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스크랩] 야성(야로)송씨 약사 (冶城(冶爐)宋氏 略史)

공간(空間) 2015. 4. 22. 21:33

 

宋 氏 先 系 圖

 

❍ 송씨의 기원 : 商 (殷, 동이족인 탕 임금이 세움, 성은 子씨)

                            왕족의 후예인 (宋)微子로부터 기원 (子→ 宋)

❍ 도시조 宋柱殷(송주은) 唐 戶部尙書(서기 800년 신라 애장왕 1년 귀화, 신라 진골에

                            편입,  충청도 지방에 터전. 配 籠西李氏 墓 懷仁寶文山 坐

                       ※ 중국측 기록에는 宋株殷 또는 宋株思로 기록.

                       ※ 柱殷은 은의 기둥이라는 뜻으로, 은나라의 적자임을 암시.

2세 宋愼檢(송신검) - 兵部尙書 配奉化琴氏

3세 宋   允(송   윤)  - 吏部尙書 配籠西李氏

4세 宋進哲(송진철) - 戶部尙書 配南陽洪氏

5세 宋廷浩(송정호) - 工曹典書 配高興柳氏

6세 宋至陽(송지양) - 兵曹典書 配冶城鄭氏

7세 宋舜恭(송순공) - 新羅 大阿湌 東里學知平章事 配新平李氏

                                 (鎭川宋氏 시조라는 기록도 있음)

8세 宋成龍(송성룡) - 吏曹典書 (舜恭의 장자) 配靑松沈氏

      宋興龍(송흥룡) - 戶部典儀 延安伯 (延安宋氏 시조)

      宋仁龍(송인룡) - 鎭城君, 鎭川伯 (鎭川宋氏 시조)

      宋福龍(송복룡) - 洪城君, 洪州伯 (洪州宋氏 시조)

9세 宋興烈(송흥렬) - 戶部尙書 或云版圖判書 (成龍의 장자) 配河東鄭氏

      宋正烈(송정렬) - 新平君

10세 宋自英(송자영) - 廬山伯, 任高麗版圖判書 (興烈의 장자) 配延安李氏

                                  墓 豊德代陵洞坐

      宋孟英(송맹영) - 冶城君, 高麗穆宗朝 諫議大夫摠部議郞 墓 失傳 九政濟設壇

                                  (冶城(爐)宋氏 시조) 경남 합천 야로-최초세거지

        宋季英(송계영) - 金海君, (金海宋氏 시조)

11세 宋惟翊(송유익) - 礪山君, (礪山宋氏 시조) 自英의 장자

                                  高麗朝勝國進士追封銀靑光祿大夫樞密院副使

        宋天翊(송천익) - 恩津君, (恩津宋氏 시조) 配 靑松沈氏

                                  유익의 아우 墓 豊德

        宋文翊(송문익) - 吏曹典書 延安君, (瑞山宋氏 시조) 配 驪興李氏

                                  유익의 아우

        宋  昌(송 창) -    대장군, 孟英의 장자.

 

 

야성송씨(冶城宋氏) 선조(先祖) 이야기

 

 시조 야성군(冶城君)으로부터 14세 현령공(縣令公)까지

   성씨를 말할 때 흔히 본(本) 과 파(派)를 말하게 된다. 본이란 본관(本貫) 또는 관향(貫鄕)이라고도 하며 시조(始祖)가 태어나거나 살던 곳을 나타내는 말이지만, 우리 나라의 성(姓)을 말할 때는 반드시 성 앞에 본을 붙여서 말해야 한다. 우리 성을 야성 송씨(冶城 宋氏)로 부르는 것은 야성(冶城)이란 본과 송씨(宋氏)란 성이 합쳐진 말로서 우리 송(宋)씨의 시조(始祖)는 야성(冶城)이란 고을에 살았다는 뜻이다.

 성을 말할 때 본을 꼭 붙여 써야 하는 이유는 같은 성씨이면서도 시조가 다른 경우가 매우 많기 때문에 서로 구별 짓기 위해서이다. 우리 송씨만 하드라도 여산, 은진, 진천, 김해, 신평등 열여덟개의 본이 있고, 김(金)씨나 이(李)씨와 같이 우리나라에서 많이 쓰는 성씨들은 삼백이 넘는 본이 있다고 한다.

 

파(派)란 파계(派系) 또는 계파(系派)라고도 하며, 같은 본을 가진 사람의 수가 많아졌을 때 갈래 짓기 위한 것으로 만들어졌겠지만 파가 커지면 또다시 갈라져서 또 다른파를 이루는 것이 상례이다. 파의 이름은 그 파의 처음 선조의 직함(벼슬)이나 아호를 쓰며, 대개의 경우 이름이 알려진 선조로 되어 있다.

 

   우리 야성송씨의 시조는 맹(孟英)로 고려 목종(穆宗 980-1009) 때 간의대부 총부의랑(諫議大夫 摠部議郞)을 지내고 야성군(冶城君)으로 봉(封)해진 분으로, 야성(冶城)이란 당시의 야로현(冶爐縣) 곧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야로면 (陜川郡冶爐面) 일대의 별칭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우리의 본관은 야성(冶城)으로 지금의 경남합천군 일대에 시조께서 세거(世居)하셨다고 한다.

 

  그 후 10세(世) 감사공(監司公) 구(構) 께서 처음으로 경북성주의 송천(松川)에 터를 잡아 살게 된후 14세(世)에 이르러 소(紹), 계(繼), 집(緝), 윤(綸), 회(繪)라 부르는 5형제분들이 다섯 파(派)를 이루게 되는데, 맞 분 소(紹)는 통덕랑사온서의 직장(直長)을 지냈으므로 직장공파(直長公派)로, 둘째 분 계(繼)는 병절교위 용양위의 상호군(上護軍)을 지냈으므로 상호군공파(上護軍公派)로, 셋째 분 집(緝)은 대호군(大護軍)을 지냈으므로 대호군공파(大護軍公派)로, 넷째 분 윤(綸)은 통훈대부 좌리공신 영유현령(縣令)을 지냈으므로 현령공파(縣令公派)로, 끝 분 회(繪)는 선전관(宣傳官)을 지냈으므로 선전관공파(宣傳官公派)로, 14세(世)에서 다섯 개 파로 나뉘어진다.

  직장공파의 후손은 경북 성주(星州) 지역에서, 상호군공파의 후손은 경남 산청(山淸)에서, 대호군공파의 후손은 대구(大邱) 부근에서, 현령공파의 후손은 경북 영주(榮州) 일대에서, 선전관공파의 후손은 경북 칠곡(漆谷)등지에서 분포되고 있다.

 

영주(榮州)가 현령공파(縣令公派)의 세거지(世居地)가 된 유래

  현령공파가 야성 송씨14세에서 갈린 5개파 중 제4파이며, 현령공 윤(綸)이 파조(派祖)인 것, 그리고 10세 감사공(監司公) 이후 경북 성주를 세거지로 삼았다는 것은 앞에서 기술한 바이나, 10세 감사공 구(構)는 가정대부 경기감사(嘉靖大夫 京畿監司)를 지냈고, 11세 길창(吉昌)은 가선대부 개성윤(嘉善大夫 開城尹)을 지냈으며, 12세 천우(千祐)는 통정대부 판결사(通政大夫 判決事)를, 그리고 13세 수겸(守謙)은 선교랑 진잠현감(宣敎郞 鎭岑縣監)을 지냈으므로 벼슬길에 있을 때는 그 때마다 세거지 성주가 아닌 곳 즉 개성,한성등 수도(首都)이거나 기타 지방 임지(任地)에서 거처하였음이 짐작된다.

  현령공 윤(綸)께서는 자(字)를 윤언(允言), 호(號)를 경산자(京山子) 또는 청계(淸溪)라 쓰셨고, 필법(筆法) 특히 전서(篆書)에 뛰어나 금강전첩(金剛篆帖)을 남겻으며, 성주를 떠나 한성 호현방(漢城 好賢坊) 지금의 서울 중구 회현동에서 거처하셨다고 한다.그리고 세조 3년(1458년)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돈영부의 주부(主簿), 문의현의 현령(縣令), 사복시의 주부, 개성의 경력(經歷), 다시 영유현의 현령을 지냈으며, 성종 2년(1471년)에 좌리훈(佐理勳)을 받은바 있다. 숙부인(淑夫人) 청주 한씨는 영의정 관수정 창(觀水亭 昌)의 따님이시며 예종비인 안순왕후 한씨(安順王后 韓氏)의 고모이기도 하다.

 

   현령공께서는 독자(獨子)인 석충(碩忠)과 공인달(孔仁達), 이몽석(李夢石), 손덕원(孫德源), 소희식(蘇希軾)에 출가한 네 따님을 두셨는데, 아무런 연고도 없는 영남 땅 영주(榮州,당시는 剛州)로 연산군 4년(1498년) 무오사화를 피해 내려온 이가 바로 눌재선생( 訥齋先生) 석충(碩忠) 선조 이시다. 현령공파의 영주 세거는 지금으로부터 510년전 이때부터 시작 되었다.

    23세에 생원시에 합격, 청운의 뜻을 품고 성균관의 유생이 되었으며, 26세 때는 김한훤, 최금남, 박영천, 신숭양등 단지 젊은 유학자들과 정지교부계회(情志交孚契會)를 맺고 점필재 김선생의 문하생이 되었던 사실 하나가 피신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될줄이야. 너무나 혼미한 왕조라 6년뒤에 일어난 갑자사화를 생각하면 영남으로의 피신은 현명한 선택이 아니였는가 싶다.

 

 영주의 입향조(入鄕祖) 눌재선생(訥齋先生)

  선생의 휘(諱)는 석충(碩忠), 자는 원로(元老), 호는 눌재(訥齋) 로 단종 2년 (1454년) 5월 28일 한성 호현방의 본집에서 태어났다.

1474년 상호군 희철(希哲)의 따님인 옥천 전씨(沃川 全氏)를 아 내로 맞았고, 엄(儼), 의(儀), 간(侃), 칭(偁)의 네 아드님과 이준근(李埈根), 안배곤(安配坤), 권오기(權五紀)에 출가한 세 따님을 두셨다.

   1477년 생원시(生員試)에 3등으로 합격 하셨고, 선생이 호현방 에 사실 때 한훤당 김선생 (寒喧堂 金先生)이 이사를 와서 두분은 일찍부터 가까이 지내게 되었고 점필재 김선생 (佔畢齋 金先生)문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하였다.

1480년에는 한훤당 김선생 외 세분과 정지교부계(情志交孚契)를 맺고 춘추로 호현방 서재에서 경사(經史)를 강론하고 도의를 연마하였다.

    선생은 일찍이 “말은 충성스럽고 신의가 있어야 하며 행실은 독실하고 공손하게 하는 것이 수신하는 첫째의 방법이 될 것이란 뜻의 언충신(言忠信) 행독경(行篤敬)”을 써붙여 놓고 자경문(自警文)으로 삼았고, “말은 느리게 하고 행동은 민첩하게 하는 것이 옛 사람들의 수신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나는 행동은 민첩하지 못하드라도 말을 참는 것은 가능하다”라고 하며 편액을 ‘눌재-눌옹(訥齋-訥翁)’이라고 하였다.

선생은 본래 사족(士族) 집안에서 태어나 그 인척들도 모두 대대로 나라에 공훈이 있는 집들이 었으므로 조정에는 많은 친척들이 있었지만 두문불출 하며 부귀를 누리는 자제들과는 사귀질 않았다.

    당시 한훤선생이 후진양성에 몰두할 때 사방에서 쏟아지는 비방의 소리를 듣고 후진 양성을 중단할 것을 권고 하고는 신병을 핑계삼아 영주로 이사하였다.

선생은 낙향한후 은둔생활로 세상을 등지고 살고 있을 때 출사할 것을 종용받았으나 끝내 “나는 말도 잘 하지 못하고 몸도 병이 들어 벼슬을 할 수 없다”고 사양하며 끝내 불응 하였다.

    갑자사화(1504년)가 일어나 김한훤,최금남등 가까운 현사들이 참화를 당하자 선생은 문을 닫고 혼자 슬퍼하며 더욱 자취를 숨기고 살다가 세상을 마침에 사람들은 누차 사화를 겪으면서 그들의 모함을 벗어남으로 선생의 명석한 처세에 탐복 하였다.

    1524년 1월 초7일 향년 71세로 휴천리 본댁에서 작고 하셨으며, 묘소는 평은면 괴동(平恩面 槐洞)에 있으며 4년 뒤 역시 71세로 작고한 부인 옥천 전씨도 선생 묘역 좌측에 부장 하였다.

 영주의 4개파로 분파

   영주의 4개파는 선생의 아드님 4형제로 이루어지니 곧 첨추공파, 참의공파, 내금위공파, 사직공파라 부르며 다시 26개의 세파(細派)로 나뉘어 지금에 이른다.

총 세대수는 2500여세대로 추정되나 적은 수는 아니다.

선생은 4명의 아들에, 13명의 손자, 26명의 증손자, 57명의현손자, 그리고 107명 의 5세손을 두었으니 번족하기 유가 없을 정도로 이는 모두 선생의 음덕(蔭德)으로 여겨 마땅하다

 현령공의 묘지 실전(失傳)

   15세 눌재선생이 무오사화(1498년)를 피해 영남의 영주땅으로 내려와 은둔생활을 하는 동안 한성금천신림역한유동(漢城黔川新林驛閒有洞)에 뫼셨던 현령공 내외분의. 묘소를 실전(失傳)하고 말았다.

   기록에 의하면 마지막 성묘로 선조 9년 (1576년,만력 병자)2월 공의 증손인 매포(梅浦)선생(宋福基)께서 사마시를 보러갔다 성묘하고 운을 남긴 것이 있으니 눌재 선생이 낙향한 후로 치면 78년 째요, 지금으로부터 치면 432년 전의 일이다.

지금은 평은면 괴동에 망묘단(望墓壇)을 설단하고 춘추로 부자 분을 제향하고 있다.

 

 

 

 

야성송문 영주 현령공파조  綸자 묘단비

생원김굉필.생원송석충.진사최부.진사박담손.진사신희연등은 나이도같고 道도 같아 뜻을 서로 믿고 경자년(1480)6월초6일 한훤당김굉필의 집에서 계를 맺은 모습를 그린 목판

(야성문중 현령공종손 보관)

 

 

 

영주 입향선조 석자충자 춘.추재향 모습-평은 괴동 선영

 

 

야성송문 현령공파조 선영 전경(평은면 강동리 괴동 소재) 

출처 : 영주유선회(榮州 儒宣會)
글쓴이 : 송인선-道情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