬성(右贊成) 김광준(金光準)이 병 때문에 상소(上疏)하여 사직(辭職)하니, 답하였다.
  “이제 상소 내용을 보건대, 경(卿)의 병이 아직도 차도가 없다고 하니 매우 걱정이 되며 한탄스럽다. 나의 생각으로는 경이 여러 가지로 생각을 많이 하기 때문에 병이 쉽게 낫지 않는 것 같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안심하고 조리하여 영구히 정사(政事)를 보필토록 하라.”
  【이언적(李彦迪)이 일찍이 말하였다.
  “내 들으니 조정에서 모두가 관인(寬仁)한 큰 도량으로 성상(聖上)을 보필하여 무고(無辜)한 자는 죄를 씻어 주어서 태평한 정치를 이루고자 하였는데, 다만 몇몇 신하가 사리(事理)에 맞지 않는 의논을 폈으니 그 의논을 주장한 자는 상주(尙州) 사람인 우찬성(右贊成) 김광준(金光準)이라고 한다. 광준이 사류(士類)를 해치고자 함은 대체로 그럴 만한 까닭이 있는 것이다.
  일찍이 들으니 그의 아버지가 첩(妾)의 자식들에게는 사랑에 빠져 토지와 노비를 많이 주면서도 적자(嫡子)에게는 박대하여 적게 주었으므로 항상 서모(庶母)에게 불만을 품고 있었다. 지난 임인년에 그의 아버지가 죽으니 광준이 대사간(大司諫)으로 거상(居喪)하던 중에 그의 형이 죽자 형수(兄嫂)를 시켜서 관가(官家)에 정소(呈訴)하기를 ‘서모와 서제(庶弟) 등이 함께 요망스러운 술법을 써서 남편을 죽게 하였으니, 구속하여 죄를 다스려 주소서.’ 하였는데,

상주 목사(尙州牧使) 송희규(宋希奎)

가 증거(證據)가 없음을 의심하여 수리(受理)하지 않자 광준이 희규 몰래 절간(折簡)을 보내어, 속히 구속해서 감사(監司)에게 보고하고 형추(刑推)하라고 하니,

송희규

가 할수없이 감사에게 보고하고 형신(刑訊)을 했다고 한다.

희규

가 나를 보고 주머니에서 김광준의 편지를 꺼내어 보여준 바 있으며 내가 문경현(聞慶縣)에 이르니 현감(縣監) 안경우(安景佑)가 추관(推官)으로서 그 사실을 깊이 아는 처지로 역시 그의 잔인함을 말하였다.
  김광준은 상(喪)을 마친 뒤에 녹훈(錄勳)된 기세를 타고 지위가 숭품(崇品)에 오르게 되자 그는 자신에게 숨겨져 있는 이러한 간특한 사실을 아는 자는 모두 제거하여 말하는 입을 없애서 온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다시는 아는 자가 없게 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본도(本道)에 사는 조관(朝官)과 재상(宰相) 및 상주의 이웃 지경에 사는 사람으로서 그의 실정을 잘 아는 자를 몰래 권신(權臣)에게 사주(使嗾)하여 모두 제거하게 하니, 그 부탁을 받은 사람이 하나 같이 그의 말을 따랐다. 정미년의 사화(士禍)에

송희규

와 안경우도 화를 입었다.”】

  【원전】 20 집 13 면

명종 6년 06/01(무오) / 권응정 등을 중도로, 이수경 등을 근도로 옮기고, 신수경 등을 방환하다

권응정(權應挺)·권응창(權應昌)을 중도(中道)로, 이수경(李首慶)·송순(宋純)·신거관(愼居寬)을 근도(近道)로 양이(量移)하고, 정유침(鄭惟?)·윤충원(尹忠元)을 석방하여 고향에 돌아가게 하고, 윤여필(尹汝弼)·구엄(具헪)·신수경(申秀涇)·이담(李湛)·

송희규(宋希奎)·

백인걸(白仁傑)·민기문(閔起文)·황박(黃博)·안함(安촏)·허충길(許忠吉)·김희년(金禧年)·임복(林復)·이운손(李雲孫)·이준경(李浚慶)·유섭(柳涉)은 모두 방환(放還)시키라고 명하였다.

  【원전】 20 집 27 면

명종 8년 11/17(기미) 김광준의 졸기 
김광준(金光準)이 졸하였다. 3일 동안 정조시(停朝市)를 명하고 사옹원(司饔院)에 명하여 소선(素膳)을 올리게 하였다.
  【광준은 용모가 단아하고 말을 잘하며 선비다운 말을 하기를 좋아하여 당시에 칭찬이 자자하였다. 그러나 음흉하고 간악한 계책으로 보이지 않게 사람을 해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광준의 아비가 일찍이 그의 애첩에게 빠져 첩의 소생에게는 토지와 노비를 많이 주고 적처의 자식들은 박대하여 적게 주었으므로, 광준은 항상 서모에게 분심을 품고 있었다. 그 아비가 죽자 광준은 대사간으로 있으면서 거상(居喪)하였는데, 마침 그의 형이 또 죽었다. 광준은 형의 처를 시켜서 관(官)에 소장을 제출하기를 ‘서모와 서제 등이 함께 요술을 써서 남편을 죽게 하였으니 그들을 수금하고 치죄해 주기 바란다.’ 하였다.

목사 송희규(宋希奎)

가 확실한 증거가 없으므로 그 소장을 수리하지 않자, 광준은 곧 쪽지를 몰래 희규에게 보내어 ‘속히 수금하고 신보(申報)한 다음 형추(刑推)하기 바란다.’ 하였다. 이에 희규는 부득이 그 서모와 서제 몇 사람을 거두고 곧 서너 차례 형신(刑訊)하였다.
  이때 우참찬 이언적(李彦迪)이 말미를 얻어 근친(覲親)하러 상주(尙州)에 도착하였는데, 희규가 그 사건의 전말을 말하니, 언적이 답하기를 ‘아비의 애첩과 애자(愛子)를 밝히기 어려운 분명치 않은 일로 어찌 차마 부상(父喪) 중에 수형(囚刑)까지 할 수 있겠는가. 매우 잘못된 일인데 그대는 어찌 이런 일을 하는가?’ 하였다.

희규

가 주머니를 뒤져 광준에게서 받은 쪽지를 내보이면서 ‘사정이 이러하므로 신보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니, 언적은 묵묵히 답하지 않았다. 함창(咸昌)에 이르러 광준에게 글을 보내어 서모와 서제를 형신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는 뜻을 극력 진술하여 만류하고, 또 ‘내가 공을 깊이 아끼므로 이와 같이 말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광준의 답서에는 조금도 자책하는 뜻은 없고 분심 품은 말이 많았다.
  문경 현감(聞慶縣監) 안경우(安景祐)는 추관(推官)으로서 그 사건을 소상히 알고 있었으므로 언적을 대하여 또한 잔인하고 미편하다는 뜻을 말하였다. 경우는 입이 빠르고 악을 미워하는 사람이므로 만나는 사람마다 그 사건을 말했다. 그 뒤에 권응창(權應昌)도 그 잔인했던 사실을 언적에게 말해 주었다. 광준은 상(喪)을 마치고 복직이 되자 그 일이 공론에 발설될까 싶어 깊이 의심과 두려움을 품고 있다가 대사간에서 사면(辭免)될 때에 서모를 형신하였던 사실을 변명하여 아뢰었다. 을사 사화(乙巳士禍)를 틈타 벼슬이 숭품(崇品)에 오르자 자기의 박한 행동을 알고 있는 자들을 차례로 제거하여 입을 막아 세인들 중에 다시는 아는 이가 없게 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본도에 사는 조관(朝官)·재상 및 상주(尙州) 인근에 사는 자 중 그 사건을 아는 자들을 모두 기록하여 몰래 권신(權臣)에게 주어 모두 제거하게 하였다. 정미년의 화에

송희규

도 포함되었고 안경우는 문음 외관(門蔭外官)으로서 조론(朝論)에는 관여되지 않았으나 또한 먼 곳으로 귀양갔다. 그 정상이 분명하니, 극히 흉악하고 참혹하다.】

  【원전】 20 집 173 면

명종 20년11/18(신해) / 광평군 김명윤이 의금부 지사의 체직과 금부 죄인의 사면을 청하다

광평군(光坪君) 김명윤(金明胤)이 아뢰기를,
  “금부 당상의 임무는 다 중요하고 어려운 것이며 장관의 책임은 더욱 무거운 것입니다. 결코 노쇠한 소신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속히 체직의 명을 내리고 감당할 만한 사람에게 제수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신은 계축년에 의금부 동지사를 겸하였고 갑인년에 승진하여 지사가 되었습니다. 금부의 죄인 명단이 벽상(壁上)에 적힌 것을 보니 그 죄명을 각기 그 이름 아래에 써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는 역모에 간여되지 않은 자가 많이 있었습니다.【대개 노수신(盧守愼)·정황(丁?)·유희춘(柳希春)·김난상(金鸞祥)·이대계(李大啓)·한주(韓澍)·이진(李震)·윤강원(尹剛元)·이염(李픲)·김충갑(金忠甲)·백인걸(白仁傑)·황박(黃博)·이감(李堪)·민기문(閔起文)·권물(權勿)·송희규(宋希奎)·유감(柳堪)·이원록(李元祿)을 가리킨다. 이 사람들은 모두 이기와 윤원형에게 잘못 보여 정미년과 기유년에 광유(?誘)로 지목돼 사론(邪論)이 그치지 않아 추가로 논죄하여 죄를 정했다. 일시의 사림들이 그들이 죄없이 모함당한 것을 원통해 하였다.】 당시 마침 재변이 있어 상께서는 피전 감선(避殿減膳)하였으며 이어 신원과 방면의 명을 내리었습니다. 며칠 뒤 경연에 납시었을 때 신도 입시하였는데, 재변이 있게 된 까닭을 하문하였습니다. 좌우에서 각기 그들의 생각을 개진하게 되었는데 금부 죄인들에 대한 일을 말씀드리려고 먼저 ‘성명(聖明)의 시대에 죄인이 많다는 것은 본디 아름다운 일이 아닙니다. 신이 금부의 관직에 임명되어 죄인의 이름을 보니 난역에 관계되지 않은 자도 많았습니다. 그 경중을 참작하여 원면(原免)하심이 어떻겠습니까?’라고 아뢰었는데, 윤허를 받지 못해 황공한 마음을 가져 다시 진달하지 못하고 물러났었습니다.
  얼마전 성천 부사 정현(鄭?)【사람됨이 경박하고 허황되며 일에 따라 반복하여 말을 믿을 수가 없다. 사람들이 대부분 두려워 꺼려했다. 공을 믿고 교만하여 한 세상에 오만을 떨었다. 또 인정에 벗어나는 일들이 있었고 시비를 논하기 좋아해 일이 있으면 곧 상소하였다.】이 신의 집에 와서 신에게 하는 말이 ‘내가 을사년에 나이 겨우 약관이었지만 아비의 말을 참여해 들었었다. 그때 아비의 말이, 「근일 피죄인 가운데 역모에 간여하지 않은 사람이 한둘에 그치지 않는다. 마음으로 계달하고자 하는 생각이 있으나 좌우의 견제를 받아 이루지를 못했다. 깊이 한스러운 일이다.」고 하였는데, 이말이 아직도 귀에 생생하여 마음 속에 잊을 수가 없다. 지금 내가 궁궐에서 멀리 떠나는 참이나 이러한 뜻을 계달하고자 한다. 이 생각을 어떻게 여기는가?’ 하기에 신은 ‘내 생각도 이와 같다. 네가 아비에게서 들은 말을 가지고 계달함이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라고 하였었는데, 며칠 후 정현이 이미 소를 올렸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성상의 뜻은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전에 홍은을 크게 베푸실 때, 모든 방면자는 모두가 잡범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금부의 죄인은 비록 가장 경한 자라도 원면을 받은 자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어찌 성상께서 불쌍히 여기시는 본의이겠습니까. 신은 변변치 못한 자로서 난육(卵育)의 은혜를 지나치게 입고 산하(山河)의 맹서를 외람되이 받아 의리상 종사와 희비를 같이 하고 우충(愚忠)을 바치고자 합니다만, 나이 이미 높고 질병도 많아 갑자기 죽게 되면 다시 진달할 수 있는 기회가 없겠기에, 이제 마침 사면(辭免)할 생각을 가지고 아뢰는 김에 전일에 보았던 죄인의 이름을 생각하고 또 정현의 말이 생각나 감히 이와 같이 계달합니다. 바라건대 대신들을 인견하시고 피견자(被譴者)들의 죄목의 경중을 강구하시어 신설(伸雪)의 길을 열어 주심이 어떻겠습니까?”【김명윤(金明胤)은 봉성군(鳳城君) 이완(李췀)을 죄에 얽어 죽였다. 그의 마음은 국인이 다 아는 바이다. 윤원형이 이미 쫓겨나고 사람들이 을사년 피죄자의 원통함을 공언함에 이르자, 김명윤은 정현과 더불어 앞서서 이러한 말을 하여 공론에 아첨을 구하므로, 사람들이 모두 이를 비웃고 욕했다.】
  【사신은 논한다. 이기와 윤원형이 한창 흉계를 꾸밀 때, 권력의 남용과 모함의 참담함이 극심했다 하겠다. 김명윤은 바로 자신이 앞서 고변하여 무고한 사람을 무함해 사림의 화를 크게 일으킨 자인데, 이제 계달하느라 부지런함을 보임이 여기에 이르니, 전후 반복의 차이가 있음은 어째서인가. 이는 힘써 시론에 부합하여 전의 잘못을 가리고자 함에서 나온 것이다. 어찌 그 본심이었겠는가.】
  하니, 답하기를,
  “사퇴하지 말라. 얼마전 정현의 소로 인하여 대개는 답을 했다. 서서히 헤아려 처리할 것이다.”
  하였다

  【원전】 21 집 50 면

명종 20년12/02(을축) / 을사년 이후의 금부 죄인 노수신·김난상·유희춘 등을 신원하다

임금이 삼공(三公)과 영평 부원군(鈴平府院君) 및 금부 당상을 명해 불렀다. 영평 부원군 윤개(尹漑), 영의정 이준경(李浚卿),【성품이 엄중하고 염결했으며 우애가 돈독해 형제간에 상대함을 붕우와 같이 하였다. 나이 60에 형 이윤경(李潤慶)의 상을 당했는데, 최복을 입고 기년상을 지내니 사람들의 칭송이 많았다. 얼마 전 임금의 체후가 미령했을 때 국가의 대계를 위하여 입후를 먼저 거론했었다. 그 진소의 내용이 간절해 대신의 체통을 얻었다고 이를 만했다. 그런데 그 진소의 내용을 승지를 시켜 쓰게 하였고 윤건(尹健)으로 하여금 이를 통하게 하였는데, 사관은 처음에 이를 알지 못했다.】 좌의정 심통원(沈通源),【용렬하고 비루하며 무식했다. 심술이 바르지 못하고, 뜻은 부귀에 있어 염치가 없기가 너무 심했다. 등제하던 날 김안로(金安老)에게 아부를 하였는데, 남들의 말을 염두에도 두지 않아 세론이 그를 비루하다 하여도 항상 유쾌한 마음이었고 다행히 외척이 되는 관계로 지위가 정승에까지 올랐다. 날로 주구(誅求)와 겁탈로 일을 삼았으며 사람들이 많이 원망해 길가에 방을 붙여 놓고 욕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또 윤원형이 스스로 기세가 고립되는 위태로움을 알고 그에게 도움을 받고자 금은 주옥으로 아첨해 왔을 때, 심통원은 그 뇌물들을 달게 받고 사양하지 않았다. 그 이익을 탐하는 무상(無狀)함이 여기에까지 이르렀다. 얼마 전 상의 체후가 미령하여 대신들이 국가 대계를 위해 세자를 세울 것을 청했는데, 중전이 덕흥군(德興君) 이초(李?)의 세째 아들 하성군 이균(河城君李鈞)을 세우고자 한다고 답하니, 심통원은 전교를 듣고 급히 일어나, 나는 가서 궁을 지키겠다 하고 이어 시약청으로 돌아갔다. 이준경이 그를 비양거려 ‘저기 가서 무슨 일로 꾸밀까.’ 하였고, 이명(李蓂)은 ‘이익이 있는 곳이니까.’라고 하였다. 동렬에 있는 사람들의 경시와 모욕이 이와 같았다.】 우의정 이명(李蓂), 판의금부사 김명윤(金明胤), 지의금부사 송기수(宋麒壽),【행신이 온공하였고 특이한 것을 입론하는 데 힘쓰지 않았다. 재산 관리를 힘써 가산이 매우 부유했다.】 동지의금부사 이건(李楗)이 명을 받들고 와 빈청에 모였다. 임금이 금부 및 이조에서 써서 아뢴 단자(單子)를 빈청에 내리면서 이르기를,
  “근일 정현(鄭?)의 상소가 있었고 역시 판부사의 계사(啓辭)가 있었다. 금부 죄인 가운데 억울함을 풀어주어야 할 사람이 있기 때문에 이미 써서 아뢰도록 하였다. 지금 내려준 단자가 그것이다. 그 가운데 원도(遠道)에 나가 있는 자는 중도(中道)로 옮기며 중도에 나가 있는 자는 근도(近道)로 옮기고 놓아 줄 만한 자는 놓아 주고, 직첩을 줄 만한 자는 직첩을 주되, 공론에 오르는 사람들을 경들이 잘 헤아려서 회계(回啓)하라.”
  하니, 대신 및 금부 당상 등이 회계하기를,
  “신들이 지금 내린 단자를 삼가 보건대, 각 인의 죄명에 별로 뚜렷하게 지적되는 범죄 사실이 없습니다. 모두가 일시적인 말과 의논을 편 것이 더러 당시의 집권자【이기와 윤원형.】에게 거슬려 시기를 타 모함에 말려든 자들인 것 같습니다. 성상의 마음이 여기에 미치고 하문함이 신들에게 미치니, 인은(仁恩)이 미치는 바를 누군들 감격해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사람들을 이미 오래도록 귀양살이했다는 이유로써 이제 만약 그 억울함을 풀어 주게 된다면 이것은 바로 커다란 은명(恩命)인 것입니다. 은명에 관계되는 바를 아래에서 어찌 감히 논의할 수 있겠습니까. 죄명이 갖추어져 있으니【이명이 ‘죄명이 갖추어져 있다는 말은 온당하지 못한 것 같으니 빼는 것이 어떠한가?’ 하였는데, 좌우에서 대답이 없었다.】 임금께서 깊이 통찰하시고 반드시 영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그런 뒤에 은혜가 위에서 나와 인심이 감복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히 아룁니다.”
  하였다. 죄인의 서계 단자(書啓單子)를 대내(大內)로 도로 들이고 얼마 있다가 단자에 부표(付標)하여 빈청으로 도로 내렸다. 진도에 안치된 노수신(盧守愼),【심지가 고명하고 학문에 연원이 있으며 처신과 행사에 솔선하여 실천함이 모두 정직하였다. 정미년에 적소에 유배된 뒤 방안에서 조용히 지냈는데 조수(操守)가 더욱 굳었다.】 남해에 안치된 김난상(金鸞祥),【효성과 우애의 행실이 있다.】 종성에 안치된 유희춘(柳希春)【천품이 온아하고 경사에 박통했다.】 이상은 중도로 상량해 옮기고, 이성(利城)에 부처된 한주(韓澍), 태안에 부처된 이진(李震),【연악하고 결단력이 없다. 이임(李霖)의 형으로 함께 적소로 쫓겨났다.】 강진에 부처된 윤강원(尹剛元) 이상은 근도로 양이(量移)하고, 경흥(慶興)에 안치된 유감(柳堪), 강계에 안치된 이원록(李元祿)【이기(李틒)가 권세를 부릴 때를 당하여 비록 조카라는 지친간이었으나 여러번 이기의 전횡을 그르다고 지적하니 이기가 미워해 몰래 부하를 시켜 멀리 귀양을 가게 하였다. 일시의 사림들은 이원록의 무죄를 슬퍼하였고 이기의 흉악하고 잔인함이 심하다 하였다.】 이상은 놓아 보내고, 전 헌납 백인걸(白仁傑),【성품이 강직하고 언론이 강개하였다. 을사년 위태한 때를 당하여 생사를 불계하고 감히 밀지의 그름을 논하니, 사림들이 이를 옳게 여겼다.】 전 정랑 이담(李湛),【성품이 총명하고 강학에 힘썼다.】 전 도사 민기문(閔起文), 전 찰방 황박(黃博), 전 봉사 윤충원(尹忠元), 전 목사 송희규(宋希奎) 이상은 직첩을 환급하게 하였다.【이명이 ‘죄명이 갖추어져 있다는 말을 뺀다면 은명(恩命)이 반드시 여기에서 그치지는 않을 것이다. 김충갑(金忠甲)·이염(李픲)·임복(林復) 등도 모두 죄가 없는데 그들만 용서를 받지 못하니 이것이 한탄스러운 일이다.’ 하니, 이준경이 ‘천은은 밑에 있는 자로서 간여할 바가 아니다. 이것도 다행한 일이다.’ 하였고, 이명이 또 ‘이 사람들은 모두 죄없이 20여 년을 귀양지에 버려진 사람들이다. 그 억울하고 원통함이 이미 극에 이르렀다면 밑에 있는 자의 도리에 당연히 그 애매한 정상을 힘써 진달해 상의 의심을 풀고 천은을 다함께 받게 하는 것이 또한 옳지 않은가.’라고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제공은 영해(嶺海)에서 20년을 지냈는데 하루아침에 양이(量移)되었다. 명이 내리던 날 우부 우부(愚夫愚婦)들도 흔쾌히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는 대개 천리의 자연(自然)이니, 인심을 어찌 속일 수 있겠는가. 이때 노수신은 옮겨진다는 말을 듣고 그 날로 길을 나서 얼첩과 아이들을 모두 남겨둔 채 돌아보지 않고 오직 돌아가 부모를 뵙겠다는 생각에 급했다. 곤궁한 데에 처해서도 변하지 않은 지조를 여기에서 더욱 징험할 수 있다 하겠다. 이원록은 지체하며 출발하지 않고 그 전토와 자산을 전부 팔아, 올 때는 바리에 실은 것이 길을 메웠고 지나치는 군읍에 우마를 색출해 이를 운송케 하니 사람들이 이로써 그를 비루하다 하였다. 윤충원(尹忠元)은 사류(士類)가 아니라 그 사람을 논할 필요는 없지만 당초의 득죄가 또한 잘못된 것이어서 억울하다 하겠다.】
  【사신은 논한다. 회계(回啓)의 글을 고찰하건대 ‘죄명이 갖추어져 있다.’라고 하였다. 이른바 그 죄명이라는 것이 모두 얽어맨 데에서 나온 것인데 임금이 어떻게 능히 그렇게 된 까닭을 통찰할 수 있겠는가. 만약 그 죄명대로 그들을 단죄한다면 유배당한 여러 사람들을 임금으로 하여금 의심치 않게 할 수 있겠는가. 마침 성상의 마음에 먼저 이미 깨우침이 있어 반드시 그들을 풀어 놓아 주겠다는 결단이 있었기 때문에 은명이 크게 베풀어져 모두가 관용을 입게 된 것이다. 애석하다, 이준경은 일시의 명망이 있던 사람인데 그 머뭇거리고 두리번거림이 이와 같음이여. 하물며 다른 사람들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원전】 21 집 53 면


출처 : 봉암회(鳳巖會)
글쓴이 : 양지뜸 종욱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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