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河(산하) : <여행>

조문국사적지(召文國史蹟地)와 작약꽃 -1

공간(空間) 2018. 5. 27. 22:56

 

조문국사적지(召文國史蹟地)와 작약꽃(함박꽃)

 

경북 의성군 금성면에 있는, 조문국사적지(召文國史蹟地)와 사적지내에 조성된 3500규모의 작약꽃밭에 꽃이 만개하리라 생각하고 찾아갔으나 함박꽃은 90%가 져버리는 아쉬움만 남겼다.(금년에는 5월 중순에 만개하였다고 한다)

작약꽃의 꽃말은 '수줍음'이다.

 

 

 

 

조문국(召文國)

삼국사기(三國史記)권이(卷二) 신라본기(新羅本紀) 제이(第二) 벌휴이사금(伐休尼師今)조에 二年 春正月 親祀始祖廟 大赦 二月 拜波珍飡 仇道 一吉飡 仇須兮 爲左右軍主 伐召文國 軍主之名始於此라는 기록이 있다. 이는 벌휴이사금 2, 1월에 왕이 친히 시조사당에 제사 지내고 죄수를 크게 사면했으며 2월에 파진찬 구도와 일길찬 구수혜로서 좌우군주로 삼아 조문국을 정벌했는데 군주라는 이름이 이때 처음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벌휴이사금은 신라 9대왕으로 동왕 2년은 서기 185년에 해당되므로 조문국이 신라에 복속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1830여년 전의 일이다. 의성군 금성면이 조문국 도읍지로 지금까지 규모가 매우 큰 100여기 등 모두 374여기(2015.4 의성 금성산고분군 일원 문화재 지표조사 보고서)의 고분군(古墳群)이 남아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최소한 몇 세기에 걸친 족적(足蹟)이라 짐작되므로 삼한의 초기부터 존재하던 부족국가라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196011월 국립박물관(김재원 박사팀)에서 거대한 조문국 고분1기를 발굴 (금동관 등 다수유물 발견) 조사하여 당시 상황연구에 큰 업적을 남겼다.

 

 

 

 

조문국고분전시관

 

 

 조문국(召文國) 경덕왕릉(景德王陵)

옛 조문국(召文國) 경덕왕릉(景德王陵)은 그 형식이 전통적인 고분(古墳)으로서 봉 아래 화강석 비석(碑石)과 상석(床石)이 있다. ()의 둘레가 74m이며 능의 전면(前面)에는 가로 42, 세로 22, 높이 1.6m의 비석이 서 있다. 그런데 이 왕릉이 발견되기에는 신기한 전설이 있었으니 조선 숙종(肅宗) 때 허미수 문집에 실려 있다. 먼 옛날에 한 농부가 외밭(瓜田)을 마련하기 위하여 작은 언덕을 갈던 도중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큼직한 구멍이 나타났다. 이상하게 생각되어 들어가 보니 돌로 쌓은 석실(石室)이 나타났다. 석실의 둘레에는 금칠을 하였고 가운데는 금소상(金塑像)이 있는데 그 머리에 쓴 금관(金冠)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농부가 욕심이 나서 금관을 벗기려 하였더니 그만 농부의 손이 금관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이날 밤에 의성군수(義城郡守)의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서 이르기를 나는 경덕왕(景德王)이다. 아무 곳 아무 데 와서 살펴보고 이 무덤을 개수 봉안토록 하여라고 현몽하였으므로 이튿날 곧 이곳을 발견하여 봉을 쌓고 관리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라고 한다.

또한 이 지방 사람들의 이야기는 이렇게도 전해온다. 현재의 능지(陵地)는 약 500년 전에 오극겸(吳克謙)의 외밭(瓜田)이었는데, 외를 지키던 어느 날 밤 꿈에 금관(金冠)을 쓰고 조복(朝服)을 한 백발의 노인이 나타나서 내가 신라시대(新羅時代) 조문국(召文國)의 경덕왕(景德王)인데 너의 원두막이 나의 능() 위이니 속히 철거를 하라고 이르고는 외지기 등에다 한 줄의 글을 남기고 사라졌다. 이에 놀란 외밭 주인은 일어나 보니 꿈속에 노인이 써준 글이 그대로 자기 등에 씌어 있어 현령(縣令)께 고()하고 지방의 유지들과 의논하여 봉분(封墳)을 만들고 매년 춘계 향사를 올렸으며 지금도 제례(祭禮) 행사는 계속되고 있다.

 

 

 

신라의 경덕왕과 이름은 같지만 엄연히 조문국의 왕인 경덕왕의 무덤도 있다. 200여 개의 고분군 가운데 1번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원래 봉분이 없이 오이밭으로 경작되고 있었는데 의성 현령의 꿈에 경덕왕이 직접 나타나서 원두막을 철거하라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 그래서 부랴부랴 봉분을 올리고 그 이후로 현재까지 제례를 계속 지내고 있다고 한다.

 

 

고분군사이에 조성된 작약꽃밭

 

 

고분군사이에 조성된 작약꽃밭

 

 

 

 

 

 

 

 

 

 

 

 

 

 

고분군사이에 조성된 작약꽃밭

 

 

 

 

작약꽃(함박꽃)

 

작약꽃의 꽃말은 : 수줍음

꽃은 아름다우나 향기가 없다.

 

작약꽃의 전설 : 옛날 파에온이라는 공주가 사랑하는 왕자를 먼 나라의 싸움터에 보내고 혼자서 살고 있었다. 공주는 이제나 저제나 하고 왕자가 돌아오기만 기다렸지만 왕자는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수많은 세월이 지난 어느 날 눈 먼 악사 한 사람이 대문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

공주는 그 노랫소리가 하도 구슬퍼 귀를 기울여 자세히 듣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 노래는 왕자가 공주를 그리워하다가 마침내 죽었다는 사연이었기 때문이다.

왕자는 죽어서 모란꽃이 되어 머나먼 이국땅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공주의 슬픔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컸다.  공주는 굳게 마음먹고 악사의 노래 속에서 가리키는 대로 
머나먼 이국땅을 찾아가 모란꽃으로 변해 버린 왕자 곁에서 그의 곁을 떠나지 않게 해달라고 열심히 기도를 드렸다.

공주의 정성은 마침내 하늘을 감동시켰다. 그리하여 공주는 함박꽃(작약꽃)으로 변하여 왕자의 화신인 
모란꽃과 나란히 같이 지내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마지막 남은 몇송이 함박꽃

 

 

 

 

 

 

 

 

 

 

 

 

 

 

 

 

과거 삼한시대 때 이 지역에는 작은 소국이었던 조문국이 융성했다.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던 조문국은 후에 신라에 병합되면서 역사의 막을 내렸다. 그 조문국의 유적지인 고분군이 200여 기가 모여 있는 곳을 사적지(경상북도 기념물 제128)로 지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