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담초(骨擔草)
꽃말은 : 겸손, 청초.
화엄종찰 부석사 조사당 처마 밑에는 철망으로 보호되고 있는 나무 한그루가 있다. 골담초, 또는 선비화(禪扉花)라고도 불리는 이 나무는 신라시대 의상대사가 쓰시던 지팡이를 꽂은 곳에서 싹이 터 자라나게 되었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처마 밑이라 비도 이슬도 맞지 않고 1천 5백여 년을 그 크기로 버티고 있다니, 식물학적으로도 신비스러움이 더해진다.
지난날 우리가 어려웠던 어린 시절에 이 꽃의 단물을 빨아먹고 지내던 애잔한 추억들을 되새길 수 있는 역사적 과정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는 계기가 되고 있다. 뿌리는 생약으로 “뼈의 질환을 다스린다.” 는 의미로 골담초(骨擔草)라고 부르게 되었다한다. 노란 비단 색을 띤 닭이라는 뜻으로 금계아(金鷄兒)라고도 하며, 불가에서는 선비화(禪扉花)라고도 한다. 지방에 따라 곤단추 나무라고 한다.
골담초와 관련하여 신라시대 의상대사(625-707) 이야기가 전해온다. 그는 경북 영주시(부석면 북지리)에 위치한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하였다. 여기에는 1,300년 살아온 골담초가 지금도 보존되고 있다. 의상대사가 집고 다니던 지팡이를 거꾸로 꽂아 놓은 것이 살아나서 골담초가 되었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이 나무는 현재 조사당 처마 밑 뜰에 심어져 있는데, 이슬을 맞지 않고서도 녹색을 유지하고 있다.
조선조 때에 퇴계(이황, 1501-1570) 선생이 이 골담초를 보고 읊은 시가 또한 유명하다.
“무성하고 아름답게 빼어나 절간 문에 의지하니, 스님 지팡이가 신령한 뿌리가 되었다. 지팡이 끝에 스스로 물이 있어, 빗물과 이슬에 의지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또 ‘택리지’에는 의상대사가 부석사를 창건한 후 도를 깨치고 서역 천축국(인도)으로 떠날 때 지팡이를 꽂으면서 ‘지팡이에 뿌리가 내리고 잎이 날 터이니 이 나무가 죽지 않으면 나도 죽지 않은 것으로 알라.’고 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그 나무가 바로 ‘선비화(禪扉花)’라 한다. 조선 광해군때에 경상감사가 된 정조라는 이가 부석사에 와 선비화(禪扉花)를 보고 ‘선인의 지팡이였던 나무로 내 지팡이를 만들겠다’ 라며 나무를 잘라 갔으나 다시 줄기가 뻗어 나와 전과 같이 잘 자랐고, 후에 정조는 역적으로 몰려 죽였다는 내용도 기록되어 있다.
이 같은 유서 깊은 사연을 접한 이승만 대통령이 부석사를 방문하였을 때 알게 되어 골담초 나무를 잘 보존하고 관리하라는 격려와 함께 하사금까지 주어 철책으로 둘러싸 보호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가 이 나무를 달여 먹으면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속설 때문에 남몰래 마구 끊어가 지금은 보호 수단을 더욱 강화하여 철망으로 둘러싸 여 감옥에 갇힌 꼴이 되었다. 하여간 골담초(骨擔草)는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국보 제19호의 조사당과 함께 문화재로 보존하게 되었다. 이 나무는 분얼과 발근력(拔根力)이 강하여 설사 옛날의 원줄기는 말라 죽었다 하드라도 옆가지가 계속 나와 1,300년 동안 명맥을 유지한 귀중한 나무라 할 수 있다.
약재와 관상수로 심는다. 한방에서는 타박상과 관절염에 쓰인다. 뿌리는 신경통, 류머티즘, 대하증, 요통 등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식용으로도 쓰이는데 꽃을 밀가루에 버무려 꽃전을 부쳐 먹기도 한다. 뿌리와 꽃은 술을 담가 마시면 관절염이나 신경통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