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寺(산사)

불영사(佛影寺)

공간(空間) 2013. 6. 25. 21:23

 

 

불영사(佛影寺) 일주문,

 신라 진덕여왕5(651) 의상대사가 이곳 산세가 인도의 천축산과 비슷하하다 하여 산이름을 천축산(天竺山)이라 하고 큰 연못에 있는 아홉 마리 독룡{毒龍)을 주문으로 쫒아낸 후 그 자리에 절을 지어 "구룡사(九龍寺)"라 하였는데, 후에 서쪽 산위에 부처님의 형상을 한 바위가 연못에 비쳐"불영사(佛影寺)로 개창하였다

 

 

 

 

 

 

 

 

울진 불영사 대웅보전(蔚珍 佛影寺 大雄寶殿)

 

보물 제1201

경북 울진군 서면 하원리 122.

이 건물은 불영사의 중심 법당으로 정면 3X 측면 3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건립 연대는 조선 영조(英祖) 1(1725)이다.

계단 좌우에는 돌 거북 한 쌍이 놓여 있다. 상반신만 노출되어 마치 대웅보전을 둘이서 짊어지고 버티고 있는 듯하다. 사찰에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불영사가 있는 자리가 화산(火山) 이어서 그 불기운을 누르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건물의 짜임새나 각 부재(部材)의 조각도 깔끔하며 내부 단청도 격조 높은 수법을 보이고 있다.

 

 

 

불영사 삼층석탑(佛影寺 三層石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35

 

이 탑은 이중(二重) 기단위에 3층으로 된 탑신(塔身)과 상륜부(相輪部)까지 갖추고 있는 석탑이다. 다만 2층과 3층 지붕돌은 귀퉁이가 조금 깨어져 나갔다. , 하층 기단 면석의 양 모서리에 기둥과 그 중간에 안 기둥이 하나 새겨져있다. 탑신부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몸돌에 모서리 기둥이 새겨져 있고 지붕 받침은 4단이다. 2층 지붕돌의 낙수면의 기울기가 1층이나 3층의 지붕돌의 그것과는 약간 다르다. 탑의 높이는 3.21m이고, 양식으로 보아 신라의 전형 양식을 잘 계승한 고려시대 초기의 탑으로 보인다.

 

 

 계단 좌우에 있는 거북이

계단 좌우에는 돌 거북 한 쌍이 놓여 있다. 상반신만 노출되어 마치 대웅보전을 둘이서 짊어지고 버티고 있는 듯하다. 사찰에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불영사가 있는 자리가 화산(火山) 이어서 그 불기운을 누르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보호수 500년된 은행나무

 

 

 

 

 

 

 

 

 

 

 

불영교

 

불영교

 

 

 

* (울진·불영사 전설)

 1) 노인과 여덟 동자  : 의상대사가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화엄법회를 열고 교화에 힘쓸 때였다.

어느 날 노인 한 사람이 8명의 동자를 데리고 의상대사를 찾아왔다"대사시여! 우리는 동해안을 수호하는 호법신장이옵니다. 이제 인연이 다하여 이곳을 떠나면서 스님께 부탁드릴 말씀이 있어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그 동안 불법을 수호하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소승에게 부탁할 일이 무엇인지 어서 말씀해 보시지요."

"그 동안 저희들은 이곳에 부처님을 모시고자 원을 세웠으나 인연 닿는 스님이 없어 원력을 성취 못했습니다. 떠나기 직전에 스님께서 오시어 친견케 됨을 참으로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화엄법계로 장엄하려는 스님의 뜻을 저희들이 살아온 도량에서 시작하여 주시면 더없이 감사하겠습니다."

 

"소승에게 불사의 인연을 맺도록 해주셨으니 여한을 풀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의상법사의 대답을 들은 호법신장들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며칠 후 의상대사는 동해안의 불사 인연지를 찾아나섰다. 포항에 도착하여 동해안을 거슬러 오르는데 어디선가 한 마리 용이 나타났다. 용은 의상 스님에게 인사를 드리더니 앞장서서 길을 인도했다.

스님이 울진포 앞바다에 다다르자 용은 바다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그때 울진포 앞바다에는 오색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있었는데 마치 기다렸다는 듯 스님을 사모하다 용이 된 선묘룡이 스님을 반갑게 맞았다.

 

"스님! 어서 오세요. 지금부터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지금의 천축산 입구에서 선묘룡은 문득 멈추고는 말했다. "이제부터는 어려우시더라도 손수 인연지를 찾으셔야 겠습니다."

인사를 마친 선묘룡은 훌쩍 사라졌다. 8일간 천축산을 돌아보며 절터를 찾던 의상 스님은 피로에 지쳐 어느 연못가에 쉬고 있었다. 문득 못쪽을 바라보던 스님은 그만 벌떡 일어서고 말았다.

연못의 물 위에 부처님의 형상이 비치고 있지 않은가. 감격한 의상 스님은 그 자리에서 수없이 절을 했다.

그리고는 부처님 영상이 어떻게 나타났는가 주위를 살펴보니 마치 부처님 형상과 꼭 같은 바위가 하나 서 있었다. 그때 의상은 노인의 말이 떠올랐다.

 

"! 이곳이 바로 호법신장들이 기거하며 불법을 수호하던 못이로구나. 이곳에서 화엄대법회를 열고 가람을 세워야지."  의상 스님은 우선 노인과 8명의 동자 호법신장들을 위해 ≪화엄경을 독송하고 그 뜻을 설하기 시작했다. 그때 노인과 8명의 동자가 못속에서 올라와 열심히 설법을 들었다.

 

"이 산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천축산에 계실 당시의 형상과 똑같으며 연못에 비친 부처님 영상은 천축산서 설법하시던 부처님 모습입니다. 주위 환경은 영산회상이 응화된 것이지요."

설법을 다 들은 노인은 의상 스님에게 그곳에 대한 설명을 하고는 동자들과 함께 용으로 변하여 승천했다.

의상대사가 주위를 살펴보니 산세가 노인의 말대로였다. 북으로는 연꽃처럼 생긴 봉우리가 있고 부처님의 형상과 비슷한 바위와 탑들이 마치 설산 당시의 부처님 회상 같았다.

스님은 용들이 살던 연못을 메워 금당을 짓고 부처님 영상이 나타난 곳이라 하여 불영사라 이름했다.

부처님 영상이 나타난 곳에는 무영탑을 조성했다. 지금도 무영탑이라 불리는 3층석탑이 남아 있는데 상대중석(上臺中石) 네쪽 중 두쪽은 없는 상태다. 연못에 비친 부처님 형상을 한 바위는 불영암 또는 부처바위라 불리우고 탑 모양의 바위는 탑바위, 연꽃 형상의 봉우리는 연화봉이라 명했으며 산 이름은 천축산이라 지었다. 또 불영사 계곡을 흐르는 광천계곡은 일명 구룡계곡이라고 불리운다.

이러한 유래를 지닌 불영사에는 두 차례의 이적을 보여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2) 민 여인의 기도 : 

지금으로부터 350여 년 전, 16세기 초 중종년간의 일이다.

서울의 남산 중턱에 한 선비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백극재라 하였다. 그에게는 아름다운 부인이 있었는데 민씨였다. 그 선비는 생업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허구한 날 책만 읽었다.

부인 민씨가 간신히 생계를 이어 나갔다. 이웃집 허드렛일이며 친정의 일까지 도맡아 하며 겨우겨우 입에 풀칠을 하곤 했다. 민 여인은 어릴 때부터 착한 마음씨에다 부처님을 믿는 독실한 불자였으나, 집안 형편이 어려워 절에 가는 것은 아예 포기할 정도였다. 그녀는 집에서 기도하고 집에서 염불하고 집에서 경을 읽었다. 참선도 집에서 했다. 그녀는 남편의 영달을 위해 기도했다. 절에 나가지 못하는 것이 죄송스러워 더욱 열심히 부처님을 그리워하며 기도했다.

"부처님, 저에게 힘을 주십시오. 지혜와 복덕을 구족하게 해주십시오.

제 남편이 벼슬하게 하옵소서. 그렇게 되면 부처님의 은혜는 결코 잊지 않겠나이다.

부처님을 비롯하여 스님네에게도 공양하겠습니다. 불사에 힘쓰겠습니다.

절에서 필요로 하는 것들도 성심껏 공양하겠습니다. 부처님, 도와주옵소서, 간절히 간절히 비옵니다." 그녀는 기도하고 염불하고 경을 읽고 참선했다. 무엇보다 아름다운 마음씨를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자비로운 마음, 넉넉한 마음을 잃지 않는 것이 바로 제일의 염불이요 기도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기 1, 남편 백극재는 과거에 응시했다. 기도의 공덕이었을까. 그는 과거에 급제하여 마침내 강원도 울진 부사를 부임 받았다. 둘은 너무나도 기뻤다. 부임지로 향하는 발걸음은 나는 듯 가벼웠다. 풀잎도 나무도 쏟아 붓는 햇살 기둥도 모두가 두 사람을 축복해 주었다. 세상이 온통 그들 둘만의 것이었다.

울진에 이르러 축하를 받고, 고을의 형편을 두루 돌아보았다. 그렇게 사흘이 지났다. 사흘째 밤 백 부사는 신음소리 하나 없이 숨을 거두었다. 놀란 것은 부인 민씨만이 아니었다. 지방장관들을 비롯해 온 고을 주민들이 이 소식을 듣고 동헌으로 모여들었다. 이제껏 한 번도 없던 일이었기에. 정신없이 사흘을 내처 울다가 민 여인은 모여든 장관들과 육방권속들에게 물었다. "이 고을에 절이 있을 것이오. 특히 영험한 절이 있다면 말해 보시오." 이방이 대답했다. ", 불영사라는 절이 있습니다.

그 절은 오랜 역사를 지닌 절로 많은 영험설화를 갖고 있습니다.

특히 대웅전 앞에 정중탑이 있고 그 탑을 위하여 세운 탑전 내에 모셔진 부처님이 영험하다고 합니다."

 

민 여인은 참회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남편이 과거에 급제하여 임지에 이르기까지 너무나 들뜬 마음으로 부처님을 생각지 못한 것이 죄스러웠다. 부처님의 은혜로 영달을 입고도 그 공덕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참회의 눈물만을 짓고 있을 새가 없었다. 그녀가 말했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사또의 상여를 그 불영사로 옮겨 주시오." "절이란 장지가 아니옵니다. 절은 영혼을 천도하여 극락세계로 인도할 수 있는 기능은 갖고 있으나 시신을 묻을 수는 없습니다."

"나도 그 정도는 알고 있소. 그러니 어서 그 절로 옮기시오." "지방장관들이 이미 장지를 북문 밖에 정했습니다만..."  "여러 말할 시간이 없소. 어서 사또의 상여를 불영사로 옮깁시다."

관속들은 지엄한 민 여인의 말을 어길 수가 없었다. 그들은 상여를 메고 불영사에 이르렀다. 불영사에서 이 소식을 듣고 원주가 나와 탑전 앞에 관을 안치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녀는 손수 목탁을 들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관세음보살님, 관세음보살님, 굽어살피소서. 저의 부군 백부사를 다시 살아나게 해 주옵소서

.저희 내외가 그토록 어렵게 살 때에 부처님께 기도한 공덕으로 남편은 과거에 급제하여 이곳 울진 부사로 명받았습니다. 저 또한 남편과 함께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었사온대, 어찌하여 이다지도 빨리저희에게서 기쁨을 거두어 가신단 말입니까. 부처님이시여, 관세음보살님이시여, 은혜를 다시한번 베푸시옵소서. 나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기도는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하루 낮이 지나고 밤이 다가왔지만 민 여인의 기도는 여전했다. 민 여인은 참회기도를 올렸다.

 

"제가 어리석어 잠시 동안 부처님을 잊었사옵니다. 남편의 출세에만 마음이 들떠 부처님의 공덕을 잊었습니다. 지극한 마음으로 참회합니다. 다시는 영원토록 제 마음속에서 당신을 잊지 않겠나이다. 부처님이시여, 관세음보살이시여, 당신은 온갖 공능을 지닌 분입니다. 제 남편을 다시 살릴 수 있으십니다. 5년도 좋고 10년도 좋습니다. 다시 환생하여 저희처럼 어렵게 살아가는 백성들을 위해 덕치를 베풀 수 있게 하옵소서. 부처님은 삼계의 큰 스승이시고 사생의 자애로운 어버이십니다. 제 남편을 당신의 그 뛰어난 가피력으로 다시 살아나게 하여 주옵소서."  이같이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간절히 기도하는 것을 본 스님들이 그만 감화되고 말았다. 그들도 함께 목탁을 듣고 기도를 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사흘 낮이 지나고 밤을 맞았다. 달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밤하늘의 무수한 별들도 함께 기도에 동참하고 있었다. 산사의 고요한 적막도 탑전을 에워싸고 기도의 음성을 더욱 맑게 만들었다. 가을밤이라 냉기가 옷 속으로 스며들었다. 민 여인은 확고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속에 털끝만큼도 부처님의 가피력을 의심하는 일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는 염불삼매에 들어 생각했다. 부처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분이다. 그분은 알지 못하는 바가 없고 능하지 못한 바가 없다. 부처님은 반드시 내 남편을 다시 살려 주실 것이다. 나의 이 마음은 확고하다.' 이처럼 기도하는 민 여인의 눈에 불가사의한 현상이 들어왔다.

남편의 시신을 모신 관 틈에서 웬 희뿌연 물체가 나타났다.

 

밝은 달빛 아래 비친 모습이 분명 여자였다. 머리칼을 풀어헤친 채로. 민 여인은 더욱더 자신을 염불삼매에 붙들어 두려 애썼다. 그때 그 정체 모를 여인의 입에서 말이 굴러 나왔다. "나는 이 관 속에 들어 있는 사람과는10생에 맺은 원한관계에 있다. 그는 내 부모를 살해하고 내 남편을 죽이고 내 자식들을 감옥에 집어넣은 철천지원수다. 그래서 나는 늘 이 사람을 방해하려 하였다. 그간 어느 때 어느 곳에서도 부귀영화를 누리지 못하도록 방해해 왔다." 민 여인이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그렇다면 어찌하겠는가?"

"원한이 쉽게 풀리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당신과 스님네의 염불공덕에 의해 나는 원결을 풀고 자비로운 마음이 되었다. 나는 원한으로부터 해탈을 얻었다. 더 이상 원한에 집착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제 하늘나라에 가서 나게 되었다. 이 모두가 그대의 간절한 염불삼매 덕분이다." 말을 마치고는 하늘하늘 날아서 연기처럼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짧은 순간의 일이었다. 민 여인이 산발한 귀녀와 대화하는 모습을 지켜본 모든 사람들은 한결같이 어리둥절해 있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관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민 여인은 한걸음에 관 앞으로 달려들었다. 관을 묶은 매듭을 풀고 뚜껑을 열어 젖혔다.

거기에 백 부사가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수의를 풀어헤쳤다. 그러자 백 부사의 얼굴에 화기가 돌았다. 근육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눈동자에 점차 안정이 깃들어 갔다. 민 여인은 남편 백 부사를 관에서 부축해 그리고 불영사 요사채에 방 하나를 얻어 안정시켰다. 사흘 뒤 백 부사는 완전히 기운을 얻어 관아로 돌아왔다.

이 소식이 강원 감사에게 전해졌고 마침내 중종의 귀에 들어갔다. 중종은 소식을 접하고 만조백관이 있는 자리에서 말했다. "우리와 현재 유교를 근본이념으로 덕을 펴고 나라를 다스리거니와 부처님의 덕화는 참으로 불가사의하도다."  중종은 이어 말했다.

 

"지필묵을 대령하여라. 긴히 쓸 것이 있느니라." 종이와 붓과 먹을 대령하자 중종은 어필로써 불영사의 대웅전 간판을 '환생전'이라 고쳤고, 요사채 큰 방의 현판을 '환희료'라 고쳐 영원히 기념이 되게 하였다.

백 부사는 그 후 1년 뒤 강원 부사로 영전하였고, 다시 얼마 뒤 중앙으로 올라와 내직을 맡게 되었다. 그는 내직에 처하면서도 특별히 불교를 믿도록 허락되었다. 민 여인은 그 후 열심히 부처님을 신봉하였으며, 불영사에 불량답을 사서 시주하고, 또한 그 절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수시로 공양하였다.

 

<동봉스님이 풀어 쓴 불교설화 에서

 

*  조선 숙종 때 : 왕비 인현왕후는 후궁의 모함으로 쫓겨나게 되어 자살하려고 마음을 먹었다.

왕비는 그날 밤 꿈에 한 스님을 만났다. "소승 불영사에서 왔습니다. 내일은 상서롭고 좋은 일이 있을 테니 마음을 돌려먹고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과연 이튿날 후궁의 못된 음모가 탄로나 왕비는 무사히 환궁하게 되었다. 인현왕후는 불은에 감사하는 뜻으로 절산 10리 사방을 하사하였다.

절산 10리 사방의 방대한 부동산은 지금까지도 불영사 소유로 유지되고 있다.

 

* 의상대사가 맨 처음 세웠다는 이 절은 신라 제28대 진덕여왕 5(651)에 창건되었다. 조선조 태조 5년에 소실되어 나한전만 남았다가 이듬해 소설법사가 재건했으나 임진왜란으로 다시 대부분이 소실되고 극락전과 응진전이 겨우 남았다가 광해 원년 성원법사가 다시 재건하여 오늘에 이르는데 현존하는 건물로는 극락전, 응진전이 가장 오래도니 것이며 대웅보전 등 12동의 건물과 창건 당시 유적으로 무영탑과 대웅전 축대 밑의 돌거북 2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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