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성송씨(冶城宋氏) 현령공파(縣令公派)
선조(先祖) 이야기 |
야성송씨 현령공파 종회
(冶城宋氏 縣令公派 宗會)
❏ 시조 야성군(冶城君)으로부터 14세 현령공(縣令公)까지
성씨를 말할 때 흔히 본(本)과 파(派)를 말하게 된다. 본이란 본관(本貫) 또는 관향(貫鄕)이라고도 하며 시조(始祖)가 태어나거나 살던 곳을 나타내는 말이지만, 우리나라의 성(姓)을 말할 때는 반드시 성 앞에 본을 붙여서 말해야 한다.
우리 성을 야성 송씨(冶城 宋氏)로 부르는 것은 야성(冶城)이란 본과 송씨(宋氏)란 성이 합쳐진 말로서 우리 송(宋)씨의 시조(始祖)는 야성(冶城)이란 고을에 살았다는 뜻이다.
성을 말할 때 본을 꼭 붙여 써야 하는 이유는 같은 성씨이면서도 시조가 다른 경우가 매우 많기 때문에, 서로 구별 짓기 위해서이다. 우리 송 씨만 하드라도 여산, 은진, 진천, 김해, 신평 등 열여덟 개의 본이 있고, 김(金)씨나 이(李)씨와 같이 우리나라에서 많이 쓰는 성씨들은 삼백이 넘는 본이 있다고 한다.
파(派)란 파계(派系) 또는 계파(系派)라고도 하며, 같은 본을 가진 사람의 수가 많아졌을 때 갈래 짓기 위한 것으로 만들어졌지만 파가 커지면 또다시 갈라져서 또 다른 파를 이루는 것이 상례이다. 파의 이름은 그 파의 처음 선조의 직함(벼슬)이나 아호를 쓰며, 대개의 경우 이름이 알려진 선조로 되어 있다.
우리 야성 송 씨의 시조는 맹자영자(孟英)로 고려 목종(穆宗 980-1009) 때 간의대부 총부의랑(諫議大夫 摠部議郞)을 지내고 야성군(冶城君)으로 봉(封)해진 분으로, 야성(冶城)이란 당시의 야로현(冶爐縣) 곧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 야로면(陜川郡冶爐面) 일대의 별칭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우리의 본관은 야성(冶城)으로 지금의 경남 합천군 야로면 일대이며 시조께서 이곳에 세거(世居)하셨다는 뜻이다.
그 후 10세(世) 감사공(監司公) 구(構)께서 처음으로 경북 성주의 송천(松川)지금의 초전면 문덕리에 터를 잡아 살게 된 후 14세(世)에 이르러 소(紹), 계(繼), 집(緝), 윤(綸), 회(繪)라 부르는 5형제분들이 다섯 파(派)를 이루게 되는데, 맞분 소(紹)께서 통덕랑으로 사온서의 직장(直長)을 지냈으므로 직장공파(直長公派)로, 둘째 분 계(繼)께서 병절교위 용양위의 상호군(上護軍)을 지냈으므로 상호군공파(上護軍公派)로, 셋째 분 집(緝)께서는 대호군(大護軍)을 지냈으므로 대호군공파(大護軍公派)로, 넷째 분 윤(綸)께서는 통훈대부 좌리공신 영유현령(佐理功臣 永柔縣令)을 지냈으므로 현령공파(縣令公派)로, 끝 분 회(繪)께서는 선전관(宣傳官)을 지냈으므로 선전관공파(宣傳官公派)로, 14세(世)에서 다섯 개 파로 나뉘어졌다.
직장공파의 후손은 경북 성주(星州) 지역에서, 상호군공파의 후손은 경남 산청(山淸)에서, 대호군공파의 후손은 대구(大邱) 부근에서, 현령공파의 후손은 경북 영주(榮州) 일대에서, 선전관공파의 후손은 경북 칠곡(漆谷)등지에 분포되고 있다.
❏ 영주(榮州)가 현령공파(縣令公派)의 세거지(世居地)가 된 유래
현령공파가 야성 송씨 14세에서 갈린 5개 파 중 제4파이고, 현령공 윤(綸)께서 파조(派祖)이시며, 그리고 10세 감사공(監司公) 이후 경북 성주를 세거지로 삼았다는 것은 앞에서 기술한 바이나, 10세 감사공 구(構)께서 가정대부 경기감사(嘉靖大夫 京畿監司)를 지냈고, 11세 길창(吉昌)께서도 가선대부 개성윤(嘉善大夫 開城尹)을 지냈으며, 12세 천우(千祐)께는 통정대부 판결사(通政大夫 判決事)를, 그리고 13세 수겸(守謙)께서 선교랑 진잠현감(宣敎郞 鎭岑縣監)을 지냈으므로 벼슬길에 있을 때는 그 때마다 세거지 성주가 아닌 곳 즉 개성,한성등 수도(首都)이거나 기타 지방 임지(任地)에서 거처하였음이 짐작된다.
현령공 윤(綸)께서는 자(字)를 윤언(允言), 호(號)를 경산자(京山子) 또는 청계(淸溪)라 쓰셨고, 필법(筆法) 특히 전서(篆書)에 뛰어나 금강전첩(金剛篆帖)을 남겼으며, 성주를 떠나 한성 호현방(漢城 好賢坊) 지금의 서울 중구 회현동에서 거처하셨다. 그리고 세조 3년(1458년)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돈영부의 주부(主簿), 문의현(文義縣)의 현령(縣令), 사복시(司僕시)의 주부, 개성(開城)의 경력(經歷), 다시 영유현(永柔縣)의 현령을 지냈으며, 성종 2년(1471년)에 좌리훈(佐理勳)을 받은바 있다. 숙부인(淑夫人) 청주 한(韓) 씨는 영의정 관수정 창(觀水亭 昌)의 따님이시며 예종비인 안순왕후 한씨(安順王后 韓氏)의 고모이기도 하다.
현령공께서는 독자(獨子)인 석충(碩忠)과 공인달(孔仁達), 이몽석(李夢石), 손덕원(孫德源), 소희식(蘇希軾)에 출가한 네 따님을 두셨는데, 아무런 연고도 없는 영남 땅 영주(榮州,당시는 강주剛州)로 연산군 4년(1498년) 무오사화를 피해 내려온 이가 바로 눌재 선생(訥齋先生) 석충(碩忠) 선조이시다.
현령공파의 영주 세거는 지금으로부터 514년 전(1498년) 이때부터 시작 되었다.
23세에 생원시에 합격, 청운의 뜻을 품고 성균관의 유생이 되었으며, 26세 때는 김한훤, 최금남, 박영천, 신숭양등 당시 젊은 유학자들과 정지교부계회(情志交孚契會)를 맺아 경사(經史)을 강론하고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선생의 문하생이 되었던 사실 하나가 피신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될 줄이야!
너무나 혼미한 왕조라 6년 뒤에 일어난 갑자사화를 거치면 꿈많던 젊은 학자 대부분이 숙청당한 것을 생각하면 영남으로의 피신은 실로 눌재(訥齋)선조의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던가싶다.
❏ 영주의 입향조(入鄕祖) 눌재선생(訥齋先生)
선생의 휘(諱)는 석충(碩忠), 자는 원로(元老), 호는 눌재(訥齋)로 단종 2년 (1454년) 5월 28일 한성 호현방의 본집에서 태어나셨다.
1474년 상호군 희철(希哲)의 따님인 옥천 전씨(沃川 全氏)를 아내로 맞았고, 엄(儼), 의(儀), 간(侃), 칭(偁)의 네 아드님과 이준근(李埈根), 안배곤(安配坤), 권오기(權五紀)에 출가한 세 따님을 두셨다.
1477년 생원시(生員試)에 3등으로 합격 하셨고, 선생이 호현방에 사실 때 한훤당 김선생(寒喧堂 金先生)이 이사를 와서 두 분은 일찍부터 가까이 지내게 되었고 점필재 김선생(佔畢齋 金先生)문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하였다.
1480년에는 한훤당 김선생 외 세분과 정지교부계(情志交孚契)를 맺고 춘추로 호현방(현충무로) 서재에서 경사(經史)를 강론하고 도의를 연마하였다.
선생은 일찍이 “말은 충성스럽고 신의가 있어야 하며 행실은 독실하고 공손하게 하는 것이 수신하는 첫째의 방법이 될 것”이란 뜻의 “언충신(言忠信) 행독경(行篤敬)”을 써 붙여 놓고 자경문(自警文)으로 삼았고, “말은 느리게 하고 행동은 민첩하게 하는 것이 옛 사람들의 수신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나는 행동은 민첩하지 못하더라도 말을 참는 것은 가능하다”라고 하며 편액을 ‘눌재-눌옹(訥齋-訥翁)’이라고 하였다.
선생은 본래 사족(士族) 집안에서 태어나 그 인척들도 모두 대대로 나라에 공훈이 있는 집들이 엇으므로 조정에는 많은 친척들이 있었지만 두문불출 하며 부귀를 누리는 자제들과는 사귀질 않았다.
당시 한훤당선생이 후진 양성에 몰두할 때 사방에서 쏟아지는 비방의 소리를 듣고 후진 양성을 중단할 것을 권고 하고는 신병을 핑계 삼아 영주로 이사하였다.
선생이 낙향한 후 은둔 생활로 세상을 등지고 살고 있을 때 출사할 것을 종용받았으나 끝내 “나는 말도 잘 하지 못하고 몸도 병이 들어 벼슬을 할 수 없다”고 사양하며 끝내 불응 하였다.
갑자사화(1504년)가 일어나 김한훤, 최금남등 가까운 현사들이 참화를 당하자 선생은 문을 닫고 혼자 슬퍼하며 더욱 자취를 숨기고 살다가 세상을 마침에 사람들은 누차 사화를 겪으면서 그들의 모함을 벗어남으로 선생의 명석한 처세에 탄복하였다.
1524년 1월 초7일 향년 71세로 휴천리 본댁에서 작고 하셨고, 묘소는 평은면 괴동(平恩面 槐洞)에 모셨으며 4년 뒤 역시 71세로 작고한 부인 옥천 전씨도 선생 묘역 좌측에 부장 하였다.
❏ 영주 4개 파(派)로 분파(分派)
영주의 4개 파는 선생의 아드님 4형제로 이루어지니 곧 첨추공파, 참의공파, 내금위공파, 사직공파 또는 별칭으로 종파, 2파, 3파, 4파라 부르며 다시 26개의 세파(細派)로 나뉘어 지금에 이른다. 총 세대수는 3.000여세대로 추정되며 적은 수는 아니다.
선생은 4명의 아들에, 13명의 손자, 26명의 증손자, 57명의 현손자, 그리고 107명 의 5세손을 두었으니, 번족하기를 하늘에 별과같이 번성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모두 선생의 음덕(蔭德)으로 여겨 마땅하다.
❏ 현령공(縣令公)의 묘지 실전(失傳)
15세 눌재선생이 무오사화(1498년)를 피해 영남의 영주 땅으로 내려와 은둔생활을 하는 동안 “한성 금천 신림역 한유동”(漢城黔川新林驛閒有洞)에 모셨던 현령공 내외분의. 묘소를 실전(失傳)하고 말았다. 이는 실로 애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기록에 의하면 마지막 성묘로 선조 9년 (1576년, 만력 병자)
2월경 공의 증손인 매포(梅浦)송복기(宋福基)께서 사마시(司馬試)를 보러 갔던 길에 성묘하고 운(詩)을 남긴 것이 있으니, 눌재 선생이 낙향한 후로 치면 78년째요, 지금으로부터 치면 436년 전의 일이다.
지금은 평은면 괴동(槐洞)에 망묘단(望墓壇)을 설단하고 춘추(春秋)로 부자(父子) 분을 제향하고 있다. ( 2012. 3. 10. 현령공 18세손 준태 엮음 )
'뿌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난을 당한 야성송씨종회 소유 느티나무 (0) | 2013.07.04 |
---|---|
[스크랩] 괴동재사 경북도 문화자료 등록안내 (0) | 2012.10.01 |
[스크랩] 83살 송시열이 사약을 받은 까닭은? (0) | 2012.08.24 |
2011년 재구종친회 정기총회모습 일부 (0) | 2011.05.26 |
[스크랩] 야성송씨종회소유 임야의 보호수 느티나무 이전 소식 (0) | 2011.04.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