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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년만에 정지교부계(情志交孚契) 후손들이 만나다.

공간(空間) 2024. 2. 22. 23:26

《*모셔온글》

 

500년만에 정지교부계(情志交孚契) 후손들이 만나다.

[출처] 500년만에 정지교부계(情志交孚契) 후손들이 만나다. 작성자 맑은생각

 

0134 18일 목요일 낮 12.

지금으로부터  533년전 옛 선현들을 기억하는 우리 세대에 흔치 않은 모임이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 섬유센터빌딩 2층에서 열렸다.

 

1480(성종11) 경자(庚子)년 유월 초엿새날.

성균관 유생 신분이던 한훤당 김굉필(1454~1504) 선생이 27세 때,

나이가 같고 도 같아 정과 뜻을 서로 믿고 교류하셨던 다섯 분

[생원 송석충(宋碩忠), 진사 최부(崔簿), 진사 박담손(朴聃孫), 진사 신희연(申希演)]

선생의 한성(漢城) 호현방(好賢坊) (지금의 서울 중구 회현동) 서재에 모여

정지교부계(情志交孚契)를 만들어 이날 첫모임을 가졌고,

계회도의 그림이 야성송씨(冶城宋氏) 문중 후손들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533년이 지난 20134, 당시 모임에 참석한 다섯 문중의 종손들이 모였다.

고령신씨(高靈申氏) 숭양(嵩陽)선생 주손 신홍순(申弘淳) CMG()컬처마케팅그룹 고문.

신구순(申龜淳) 고령신씨순창공파(淳昌公派) 숭문회 총무.

야성송씨(冶城宋氏) 현령공파(縣令公派) 눌재(訥齋)선생 종손 송강선(宋康善).

탐진최씨 강진종중(耽津崔氏 康津宗中) 금남(錦南)선생 종손 최동식(崔東植).

고령박씨(高靈朴氏) 영천(靈川)선생 종회장 박용만(朴鏞晩)씨가 참석했고,

서흥김씨(瑞興金氏) 문중에서는 한훤당 종택에서 백용(栢容) 차종손이 참석했고,

병국(炳國) 사무총장과 기후(基後) 서흥김씨대종보편집주간이 동석했다.

 

 

이 모임을 주선한 신홍순 고문은  선현들의 족적을 살펴보고 흩어진 자료와

기록들을 발굴하여 500년이 지난 후손들의 손으로 선조님들의 큰 뜻을 후세에

남겼으면 좋겠다는 뜻을 밝혔다.  

참석자들은 정지교부계의 첫 모임이 열렸던 유월 초엿새날에 다시 모이기로

하고 첫 모임을 마쳤다

 

경현록에는

한훤당선현의 유서로 정지교부계회도 (情志交孚契會圖)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전한다.

 

정지교부계회도(情志交孚契會圖)

정과 뜻이 어울려 맞는 계회의 그림

 

* 생원 김굉필(金宏弼 자 대유 갑술생본관 서흥현풍 거주

  아버지 어모장군 전 행충좌위호군 유()

 

* 생원 송석충(宋碩忠 자 원로 갑술생본관 야성(冶城영천 거주

  아버지 통훈대부 돈녕부 주부 윤()

 

* 진사 최 부(崔溥 자 언박갑술생본관 탐진(耽津나주 거주

  아버지 성균진사 택()

 

* 진사 박담손(朴聃孫 자 이수을해생본관 고령 ○○거주

  아버지 봉렬대부 행교하현감 수림(秀林)

 

* 진사 신희연(申希演 자 원량 을해생본관 고령 한성 거주

  아버지 어모장군 행충좌위호군 환()

 

우리들은 나이가 서로 같고 도가 서로 같아 정과 뜻이 서로 미덥게 되었다.

경자년 유월 초엿샛날 대유(大猷)의 초당[茆齋 * 1]에 모여서 이 계를 만들었다.

부모와 자신의 초상에는 부의(賻儀)를 베 한 필로 하고 ,

처부모와 처의 초상에는 종이[한 권으로 정하고 ,

색장(色掌 *2)은 돌려 가면서 할 것이며계회는 봄가을에 하되 색장이 준비할 것.

 

*1, 초당[茆齋 초가집 서재[茅齋]와 같음

*2, 색장(色掌 ()의 유사(有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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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禹(* 1) 淸和(* 2) 下澣(* 3)

後學豊山金應祖謹識

生員祖主五代孫 峕雍拜手謹篆

 

신묘년 사월 하순에

후학 풍산 김응조는 삼가 기록함

생원 할아버님 오대손 시옹은 절하오며 전자[]를 씀

 

대저 사람들의 정과 뜻은 반드시 착한 이와 착한 이끼리 서로 미덥게 된다그런즉어진 사람과 서로 미덥게 지낸다면 그 역시 어진 사람이다지금 이 그림을 놓고 보건대 한훤당 김선생을 첫머리에 쓰고 그 그림을 정지교부도(情志交孚圖)라 하였고그 끝에 말하기를 ()가 서로 같다.하였으니사현(四賢)의 도()가 한훤당 선생과 서로 미더웠음을 알 수 있다그가 도로써 어진 분과 미더웠으니어진 자가 아니고 무엇이랴.

 

아아사람은 없어졌고 시대는 멀어졌다이 그림이 송씨(宋氏)의 종가에 간직한 지 백여년에 헐었고 흐려진 지 오래였다송동지(宋同知대진(大振씨는 곧 송상사(宋上舍)의 후손인데마침내 이를 개탄하여 수리해서 새롭게 하였으니대저 선대의 유적(遺跡)이 장차 전하여지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그것을 오래도록 전하기를 도모한 것이다.

 

옛 유적을 어루만지니 완연히 어제 일과 같도다이 그림을 보는 이는 선정(先正)의 유풍(遺風)을 느낌 깊게 슬피 상상하고 사모하지 아니할 자 있으랴하물며 그림이 이미 백여 년 뒤에 다시 새롭게 다듬어졌으니이 뒤 백년천년에 또 어찌 다시 새롭게 다듬는 자가 없으랴이 그림이 만대(萬代), 억대(億代)에 전하여 폐기(廢棄)되지 않을 것임이 의심 없다선유(先儒)가 말하기를 먼 조상(祖上)은 소홀히 알기 쉬운 것인데능히 이를 추모하는 것은 지극히 후()한 도리(道理).하였는데송씨(宋氏)야말로 바로 그러한 분이로다.

 

*1  白禹  신묘(辛卯)와 같음은 흰빛에 속하고  토끼임.

*2  淸和  사월을 가리킴

*3  下澣  하순(下旬)과 같음옛날 중국의 궁중에서 임금을 모시는 벼슬 을 하는 사람에게

       10일 만에 집에 나가 옷을 빨아[입는 휴가를 주었으므로,

       한 달을 상한(上澣), 중한(中澣), 하한(下澣)으로 나누었음.

 

출처  : 國譯景賢錄全 景賢附錄上  422-425

 

 

눌옹선생유사(訥翁先生遺事)

 

訥翁 宋碩忠(1454-1524) 遺文과 관련 기록을 모은 實紀‚ 1 50木版本이다.

후손  宋弘濟金宏弼實紀 景賢錄의 체제를 따라 편집했으며‚ 1813 (純祖 13)에 간행하였다卷首에는 金㙆黃龍漢‚ 卷末에는  宋應望 이 각각 수록되어 있다.

 

송석충은 본관이 冶城으로‚   ‚  이며‚ 金宗直門人이다. 1477 년 생원시에 급제하였고 1480년에는 金宏弼‚ 崔溥‚ 朴聃孫‚ 申希演과 함께  情志交孚契를 결성하여 교유하였다평소 김굉필에게 제자를 기르지 말라고 충고하는 등 은거할 뜻을 보였는데‚ 결국 벼슬의 뜻을 버리고 榮川으로 내려갔다무오사화가 일어나 김굉필과 그 제자들이 화를 입게 되자‚ 송석충은 자신의 저술을 불태우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더이상 人間事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고 한다. 1786 (正祖 10) 山泉書院 配享 되었다. 실기의 구성은 目錄‚ 世系‚ 子孫錄‚ 事實‚ 遺文과 관련 자료의 순서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는  景賢錄의 체제를 따른 것이다.

 

遺文으로는 1(輓韓毅庵 : 7)4편 및  試券 1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剪燈餘話跋耕織圖記八分書識 등의 글에서 八分體 書體에 대한 관심이 확인되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4편중 2편은 권말의 遺墨과 같은 내용이다이 밖에 禹錫鼎등이 송석충에게 준 贈別詩 3‚ 여러 문헌에서 송석충의 언행과 관련된 기록을 초록한 敍述‚ 景賢錄에서 발췌한  情志交孚契會圖  契會影幀‚ 墓碣(朴承任 撰)‚ 行狀(鄭宗魯 撰)‚ 輓詞 祭文(李秀亨 撰등이 수록되어 있다隱士로서의 송석충의 행적은 이 자료들에서 잘 드러나고 있는데‚ 집에 ’ 한 글자를 써 두었다거나  墓碣銘이나 輓詩를 청탁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긴 것 등이 그 예가 될 만하다卷末에 있는 師友錄에는 金宗直‚ 金宏弼 30인의 字號와 간략한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출처 :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500년만에 정지교부계(情志交孚契) 후손들이 만나다.

[출처] 500년만에 정지교부계(情志交孚契) 후손들이 만나다. 작성자 맑은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