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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성주 백세각(百世閣) 송희규(宋希奎) 선생과 전북 완주군(全北 完州郡)

공간(空間) 2023. 6. 21. 21:23

유배지

경북 성주 백세각(百世閣) 송희규(宋希奎) 선생과 전북 완주군(全北 完州郡)

사랑방 이야기

2012/12/13 0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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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접힌 새야

높은 산 날아 오를 그 날아

고산(高山) 백도리 유배지에서

경북 성주 백세각 송희규(百世閣 宋希奎선생과 전북 완주군

귀양살이! 즐거운 이야기는 아니다. 경북 청송 하면 연상되는 것이 감호소이듯, 귀양살이하는 곳(오는 곳)이라면 특별한 곳이다. 변방이나, (絶島)으로 가기도 하고, 중도부처(中道付處)라 해서 내려가다가 머물게 하는 경우가 있다.

허균이가 함열에 귀양 왔듯이 고산현에도 귀양지가 있어 중도부처하였던 곳이다.

 

1. 어느 곳이었나?

유배지로서 중도부처(中道付處)’할 곳의 조건은 세 가지에 맞을수록 좋다. 첫째, 큰 길에서 멀지 않은 고을둘째, 묻히면(갇히면) 벗어나기 어려운 깊은 산골(오지), 셋째 감시 관리하기 편한 곳을 고르게 되었다.

그렇다면 고산현(高山縣)에서 이런 곳이 어디였을가?

오늘날 비봉면(당시는 서면) 백도리(百島里). 백도리의 우리 이름은 온 섬이다. 어떤 이는 지명에 (-)’가 있어 으로 알고 보냈다는 말을 한다. 그러나 백도리는 위의 요건을 갖춘 곳이었으므로 적소(謫所:죄인이 귀양살이 하는 곳)로서 적합하였다.

 

2. 적소로 얼머나 좋은 곳인가?

서울에서 충청도를 지나면 전라도다. 500리 길이다. 여산에서 삼례원동앵곡금구→…로 내려가 절도로 가기에는 아직도 멀다. 고산현(高山縣)! 집행자들은 이름 자체가 고산(高山) 높은 산이라 유배지(流配地)로서 위압감을 주는 데도 좋았다.

여산에서 삼례로 가는 동쪽은 장산(長山) 줄기이다. 여산 원수리에서 숯 고개를 넘으면 남도로 가지만 원수리왼편 첫째 고개를 넘으면 용남 방죽이다. 여기에서 마주 보이는 산줄기 둘째 고개 솔티재를 넘으면 고산현땅이다. 더 깊은 곳을 생각하며 동편으로 고불고불 셋쩨 고개 뱀재(蛇峙)’를 넘자 현내(縣內)마을이다. 이마에 산이 닿을 정도로 첩첩 산중이다. 네 번째 고개를 넘자 붉은 바위앞이다. 후미진 곳 북쪽으로 개울을 따라 오르니 적소로서 이름도 좋은 백도리(온섬)’ 육지 속의 섬이다. 이쯤 되면 꼼짝 못하는 귀양살이 터로 적소(適所)이다. 북쪽에서 골을 따라 내려 쏟는 찬바람이 산수갑산(山水甲山)을 무색케 하는 돌풍의 골짜기다.

동쪽 앞산은 성뫼산(성산:394m), 남쪽 들어온 길목이 현내마을’(內衙 사람이 있는 곳)이다. 반대 방향 가까이에는 수경산(水峰山)과 천호산(天壺山:501m)이니 호리병 같은 산듣기만 해도 오싹하는 심산유곡이다. 왕명이라 거역하지 않지만 도망가라 한들 나는 새(飛鳳)가 아니면 꼼작 달싹도 못하는 오지다.

문두러미재(실은 누운 두루미 재)’를 넘으면 여산 땅이지만 멀고 험하여 엄두도 못내는 곳이다.

 

3. 귀양 온 분들

1) 송희규(宋希奎:1494-1558)

본관은 합천 야성(冶城), 자는 천장(天章), 호는 야계산옹(倻溪散翁)이다. 소윤 윤원형(명종의 외숙)과 대윤(인종의 외숙 尹任)이 대립하여 일어난 불상사가

을사사화이다.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15479월 이 일과 관련된 양제역 벽서 사건이 터지자

송희규 선생도 화를 입었다. 3인은 사약, 셋은 변방에 안치,

8인은 변방에 부처하고, 4인은 절도에 보냈으며,

선생 등 14인은 도중부처(道中付處)하였는데

그 때 송희규 선생(54)이 온 곳이 고산현(高山縣) 백도리이다.

58살 풀려날 때까지 5년간 유배생활을 하는 가운데 1549(56)에는

처소를 양정(養正)’이라 이름짓고 제생들과 강학을 계속하였다.

이러자 고을 선비들이 따라서 수학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송희규 선생은 사면된 뒤 고향에 돌아가 고산정(高山亭)을 세웠고,

환난을 잊지 않기(不忘患難) 위하여 마을 이름을 高山里라 하였다.

우유자적 불복취사(優遊自適 不復就仕/벼슬 길에 나서지 않고

조용히 사다)를 결심하고 세운 집이 고택(古宅) ‘백세각(百世閣)’이다.

천세(千世), 만세(萬世)도 있는데 왜 백세(百世)일까?

고산 백도리(百島里)’()자를 떠올려서 백세각(百世閣)’이 아닌지.

백세각(百世閣)”백도리(百島里) 때의세상(世上)생각하는

 ()의 뜻을 함축하는 집인듯하다.

규모와 짜임새가 입구()자 형이다. 이는 백세각(百世閣)’의 세 글자가

모두 네모졌다.

여기에 맞추어 입구()자형을 택한 듯하다. 이 건물이 있고 세손[송인수]

사는 곳이 바로 경북 성주군 초전면 고산리(慶北 星州郡 草田面 高山里)이다.

 

1785년 송희규 선생을 모신 서원을 세웠는데 봉강서원(鳳岡書院)’이다.

봉강(鳳岡)이 고초를 이겼던 고산현의 비봉산(飛鳳山)’에서 ()’만 빼고 ()’을 같은 뜻의 ()’자로 바꾼 것이라면 무조건적인 조상숭배가 아니라

대단한 배려를 하는 씨족임을 알 수 있다.

이 지역 선비들 역시 훌륭하다.

참봉 정위(鄭煒)봉강서원에 봉안한 글의 일부다. [문집 p205]

 

천리길 고산으로 유배되었으니 千里高山(천리고산)

바른 사람 적소에서 신음하였네 正人吟鵩(정인음복)

 

시호 받음을 추모하는 참판 강난형(姜蘭馨)의 시는 이렇다. [문집 p226]

 

이곳 고산에선 오히려 크게 앙모하니 此地高山猶景仰(차지고산유경앙)

()을 이루는 것은 사생으로 말하지 않는다. 成仁不以死生論(성인불이사생론)

 

시호 내림을 보고 좌의정 유후조(柳厚祚)는 선생에 대해 이런 표현을 하였다. [문집 p209]

壁書又上 蒼茫問行 我有林廬 庶送餘日

벽서우상 창망문행 아유임려 서송여일

[양재역의 벽서를 (간당들이) 또 올렸으니

창망하게 갈 길을 물었도다

나에게는 숲속에 집이 있어

여생을 보낼만 하노라]

 

승지 김익용(金益容)의 시다. [문집 p227]

고산의 옛 사당에서 백성들도 울었으니 高山舊社泣黎元(고산구사읍려원)

하물며 선생의 자손들이야 어떠했으랴 況是先生子若孫(항시선생자약손)

 

정려를 중수할 때 참봉 이승희(李承熙)의 고유 문에 있는 말이다. [문집 p211]

 

귀양살이 5년 동안 炎荒五載(염황오재)

양옥은 더욱 빛났다. 良玉彌光(양옥미광)

 

이 밖의 관련 기사는 표로 만들어 본다.

구분 페이지 지은이 참고
이력 161 被謫于高山縣 宋惟敬 손자
행장 164 事竄高山辛亥蒙 金就文 전 감사
묘지 171 謫于高山辛亥放還 金就文 전 청송부사
묘비명 175 事責高山縣居五歲 李玄逸 이조판서
시장 200 付處高山辛亥宥還 김병학 관상감 사
정려 중수기 220 論者不己斥高山縣 張升澤 후학
시호 226 從古高山仰止處 韓傾源 참판
봉강서당
상량문
216 蒼鬱高山入望通 宋鴻翼 생원 사손
문집 278 丁未追論竄于高山五載蒙 東國名臣錄
문집 283 乙未追論乙巳事竄高山
五載放還'
京山誌
문집 293 宋執義曾主公議而謫高山

문집 해제 12 고산으로 유배되었다. 宋載邵 19대손

 

눈물과 한숨을 본 백도리에는 흔적이 없으나, 눈길에서 멀어진

산간벽지(보잘것없는) ‘고산(高山)’460년 역사를 뛰어넘어 경북 성주에서 꽃피고 있다.

송희규 선생을 짧게 표현한 계일록(繼一錄 p264)을 보면 외모가 왜소하였다.

(形貌短小)

그러나 단호하였다. “내 살점을 점점이 베어 가질지언정 어찌 간사한 모의를 받아들이리오. 따르지 않겠다. (吾肉點點割取 安以受之刑 議不可從-오육점점할취 안이수지형 의불가종)

송희규 집의는 내 머리는 부술 수 있고, 내 뼈는 갈 수 있어도 내 뜻은 빼앗지 못할 것이다”.라 외쳤다. (希奎曰 吾頭可碎 吾骨可磨 吾志不可奪-희규왈 오두가쇄 오골가마 오지불가탈‘ : p 192)

시호를 청하는 참판 許傳의 글로 보아 강직함을 알 수 있다.

 

당시 고산현의 씨족과 입향조는 다음과 같다.

씨 족 입 향 조 낳 음 벼 슬 참 고
1 제주고씨 고인충 高仁忠 고려 공민왕조 司直 문장 명필
2 기계유씨 유성보 兪成保 고려말 書雲監 副正 굶어 죽다
3 교동인씨 인수손 印守孫
朔州 府使
4 담양국씨 국거경 鞠居敬
呂陽 監務
5 고령김씨 김영구 金盈九 서기 1437 庇仁縣監 장가 조을정 녀
6 능성구씨 구신동 具信童
沃溝縣監 김영구와 동서
7 낙안오씨 오 관 吳 寬
成均 進士
8 진주임씨 임천수 任千壽 서기 1504 厚陵 參奉
9 전주최씨 최사종 崔嗣宗 중종조 吏曹參判
10 김해김씨 김도손 金道孫

무오사화
11 평택임씨 임 육 林 堉
蔭 郡守 운제에서 살다
12 밀양박씨 박세정 朴世貞
平市署 直長
13 성주이씨 이신행 李愼行
全羅都事
14 전주이씨 이엇금 李旕金 서기1505 通政大夫
15 광주이씨 이 성 李 誠 서기1517

 

송희규 선생과 관련되 자료가 있다면 이 열다섯 집안에서 나와야 하는데

찾을 길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성주군 초전면 고산리 백세각

고산 역사 규명에 귀중한 존재이다.

 

2) 정경세(鄭經世 1563-1633)

1563년생이다. 진주 정씨로 자는 경임(景任) 호는 우복(愚伏)이다.

서해 류성룡의 문인이다. 이조판서를 지냈으며 시호가 문장(文莊)이다.

이진길(李震吉), 김직제(金直哉:소북파가 대북파에 의해 처벌을 받은 사건),

김몽호(金夢虎) 사건으로 곤혹을 당했다.

광해군 때 정인홍과 틈이 벌어저 하옥되었다가 귀양가 고산현 백도리 산속에서

독서로 6년을 보냈다.

인조반정으로 부제학, 대사헌을 거처 이조판서 겸 대제학에 이르렀다.

백도리 귀양 때의 시가 있다.

賦命每憐三不幸(부명매련삼불행)

行身何啻七宜休(행신하시칠의휴)

東華久作紅塵客(동화구작홍진객)

欲向丹丘訪道流(욕향단구방도유)

 

<가련다! 타고난 세 차례 불행이여

아마도 이 꼴로 7년쯤 지나야겠지

동인들이 저질러 티끌 된 나그네가

속에 둔 신선이 머물곳 야기였구나>

 

3) 배무천 (裵茂天)

자는 중부 성산인이다. 무과에 급제 선전관을 하였다. 병자 척화소를 올렸다가

결국 백도리에 귀양왔다. 후손들이 이곳에서 살게 되었다.

 

4. 이름으로 본 이 지역

1)자암(紫岩)

우리말로 붉은 바위. ‘붉은 바위 마을도 있다. 바위가 붉어서 붉은 바위인가? 귀양살이를 들고 나며 이 바위를 볼 때 마다 나의 붉은 마음(一片丹心)은 저 바위처럼 변함 이 없다는 결심이 아로 새겨진 바위로 이름과 함께 남아 있다.

 

2)수봉산(水峰山)

능바위뒷산이 수봉산이다. 흔들리지 말고, 편안한 마음으로

잘 참자고 다짐하지만, 때로는 울분이 치솟는다.

이때의 분노는 자학으로 바뀐다. 아니 모두 죽자(공멸)!’로 악화된다.

물아! 차라리 저 봉우리를 덮어다오라 하던 자포 자지의 외침이

수봉산을 있게 한다.

 

3) 사곡천(舍谷川)

수봉산 물이 능암 방죽에 모였다가 흐르는 내를 말한다.

사곡(舍谷)집들이 있는 골짜기란 뜻이다.

사람 사는 곳엔 집이 있다. 유독 백도리에만 집이 있는 것이 아닌데

사곡(舍谷)‘일가? 이는 특별한 사람

귀양 온 분들의 이 있는 골짜기란 뜻이 있다.

유배지이므로 이와 관련하여 의문을 가져 본다.

사곡천(舍谷川)()’()’자가 비슷하여

<함곡천(含谷川)>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본다.

한을 은 골짜기의 내란 말이 된다.

()’()’으로 쓰면 한을 품고 울은 내

함곡천(含哭川)일 가능성이 높다.

()’()’의 오자(誤字)라 하여도 뜻은 마찬가지다.

 

4) 비봉산(飛鳳山)

비봉산은 산 하나를 가리키는 고유명사이기도 하지만,

많은 산을 가리키는 보통명사 일 수도 있다. 귀양 온 분들의 눈으로 보기에

이 고장은 나르는 새(飛鳳)’가 아니면 빠져나갈 수 없는 고장이었다.

고산 비봉(高山飛鳳)’ “산이 높아 새나 날아갈 수 있는 곳으로 비첬던 것이다.

 

5) 능바위(能岩)

능력 있으면 이 바위산을 넘어 보라! 할 정도로 막다른 골짜기의

땅 이름임과 동시에 절망적인 사람들에게는

이곳을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을 주시오!’ 소망을 비는 대상이었다.

 

5. 백도리의 어제와 오늘

옛날에는 서면(西面)이라 불렀고 지금은 비봉면이다.

비봉면에서 가장 큰 마을로 한때는 80호가 넘었다.

 귀양 왔다가 주저앉은 사람이 있고, 난리가 나면 이 산속을 찾아 피난 온 사람도 있다. 두문동 72인의 후손답게 담양국씨가 많이 산다.

주민들은 귀양 온 분들의 영향을 받아 학문과 이재에 밝아 부자(?) 마을이었다.

국영호씨는 일본중앙대학에 유학(3년 중퇴)하였고,

이리에서 흥아공업 사장으로 돈을 벌어 국회의원에 출마(35)하기도 하였다. 면장(신용석)도 나왔고, 고려대학교를 졸업 지방지 편집국장(김대원)을 한 인사가 있다는 것은 이런 역사의 영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비록 죄명을 쓰고 왔지만 정치범이고 의식이 있는 사람들이었으므로

지역에 미친 영향이 많았다.

안타까운 것은 죄인(?)과의 접촉이라 후환이 두려웠던지

문헌과 자료가 없는 것이 안타깝다.

<참고 자료>

ㅇ고산지

ㅇ야계선생 문집

ㅇ원고산 현행정구도

ㅇ원고산현 지세도

ㅇ완주군사

ㅇ완주군지

ㅇ전주시사

ㅇ익산군지

ㅇ이리시사

<필지:esc2691@naver.com)

[출처]경북 성주 백세각(百世閣) 송희규(宋希奎) 선생과 전북 완주군(全北 完州郡)|작성자유하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