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신춘문예 작

[스크랩] 2019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_ 조온윤 「마지막 할머니와 아무르 강가에서」

공간(空間) 2019. 1. 21. 20:06

2019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_ 조온윤 마지막 할머니와 아무르 강가에서

 

 

마지막 할머니와 아무르 강가에서

 

   조온윤

 

 

할머니가 있어 
아직 사라지지 않은 

가판대 위 물고기의 눈알처럼 
죽어가면서도 시선을 잃지 않아서 
그 아득한 세월의 흔들의자에 앉아 여전히 
이승의 장경을 관망하고 있는 

아무르 강가에서 늙고 지친 호랑이가 
밀렵꾼들에게 가족을 잃은 마지막 호랑이가 
수면 위로 얼굴을 비추는 순간 
마르고 거친 혓바닥을 내밀어 적시는 순간 
늙은 호랑이는 마주하게 되지 
마지막 할머니를 

초원 위를 뛰어가는 사슴들을 멀리서 
그저 멀리서 바라보고만 있는 위구르족 여자의 시선을
그 시선의 수심을 도무지 헤아릴 수가 없어서 
심해어의 눈처럼 
어딘가에 있겠지만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무언가 보고 있겠지만 무얼 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초점이 없이도 자전하는 지구본처럼 

물고기의 눈알이 빨간 국물에 적셔졌다면, 지금쯤 식탁 위에서
눈알을 도려냈다면 어두컴컴한 하수구 어디쯤에서
삼켰다면 고래의 뱃속에서 
여전히 관망하지 
세계를 
그곳의 공감각을 

머지않아 모든 할머니들이 사라진 시대가 온다고 해도
목을 축이러 찾아간 아무르 강가에서 
저 멀리 초원 위를 뛰어다니는 사슴들밖엔 바라볼 수 없다고 해도

호랑이는 그 눈을 죽는 순간까지 기억하지 
죽은 뒤에도 시선을 잃지 않아서 
흔들의자는 혼자서도 오랫동안 흔들거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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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사평] 자연의 냉혹한 질서와 죽음의 공포, 삶의 애착을 무심하게 바라봐



신춘문예 시 심사는 3∼5편의 완성도가 높고 고른 투고작 중에서 투고자의 역량이 집중된 ‘한 편’을 선정한다. 우리 시단에 즐거운 자극을 줄 새로움도 기대하게 된다. 이런 점이 이른바 신춘문예 유형을 형성하게 되는 것 같다. 예심에서 올라온 13명의 작품 중에서 마지막까지 논의된 그 ‘한 편’은 ‘사돈’ ‘헤드셋 소녀’ ‘바닥 꽃 핀다’ ‘마지막 할머니와 아무르 강가에서’ 등 4편이었다.  

‘사돈’은 사물의 모습이나 움직임을 소리로 듣고 냄새로 감지하는 빼어난 공감각적 이미지로 표현하면서 만물이 ‘사돈’이라는 인식을 드러낸 작품이다. 귀로 듣는 말에서 벗어나 세계와 온몸으로 교감하려는 태도가 주목할 만했으나 비약이 심한 몇몇 문장들은 부자연스러웠다. ‘헤드셋 소녀’는 헤드셋 음악에 스스로 갇혀 지내는 소녀의 내면적 움직임을 체험시키는 감각적인 이미지와 그 음악을 연상시키는 스타카토 리듬이 인상적이었다. 표현 기법만으로 본다면 으뜸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소녀의 목소리에서 어른의 관념이 감지되어 아쉬웠다. ‘바닥 꽃 핀다’는 냄비에 끓는 물에서 단단한 바닥을 뚫고 올라와 꽃피우는 봄의 에너지를 즐겁게 상상한 점, 일상의 경험을 자연스럽게 육화시킨 점이 볼만하였으나 미적 인식보다 아이디어에 의존한 점은 한계로 지적되었다. 


숙고와 논의를 거쳐 죽기 직전에 할머니가 바라본 풍경과 할머니의 죽음을 기억하는 호랑이의 시선을 스케일이 큰 상상력으로 진술한 ‘마지막 할머니와 아무르 강가에서’를 당선작으로 결정하였다. 이 시는 지상의 수많은 삶과 죽음을 자신의 몸으로 겪어낸 것 같은 할머니가 자신의 마지막을 풍경화처럼 바라보는 시선과 개개의 삶을 넘어 생태계에 각인된 기억에 따라 움직이는 호랑이의 시선을 교차시키고 있다. 서로 얽히면서 소멸되어가는 두 시선은 자연의 냉혹한 질서와 죽음의 공포, 삶의 애착을 무심하게 바라보는 어떤 거대한 눈을 떠올리게 한다. 

이 시는 우리 현실과 다소 거리가 있는 소재와 한 편의 시가 감당하기 쉽지 않은 큰 주제로 인해 관념에 떨어질 위험이 있으나 세밀하고 끈질긴 상상과 삶과 죽음의 순환을 꿰뚫는 보이지 않는 힘에 대한 통찰이 그런 우려를 잘 떨쳐내고 있다.

심사위원 : 정호승·김기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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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입에 가지를 물고 돌아온 하얀 새를 본 것만 같다



학교를 졸업한 뒤 이제는 무얼 하며 살아야 할까 생각하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혼자서 망양 한가운데를 표류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시를 쓰는 일이 혼자서만 보는 새를 기르는 것처럼 무력하고 무용하게 느껴졌다. 이제는 새를 놓아주어야 할까. 새는 내 안에 갇혀 병들고 있는 걸까.

불안하고 슬펐다. 새를 풀어주어도 새가 나를 떠나지 않길 바랐다. 뭍을 그리워하며 비둘기를 날려 보냈던 방주 위의 노아처럼, 실은 내가 발 디딜 수 있는 곳이 있길 바라며 먼 곳으로 흰 종이를 부치고 또 부쳤던 거 같다. 입에 가지를 물고 돌아온 하얀 새를 본 것만 같다. 

그간 나의 방주가 되어준 사람들에게 감사드리고 싶다. 언젠가 ‘생의 이면’을 읽고 얻은 힘이 지금도 내 안에 남아있다. 이승우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마음이 힘들었을 때 나희덕 선생님께서는 사라지지 않는 알약을 건네주셨다. 마음에 감기가 든 거라고 여기라던 말씀을 여전히 알약처럼 품고 있다. 감기는 흔한 거고 며칠 앓고 털고 일어나면 그만이다. 신형철 선생님께서 내 등을 쓰다듬으며 위로해주신 것을 기억하실는지 모르겠다. 어떤 온기는 몸에 그대로 남아 식지도 사라지지도 않는다. 

가능성을 봐주신 문화일보와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깊이 감사드린다. 말이 없어 지루한 내 곁을 떠나지 않아 준 친구들에게 고맙다. 그리고 내색은 않지만 분명 나를 사랑하고 있을 누나, 이와, 엄마에게, 나 또한 사랑한다고 전하고 싶다. 아빠에게, 더는 미워하지 않는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조온윤 / 1993년 광주 출생. 조선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출처 : 푸른 시의 방
글쓴이 : 강인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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