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룡산 갑사
2018년 7월 8일(계룡상산행시~)
통일신라시대에는 오악(五嶽) 中 서악(西嶽), 고려시대엔 묘향산(妙香山) 상악(上嶽), 지리산 하악(下嶽)과 더불어 3악중(三嶽中) 중악(中嶽)으로 일컬어지는 명산 계룡산(鷄龍山)의 서편 기슭인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에 위치한 갑사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입적하고 400년 지나 인도를 통일한 아쇼카왕이 부처님의 법을 널리 펼치고자 큰 서원을 세우고 사리보탑에 있던 부처님의 사리를 동서남북을 관장하는 사천왕들로 하여금 마흔여덟 방향에 봉안케 하였다. 이때 북쪽을 관장하던 다문천왕(비사문천왕)이 동방 남섬부주 가운데서도 명산인 계룡산의 자연 석벽에 봉안한 것이 지금의 천진보탑이다. 그 후 고구려 승려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신라최초 사찰인 선산 도리사(挑李寺)를 창건(創建)하시고 고구려로 돌아가기 위해 백제땅 계룡산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이때 산중에서 상서로운 빛이 하늘까지 뻗쳐오르는 것을 보고 찿아가 보니 천진보탑이 있었다. 이로써 탑 아래에 배대(拜臺)에서 예배하고 갑사를 창건하였는데, 이때가 420년(백제 구이신왕 원년)이다. 556년(위덕왕 3년) 혜명대사가 천불전(天佛殿)과 보광명전(普光明殿) 대광명전(大光明殿)을 중건하고, 통일신라시대 의상대사가 천여 칸의 당우를 중수하고 화엄대학지소를 창건하여 화엄도량의 법맥으로 전국의 화엄10대 사찰의 하나가 되어 국중대찰(國中大刹)로 크게 번창되었다.
승병장 영규대사의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고자 영규대사 추모관 건립 또한 추진 중에 있다. 갑사는 岬寺, 岬士寺, 鷄龍甲寺 등으로 불리어 지다가 으뜸 또는 첫째란 뜻의 지금의 명칭은 18세기말 산 이름을 따서 鷄龍甲寺로 불리어지고 있고, 1911년 제정된 사찰령에 따라 마곡사의 首말사가 되었고 경내에는 15동의 불전과 승당, 부속 전각들이 있으며 주변 산골짝 여러 곳에 산내 암자를 두고 있다.
갑사는 계룡산 아래에 있는 절로 백제 구이신왕 1년(420년)에 아도화상이 지었다는 설과 556년에 혜명이 지었다는 설이 있다. 679년에 의상이 수리해서 화엄종의 도량으로 삼으면서 신라 화엄 10찰의 하나가 되었다. 859년·889년에 새로 지었으나 정유재란(1597)으로 인해 건물이 모두 불타 버린 것을 선조 37년(1604)에 중건되고 효종 5년(1654)에 가람이 전면적으로 개축 중수되었으며 고종 12년(1875)에 다시 중수되었다고 전한다.
대웅전은 절의 중심에 있는 법당으로 원래는 현재 대적전이 있는 근처에 있던 것으로 보이며, 다시 지을 때 이곳에 옮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앞면 5칸·옆면 4칸으로 1층이며, 옆면이 사람인(人)자 모양으로 맞배지붕 건물이다. 기둥 위에서 지붕 처마를 받치는 공포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양식이다. 가운데 3칸은 기둥 간격을 양 끝칸 보다 넓게 잡아 가운데는 공포를 2개씩, 끝칸에는 1개씩 배치하였다. 내부는 우물천장으로 되어있고, 불단을 만들어 석가여래불상을 모시고 있다. 그 위에는 화려한 닫집을 설치하였다.
소조삼세불은 대웅전에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중앙에 봉안하고 우측에 아미타불, 좌측에 약사불을 봉안하여 삼세불의 봉안형식을 취하고 있다. 협시불(脇侍佛)로는 문수보살, 보현보살,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의 4대보살을 봉안하고 있다. 석가여래상은 항마촉지인상(降魔觸地印像)이다. 상호는 둥글며 양미간에 백호가 있고 목에는 삼도(三道)가 있고 법의(法衣)는 통견(通絹)이며 가슴 부분이 벌어졌는데 조선시대 불상으로는 우수한 불상이라 할 수 있다. 아미타여래상의 수인(手印)은 오른손은 가슴앞에서 엄지와 중지를 대고 있으며 왼손은 무릎위에서 엄지와 중지를 대고 있어 아미타여래의 9품인(九品印)중 중품중생인(中品中生印)에 해당한다. 약사여래상도 소조(塑造)의 좌상(坐像)이며 협시보살로서 4대보살상은 모두 소조의 입상(立像)이다.
적묵당(寂默堂)
건물의 규모는 서측으로 8칸, 북측으로 6칸이며 동측과 남측으로 각각 3칸,
2칸으로 구성되어 있는 'ㄴ'자형 건물로 현재 종무소와 승방으로 사용되고 있다.
진해당(振海堂)
강당 보수공사시 나온 상량문에는 정문이라고 되어 있으며 창건된 것은 만력 42년(광해국 6년, 1614년)에 상량하였고 그 후 가경(嘉慶)2년(정조 22년, 1798년)에 중수하고 광서(廣西)16년(고종 27년, 1890년)에 중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후 강당은 스님들이 법문을 강론하던 건물로 정유재란(1597)으로 불타 없어진 것을 뒤로 다시 지은 것이다. 앞면 3칸·옆면 3칸의 규모이며 지붕의 옆선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집이다. 가운데 부분이 볼록한 배흘림의 기둥 위에 지붕 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를 짰는데,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식 건물이다. 단청은 완전히 퇴색되어 무늬의 흔적만 남아 있다. 절도사 홍재의가 쓴 ‘계룡갑사(鷄龍甲寺)’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편액
강당에 「계룡갑사(鷄龍甲寺)」라는 편액이 붙어 있는데, 백판(白板)에 양각(陽角) 청서(靑書)로 쓰인 이 글씨는 말미에 정해국추절도사홍재희(丁亥菊秋節度使洪在羲)라고 되어 있어1887년(고종 24) 충청절도사 홍재희(洪在羲)가 쓴 것이다.
윤장대(輪藏臺)(갑사강당안의 윤장대)
팔각형으로 된 책장에 밑에는 바퀴를 달고 중앙에는 기둥을 세워 궤를 돌리면 찾고 싶은 책을 쉽게 찾아볼 수 있도록 만든 책궤.
갑사 범종루
보물 월인석보목판을 보관하는 보장각
삼성각(문화재자료 제53호)
삼성각은칠성·산신·독성의 삼성을 모신 곳이다.건물 이름이 삼성각 인 이유는 모두 불교 밖에서 수용한 신이기 때문에 전이라 하지 않고 각이라 한다. 칠성은 도교의 북두칠성이 불교화한 것으로 수명장생을 주관하는 별이다. 산신은 우리 민족 고유의 토속신으로 호랑이와 더불어 나타난 만사형통의 신이며, 독성은 혼자 깨달은 성자를 말한다.각각의 건물을 따로 지어 삼성을 모시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곳은 삼성각 안에 같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팔상전(문화재자료 제54호 )
팔상전은 석가모니불과 신중탱화를 모신 곳이다.원래 팔상전에는 석가여래의 일대기를 8부분으로 나누어 그린 팔상탱화를 모시지만, 이곳에는 신중탱화 한 폭만 봉안되어 있다.
신중탱화는 불교의 호법신을 묘사한 그림으로 호법신은 대개 우리나라 전통의 신들이다.
갑사동종
1584년 작. 보물 제478호. 높이 131cm, 입지름 91cm. 전체적인 형태는 어깨부분에서 몸통부분까지는 완만한 곡선을 이루고, 몸통부분부터 하단까지는 직선으로 되어 있다.
공우탑
갑사 경내의 대웅전에서 대적전에 이르는 계곡변에 위치하고 있는 이 탑은 3층으로 이루어진 탑신과 기단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층에는 탑의 건립내용이 음각되어 있고 2층의 탑신에는 『우탑(牛塔)』이란 이름과 3층 탑신에는 『공(功)』이란 명문이 각각 음각되어 있다.이 탑은 탑신에 새겨진 명문으로 보아 갑사 중창시에 큰 공을 세운 소가 늙어 죽으니 그 은공을 기려 세운 것이라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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