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河(산하) : <여행>

傳仇衡王陵(전구형왕릉)

공간(空間) 2016. 5. 18. 20:20

傳仇衡王陵(전구형왕릉)

 

이 능은 가야 마지막 왕으로 제10대 임금인 구형왕(仇衡王)의 능이라고 전해오는 석능이다.

1971년 사적 제214호로 지정 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돌을 계단식으로 쌓아올린 한국식 피라미드이다. 경사진 산비탈을 그대로 이용하여 삼태기 모양의 너른 묘역과 거대한 돌무더기를 형성하고 있다.

일반적인 봉토무덤과는 다른 형태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내리는 경사면에 크고 작은 돌을 7단으로 쌓아올려 층과 단을 이루고 있으며, 정상부는 타원형이다.

앞면 전체의 높이가 7.15m, 최하단의 길이 20.6m, 4단 동쪽면 중앙에 가로 40cm, 세로 40cm, 길이 68cm의 감실형태의 시설이 마련되어 있으나 내용물은 없다.

석릉 앞에 가락국양왕릉(駕洛國讓王陵)’이라 새긴 비석과 더불어 장명등, 문인석, 무인석돌짐승 등의 석물은 후대에 배치된 것이다.

 

 

 

仇衡王陵(구형왕릉)

가락국 마지막왕 "구형왕릉"

국가지정 사적 제214(‘71. 2. 9) 

한국에도 피라미드와 같은 형태의 무덤이 있습니다.

그 무덤의 주인공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가야시대의 구형왕릉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구형왕은 구충왕(仇衝王) 또는 구해왕(仇亥王)이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겸지왕이며, 어머니는 각간(角干) 출충(出忠)의 딸인 숙()이다김유신의 증조부이기도 하다.

521년 가야의 왕이 되어 532년 신라 법흥왕에게 영토를 넘겨줄 때까지 11년간 왕으로 있었던 인물이었습니다

 

 

 

 

 

"가야왕조계보"  

왕명 재위기간 약사  :

 

1 수로왕(首露, 42~199) 42~199 42년 알에서 낳아서 곧 즉위. 아유타국(인도의 한 국가)  공주 허황옥과 결혼함

2 거등왕(居登, ?~253) 199~259 수로왕의 아들. 어머니는 허황옥

3 마품왕(麻品, ?~291) 259~291 거등왕의 아들

4 거질미왕(居叱彌, ?~346) 291~346 마품왕의 아들.

5 이시품왕(伊尸品, ?~407) 346~407 거질미왕의 아들

6 좌지왕(坐知, ?~421) 407~421 이시품왕의 아들. 금토왕(金吐王), 김질(金叱). 왕비 용녀의 사람들을

   관리로 등용하여 시끄러웠다. 후에 왕비를 귀양 보내고 백성을 편안히 다스렸다.

7 취희왕(吹希, ?~451) 421~451 좌지왕의 아들. 질가(叱嘉)

8 질지왕(?~492) 451~492 취희왕의 아들

9 겸지왕(鉗知, ?~521) 492~521 질지왕의 아들.

10 구형왕(仇衡, ?) 521~532 겸지왕의 아들. 신라 진흥왕이 쳐들어오자 영토를 바치고 귀순함  

 

구형왕릉의 바로 앞에는 산이 있고, 그 가운데 바위가 있는데 바위 중간쯤에 사각문처럼 돌을 열었다 닫을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고, 그 안으로 구형왕과 관련된 유물들이 묻혀 있을지도 모른다고 한다.

바위 한쪽에 김해김이라고 적혀있는 글씨도 보이구요.

하지만 김해김씨 후손들이 발굴을 원치 않아 그대로 두었다고 한다.

 

피라미드식인 구형왕릉이 있는 곳에는 새들도 바로 위로 지나가지 않고, 낙엽도 들지 않고이끼나 어떠한 풀도 자라지 않는다고 한다그 만큼 신비한 기운이 가득한 곳이다.

 

 

 

가락국의 전설을 안고 있는 왕산 자락에 있는 구형왕릉은 가야의 마지막 인 구형왕의 무덤으로 전해 오는 능이다. 대한민국 유일의 적석총인 구현왕릉은 피라미드형 7단으로 쌓여 있다. 구형왕은 김유신의 할아버지이며 521년 가야의 왕이 되어 532년 신라 법흥왕에게 영토를 넘겨줄 때까지 11년간 왕으로 있었던 인물.

 

경남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산16에 있으며 현재 사적 제214호로 지정. 그리고, 왕릉이라기보다는 석탑이라고 보는게 맞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어떻든 왕릉이든, 석탑이든 신비한 느낌이 있으며 이국적인 풍경산청의 여행길에 한번쯤 들릴만한 곳입니다.

 

 

가락국 마지막왕 "구형왕릉"

국가지정 사적 제214(‘71. 2. 9)

 

한국에도 피라미드와 같은 형태의 무덤이 있습니다.

그 무덤의 주인공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가야시대의 구형왕릉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구형왕은 구충왕(仇衝王) 또는 구해왕(仇亥王)이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겸지왕이며, 어머니는 각간(角干) 출충(出忠)의 딸인 숙()이다.

김유신의 증조부이기도 하다.

521년 가야의 왕이 되어 532년 신라 법흥왕에게 영토를 넘겨줄 때까지 11년간 왕으로 있었던 인물이었습니다.

 

경남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산16 에 있으며, 

돌무덤은 1m 높이의 담장이 에워싸고 있으며 무덤 앞에 '가락국양왕릉(가락국은 가야, 양왕은 구형왕)' 이라고 적힌 비석과 석등 및 석단 좌우에 문인석, 돌짐승이 한 쌍씩 세워져 있으나 모두 20세기 들어 만들어진 것들이다.

이 무덤을 구형왕릉으로 추정하는 이유는 '신증동국여지승람'"왕산은 현의 서쪽 10지점에 있다.

산중에 돌을 포개서 만든 둔덕이 있고, 사면이 모두 층계로 돼 있는데 왕릉이라는 전설이 있다"고 기록돼 있기 때문이다 

또 조선시대 문신 홍의영(1750~1815)이 지은 '왕산심릉기'에도 "무덤 서쪽에 왕산사가 있고 절 위쪽에는 왕대(王臺), 아래쪽에는 왕릉이 있으며 신라에 멸망하자 이곳으로 와 살다가 세상을 떠나 장사 지냈다"고 기록돼 있다.

이 지역에서는 "구형왕이 나라를 구하지 못한 몸이 어찌 흙에 묻히겠느냐, 차라리 돌로 덮어달라"고 해  "살아남은 군졸들이 왕의 시신을 매장하고 잡석을 포개 얹었다"구전으로 전해오고 있다.

그러나 이 돌무덤이 석탑이나 제사를 지낸 제단이었을 수도 있다는 추정이 제기되고 정확한 사료의 뒷받 침이 부족해 지금까지 구형왕릉으로 공식 인정 받지 못한 채' 전 구형왕릉'으로 불리고 있다.

화계리 덕양전에서 1km남짓 위에 위치한 구형왕릉은 돌무덤으로 구조가 특이한데 7계단에 전체 높이가

 22m...시릉살이를 하며 무예를 연마하였다는 부분도 이 돌무덤이 구형왕릉임을 뒷받침하고 있다.

구형왕의 증손자인 김유신은 청년시절 화랑도를 이끌고 증조부의 왕능을 지키면서 지리산 일원에서 호연지기를 키워 훗날 삼국통일의 주역으로서 명성을 드 높였다.

통일신라의 주역으로 활약한 후손들의 선조인 구형왕은 5년간의 지리산 칩거 생활후 쓸쓸한 최후를 맞고   왕산 기슭의 돌무덤의 주인공이 됐다고 전해오고 있다.

그 기원이 베일에 가려 있다가 1798년 민경원이라는 유생이 왕산사의 궤짝에서 왕산사기찾아냄으로써 구형왕릉으로 확인됐다.

또한 구형왕의 증손자인 김유신이 화랑으로 활동하던 청년시절 이곳에 들어와 능을 지키는 시릉살이를 하며 무예를 연마하였다는 부분도 이 돌무덤이 구형왕릉임을 뒷받침하고 있다.

돌무덤 100m 아래 길가에 김유신장군이 활을 쏘던 곳을 기린 사대가 세워져 있다.

 

돌무덤만의 높이는 11.13m '구형왕릉 

"수수께끼의 무덤 '() 구형왕릉'의 실체를 밝힐 수 있을까."

가야의 마지막 10대 임금인 구형왕(仇衡王, 재위 521~532)의 무덤으로 전해지고 있는 경남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사적 214'전 구형왕릉' 관련 문화재 발굴작업이 본격 시작돼 지역 주민들과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왕산사터가 '전 구형왕릉'200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는데다 왕산사 법당에서 구형왕과 왕비 영정, , 칼 등 관련 유물이 나온 것으로 전해져 왕산사터를 발굴하면 이 무덤의 실체 규명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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