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버신문7월] 현령공파의 영주 세거는 514년 전 시작 됐다 | ||||||||||||
❸ 야성 송씨 연원 (冶城 宋氏 淵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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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비의 고장 영주의 뿌리(脈) -가문(家門)의 씨족을 찾아서... 실버신문(까치소리)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동성동본의 혼인. 간통제 폐지. 본적지 폐지 등 급변하는 윤리도덕관에 따라 근본의 뿌리가 흔들리고 있는 씨족의 근원을 찾아 일가친척의 혈손을 상기시키는 의미에서 영주지역에 산재. 거주하고 있는 성씨의 가문에 대한 연원을 살펴보기로 했다. 조상과 가문에 대한 고정관념을 정립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본관 및 시조의 유래 그 후 10세(世) 감사공(監司公) 구(構)께서 처음으로 경북 성주의 송천(松川)지금의 초전면 문덕리에 터를 잡아 살게 된 후 14세(世)에 이르러 소(紹), 계(繼), 집(緝), 윤(綸), 회(繪)라 부르는 5형제분들이 다섯 파(派)를 이루게 되는데, 맞분 소(紹)께서 통덕랑으로 사온서의 직장(直長)을 지냈으므로 직장공파(直長公派)로, 둘째 분 계(繼)께서 병절교위 용양위의 상호군(上護軍)을 지냈으므로 상호군공파(上護軍公派)로, 셋째 분 집(緝)께서는 대호군(大護軍)을 지냈으므로 대호군공파(大護軍公派)로, 넷째 분 윤(綸)께서는 통훈대부 좌리공신 영유현령(佐理功臣 永柔縣令)을 지냈으므로 현령공파(縣令公派)로, 끝 분 회(繪)께서는 선전관(宣傳官)을 지냈으므로 선전관공파(宣傳官公派)로, 14세(世)에서 다섯 개 파로 나뉘어졌다. 직장공파의 후손은 경북 성주(星州) 지역에서, 상호군공파의 후손은 경남 산청(山淸)에서, 대호군공파의 후손은 대구(大邱) 부근에서, 현령공파의 후손은 경북 영주(榮州) 일대에서, 선전관공파의 후손은 경북 칠곡(漆谷)등지에 분포되어 있다. 영주(榮州) 현령공파(縣令公派)의 세거지(世居地) 유래(由來)
현령공 윤(綸)께서는 자(字)를 윤언(允言), 호(號)를 경산자(京山子) 또는 청계(淸溪)라 쓰셨고, 필법(筆法) 특히 전서(篆書)에 뛰어나 금강전첩(金剛篆帖)을 남겼으며, 성주를 떠나 한성 호현방(漢城 好賢坊) 지금의 서울 중구 회현동에서 거처하였다. 그리고 세조 3년(1458년)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돈영부의 주부(主簿), 문의현(文義縣)의 현령(縣令), 사복시(司僕시)의 주부, 개성(開城)의 경력(經歷), 다시 영유현(永柔縣)의 현령을 지냈으며, 성종 2년(1471년)에 좌리훈(佐理勳)을 받은바 있다. 숙부인(淑夫人) 청주 한(韓) 씨는 영의정 관수정 창(觀水亭 昌)의 따님이시며 예종비인 안순왕후 한씨(安順王后 韓氏)의 고모이기도 하다. 현령공께서는 독자(獨子)인 석충(碩忠)과 공인달(孔仁達), 이몽석(李夢石), 손덕원(孫德源), 소희식(蘇希軾)에 출가한 네 따님을 두었으며, 아무런 연고도 없는 영남 땅 영주(榮州,당시는 강주剛州)로 연산군 4년(1498년) 무오사화를 피해 내려온 이가 바로 눌재 선생(訥齋先生) 석충(碩忠) 선조이시다. 현령공파의 영주 세거는 지금으로부터 514년 전(1498년) 이때부터 시작 되었다. 영주의 입향조(入鄕祖) 눌재선생(訥齋先生) 1474년 상호군 희철(希哲)의 따님인 옥천 전씨(沃川 全氏)를 아내로 맞았고,엄(), 의(儀), 간(侃),칭()의 네 아드님과 이준근(李埈根), 안배곤(安配坤), 권오기(權五紀)에 출가한 세 따님을 두셨다. 1477년 생원시(生員試)에 3등으로 합격 후, 호현방(현-충무로)에 사실 때 훗날 동방오현(東方五賢)의 한 분이 되신 한훤당 김선생(寒喧堂 金先生)이 이사를 와서 두 분은 일찍부터 가까이 지내게 되었고 점필재 김선생(점畢齋 金先生)문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하였으며, 1480년에는 한훤당 김선생 외 세분과 정지교부계(情志交孚契)를 맺고 춘추로 호현방(현충무로) 서재에서 경사(經史)를 강론하고 도의를 연마하였다. 선생은 일찍이 “말은 충성스럽고 신의가 있어야 하며 행실은 독실하고 공손하게 하는 것이 수신하는 첫째의 방법이 될 것”이란 뜻의 “언충신(言忠信) 행독경(行篤敬)”을 써 붙여 놓고 자경문(自警文)으로 삼았고, “말은 느리게 하고 행동은 민첩하게 하는 것이 옛 사람들의 수신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나는 행동은 민첩하지 못하더라도 말을 참는 것은 가능하다”라고 하며 편액을 ‘눌재-눌옹(訥齋-訥翁)’이라고 하였다. 당시 한훤당선생이 후진 양성에 몰두할 때 사방에서 쏟아지는 비방의 소리를 듣고 후진 양성을 중단할 것을 권고 하고는 신병을 핑계 삼아 영주로 거처를 옮겼다. 선생이 낙향한 후 은둔 생활로 세상을 등지고 살고 있을 때 출사할 것을 종용받았으나 끝내 “나는 말도 잘 하지 못하고 몸도 병이 들어 벼슬을 할 수 없다”고 사양하며 끝내 불응 하였다. 1524년 1월 초7일 향년 71세로 휴천리 본댁에서 작고 하셨고, 묘소는 평은면 괴동(平恩面 槐洞)에 모셨으며 4년 뒤 역시 71세로 작고한 부인 옥천 전씨도 선생 묘역 좌측에 부장 하였다. 지금은 평은면 괴동(槐洞)에 망묘단(望墓壇)과 선영에는 전국의 많은 족친들이 참석하여 춘추(春秋)로 괴동재사(槐洞齋舍)(경북문화재자료제546호)에서 부자(父子) 분을 제향하고 있으며, 현재 영주댐 공사로 인하여 재사가 수몰 되므로 관계기관 주관으로 이설 공사 중에 있으며 내년 하반기 완공될 예정이다. 영주의 4개 파는 선생의 아드님 4형제로 이루어지니 곧 첨추공파, 참의공파, 내금위공파, 사직공파 또는 별칭으로 종파, 2파, 3파, 4파라 부르며 다시 26개의 세파(細派)로 나뉘어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야성송씨 현령공파 후손은 전국에 약 4.000여세대로 추정되며 영주에는 광승(휴천1동), 원당(하망동), 장수면(호구실 외), 부석(도봉), 봉화(관창),평은면 등에 분포되어있으며, 약2.500여세대가 거주하고 있다. 유적으로는 문정마을 “산천서당”과 광승마을 뚜껑바위 송장수 설화는 물론 구한말 조선독립운동사의 이정표가 된 한국사료총서 제2권“기려수필”의 저자인 기려자 송상도지사도 광승리 사직공파(정랑공) 후손이다. 현재 야성송씨 현령공파 종회건물은 성누가사거리에서 안동통로 굴다리 가기 전 원당로 왼쪽건물 3층이며, 종손으로는 송강선(70세), 현 종친회장은 (전)영주시의회 의장을 역임한 송준우(70세), 사무국장 송인홍(58세)이 활발한 종무활동으로 칭송을 받고 있으며 금번 취재는 종친원로이신 송준태옹(84세)께서 많은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송인선 실버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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