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星州) 고산정(高山亭) - 15
고산정(高山亭)과 항일독립운동(抗日獨立運動)
1919년 3·1 독립운동이 일어난 수일 뒤 이달필(李達馝)이 서울에서 내려와 백세각을 방문하여 공산(恭山) 송준필(宋浚弼)에게 서울의 정세를 알리고 지금 파리에서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되는데 약소국가의 억울함을 펼 천재일우의 기회가 왔음을 전하면서 우리의 독립을 청원하는 문서를 제출하는 주동적 역할을 요청하였으며 공산은 다음날 일가 일문이 모인 자리에서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렸다. 나라가 회복되면 죽어도 사는 것이요. 나라가 회복되지 않으면 살아도 역시 죽는 것과 같다. 내 어찌 화(禍)와 복(福)에 관심을 두고 또 생각을 하리요. 나의 오늘의 일은 곧 선인(先人)의 뜻이다. 선인의 뜻이 있는 곳에 어찌 힘을 다하여 조상의 뜻과 사업을 이어가지 않으리오. 나의 뜻은 이미 결정하였다.” 하고 문중(門中)의 뜻을 모았다.
또한 회당(晦堂) 장석영(張錫英) 선생께 서신을 아들 수근편에 보내 이 일을 설명하고 지도를 간절히 요망하여 허락을 받고, 송규선과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이 다전(茶田)으로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을 찾아가 의논을 하고 각지에 사람을 보내 파리장서에 서명할 분들의 명첩을 거두어 왔으며 장서의 초고는 장석영이 하였고 곽종석이 수정을 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심산 김창숙이 파리로 가기로 자원하였으며 이에 괴당(槐堂) 송회근(宋晦根)이 “산하가 만 리인데 어찌 자금도 없이 갈 수 있겠는가.” 하고 노자 일천원을 전달했으며 청탄(聽灘) 여보회(呂輔會)가 흔연히 노자 이천원을 도와주었다. 당시 관청의 서기 1개월 본봉이 30원이었다고 하니 현재의 물가와 비교한다면 거금이었다.
공산께서 통고국내문(通告國內文)을 지어서 인쇄를 하려고 하였으나 마땅한 방법이 없어 생각한 나머지 봉강서당(鳳岡書堂)의 흥효당(興孝堂) 마루가 감나무였으므로 한 장을 빼어 정결하게 다듬고 송인집이 글씨를 쓰고 송종식이 각자(刻字)를 해서 3,000매를 인쇄하여 나누어 주고 각지에 배포케 하였으며 다가오는 성주 장날(4월 2일)에 군내 유림과 기독교 인사들을 규합하여 만세 시위운동을 펴기로 합의하고 백세각에서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4월 2일 오후 2시 송우선, 송천흠, 김희규 등이 먼저 주막집 지붕에 올라가 태극기를 휘두르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선동하니 온 시장 사람들이 모두 호응하여 기세가 장대해져 죽음에 나아가도 피하지 않고 만세를 부르다가 한밤중이 되어서야 끝이 났는데 총탄에 맞아 죽은 사람이 서너 명이고 상해를 입은 사람이 수십 명이었으며 잡혀간 사람이 육칠십 명에 이르렀다. 다음날 경부(警部) 및 순사 두사람과 헌병 네 사람이 찾아와 송준필, 송회근, 송규선, 송상익, 송수근, 송훈익, 송문근, 송우선, 송천흠 등 여러 사람이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파리장서 서명과 성주 장날 만세시위운동에 고산정의 젊은 사람들이 모두 참여하였으나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11분만 후에 정부로부터 그 공을 기리어 서훈을 받게 되었으며 한 문중에 11분의 독립 유공자가 있는 것도 고산정의 자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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