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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시인시대> 겨울호 권두시론 가져왔습니다

공간(空間) 2018. 10. 15. 21:37

왜 현대시는 자꾸 어려워지는가?

거울과 시의 현대성

                   장석주 (시인. 문학평론가)

   

1

 

어렸을 때 거울이라는 물건을 접하면서 신기했다. 거울이 빛을 여기저기로 반사하고, 사물의 상을 비쳐낼 때 그것은 마치 요술을 부리는 듯했다. 둘러보면 거울은 도처에 있다. ‘현대라는 거울, ‘사회라는 거울! 거울 앞에 선 자는 거울에 비친 자기 상을 바라본다. 거울에 뜨는 현전은 실재가 아니라 헛것, 유령, 이미지다. 현대인은 거울 앞에서 날마다 자기를 발명한다. “말하자면 <거울>은 하나의 장치인 것이다. 그 자체는 말도 이미지도 아니지만 말과 이미지와 물질로, 무엇보다 말과 이미지의 상호 침투로 정치하게 조립된 하나의 장치인 것이다.” 거울은 현대의 표상들을 발명하고 생산한다. “주체라는 표상을, 자아라는 표상을, 타자라는 표상을 생산하는 것이다.” 시인 이상도 주체가 거울에서 자기를 발명하는 현상에 주목했다. “거울때문에나는거울속의나를만져보지를못하는구련만/거울아니엇던들내가어찌거울속의나를만나보기만이라도했겠소.”(이상, 거울) 이상은 거울 밖의 와 거울 안의 를 분리해서 본다. 거울 속의 에게는 귀가 있지만, 그 귀는 알아들을 수 없는 귀다. 거울 속의 는 왼손잡이지만 내가 내미는 악수의 손을 받지 못한다. “거울을 보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거울에 자주 나타난다/ (중략) /비누거품을 허옇게 쓴 나의 헛것,/이것, 아무것도 아닌데!”(황지우, 우울한 거울 1) 존재자의 지각을 이끄는 장치인 거울은 두 세계 사이에 놓인 벽이다. 다시 말해 거울은 상상계와 실재계를 가로지르는 경계면이다. 그 경계면에 출현하는 것은 가 아니라 의 헛것, 즉 의미없이 떠도는 유령이다. 거울이 현대성을 되비추는 표상이라는 은유는 현대시에서 널리 쓰이는 것 중 하나다. 시인들 저마다가 자기를 발명하는 하나의 거울이다.

 

2

 

현대시는 언어의 바깥이다. 그 이전의 시는 언어의 내부, 언어를 지배하는 문법이라는 규범에 충실했다. 이를테면 김소월의 서정시는 언어의 규범과 시적 화자의 정서적 규범은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정서적 정보는 명확하게 시의 구문을 통해 전달되는 것이다. 문장으로 환원될 수 없는 정서적 정보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시가 품은 정서적 정보와 시적 문장의 규범은 균질성 안에서 하나로 어우러진다.

 

어룰 없이 지는 꽃은 가는 봄인데

어룰 없이 오는 비에 봄은 울어라.

서럽다, 이 나의 가슴속에는!

보라, 높은 구름 나무의 푸릇한 가지.

그러나 해 늦으니 어스름인가.

애달피 고운 비는 그어오지만

내 몸은 꽃자리에 주저앉아 우노라.

 

김소월, 봄비

 

봄비는 봄비가 내리는 가운데 가는 봄을 덧없어 하는 마음을 그린 시다. 시각은 해질녘 어스름이고, “애달피 고운 비는 내린다. ‘는 서러운데, 그것은 가슴에 품은 높은 구름 나무의 푸릇한 가지때문이다. ‘는 아직 봄을 떠나보내고 싶지 않다. 아직 이룰 꿈들이 있는 까닭이다. 헌데 덧없이 비가 내리는 가운데 봄이 떠난다. 꽃잎이 떨어지는 분분한 낙화, 비가 내리는 봄날 저녁. 이 속수무책인 사태 앞에서 는 꽃자리에 주저앉아 서럽게 울 수밖에 없다. 시의 구문은 언어의 내부에 있다. 그것은 시가 전달하려는 정서적 정보와 문장 사이에 어떤 불일치도 없기 때문이다.

 

현대성의 자각 안에서 산출되는 시들은 언어의 바깥으로 밀려나간다. 현대성 이전의 서정시는 철저하게 시인의 고백적 내러티브에 머물렀다. 그것은 서정시가 시인 자신의 정념을 누설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김소월 시대의 서정시는 자아의 충실한 반영과 자기 감정의 복제로도 충분했지만 현대시는 동일성도 균질성도 없이 문법에서도 갑자기 박동치는 말이 새어나온다. 달리 말하면 시가 표현할 수 없는 없는 것을 표현하려는 가운데 언어의 형식적 규범의 해체가 일어난다. 바로 이 지점에서 김소월과 이상은 갈라진다.

 

3

 

지금-여기의 한국시는 충분히 현대적인가? 이런 도발하는 물음에서 시작하자. 지금-여기는 천당 지옥”(김혜순)이고, “쓰레기 같은 삶/쓰레기통에 버려진 ”(황지우)의 세계다. 현대는 현대를 넘어서 온다. 현대는 월경(越境)의 산물이고, 그것은 불연속적이다. 어쨌든 현대성이 작열하는 가운데 그 반향으로 무의식적 분열, 자기 폭로, 야유, 풍자, 블랙유머는 방법론적 분광(分光)을 형성한다.

 

시적 현대성의 역사 초입에서 우리는 샤를 보들레르(1821~1867를 만난다. 생활에 필요한 다양한 물건의 새로운 제조 방식이 등장하고, 동일한 제품의 대량 생산이 가능해지며 현대가 열린다. 대량 생산된 것들은 단 하나의 원본을 대한 무한 복제한다. 그와 동시에 어떤 가상이 상품 속에 굳어지며 자리를 잡았다. 그 결과로 원본에 드리워졌던 아우라가 사라졌다. 현대는 아우라가 사라진 시대다. “보들레르의 우울은 아우라의 쇠퇴에서 생겨난 고뇌이다.” 제품의 생산 과정은 사람과 단절되었다. 사람들은 단지 제품의 소비자로 전락한다. “대량 생산이 아우라의 쇠퇴의 주된 경제적 원인이며, 계급투쟁이 주된 사회적 원인이다.” 보들레르는 현대성이라는 자각 위에서 현대시를 쓴 최초의 시인이다. 거액의 유산을 상속받아 그 돈으로 살롱과 카페를 드나들고 사창가나 출입하며 건달로 빈둥거리던 청년이 내놓은 시집 악의 꽃(1857)은 현대성의 병기창이거나 대성당이다. 악의 꽃에 대한 당대 사회의 첫 반응은 그 반도덕성에 대한 법의 심판이었다. 보들레르는 그 시집의 출판과 관련하여 기되되어 재판에서 거액의 벌금형을 선고받는다.

 

한국시에서 일찍이 현대성에 투신한 시인을 꼽는다면 이상, 김수영, 이승훈이다. 그들은 현대인의 창백한 자의식을 바탕으로 시를 쓰며, 현대성을 중요한 시적 화두로 삼았다. 1980년대의 이성복(1952~ ), 황지우(1952~ ), 박남철(1953~2014), 김혜순(1955~ ), 박상순(1962~ )은 바로 이들이 열고 닦은 길을, 자기 나름의 간극을 만들고 난맥을 이루면서, 더 멀리까지 현대성을 밀고 나아간다. 새 밀레니엄 시대로 접어들며 미래파라고 명명된 한 떼의 시인들이 왔다. 황인찬(1988~ )도 함께 거론되었다. 그는 2010년에 등단한, 한국시에서 가장 젊은 세대에 속하는 시인이고, 그의 상상력이 일군 시들은 한국시의 뉴웨이브(신형철)이거나 한국시가 가 닿은 새로운 영토이다.

 

4

 

한국시의 계보학을 거슬러 올라가서 현대성이라는 항목에 가장 먼저 이름이 적힐 문제적 시인은 이상(1910~1937)이다. 이상이 1934724일자 조선중앙일보 지면에 처음으로 내놓은 오감도(烏瞰圖) 시제1는 한국시에서 처음으로 현대성의 파열음을 요란하게 낸다.

 

十三人兒孩道路疾走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適當하오)

 

第一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二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三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四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五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六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七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八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九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一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十二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三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十三人兒孩는무서운兒孩와무서워하는兒孩와그렇게뿐이모였소.

(다른事情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一人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좋소.

二人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좋소.

二人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좋소.

一人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適當하오)

十三人兒孩道路疾走하지아니하여도좋소.

 

이상, 오감도(烏瞰圖) 시제1 전문

 

이 시에 제시된 ‘13인의 아해가 누구인지, 그들은 왜 무섭다고 하고 무서워하며 막다른 골목을 질주하는지에 대한 논의는 거의 무의미하다. 그가 시인이기 이전에 근대 초입인 1910년에 서울에서 태어나 경성고공 건축과를 졸업하고 조선총독부 내무국 건축과 기수로 일한 전문인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의 시가 나오는 오감도(烏瞰圖)’와 같은 조어나 공간에 대한 기하학적인 해석은 건축가의 상상력에 바탕을 두는 것이다. 이상은 현대성이라는 변화의 파고(波高) 앞에서 그것을 감당할 수가 없어 의식의 균열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상의 시는 기본적으로 해체시다. 그 해체는 이중으로 이루어진다. 즉 한국어의 문자 체계인 한글을 해체하고, 당대 문학에 씌워진 인식과 관념을 해체한다. 이상이 봉건 왕조의 몰락과 함께 기습하듯이 들이닥친 문명개화의 초입에서 발견한 것은 일본을 거쳐 건너온 백화점, 에스컬레이트, 마네킹, 유행패션, 비누와 지구의, 코티 향수, 도시의 미로와 골목, 그리고 건축무한육면각체무한운동을 한다. 백화점은 승강기, 계단, 거울, 계산기, 장식창, 인형, 회전문 등으로 이루어진 건축무한육면각체는 현대성의 산물이다. 백화점은 내부 구조에서 四角內部四角內部四角內部四角內部四角”(건축무한육면각체 AU MAGASIN DE NOUVEAUTES)으로 무한으로 확장하는 운동한다. 이상은 공간이 중첩되고 불연속적으로 분할되는 백화점 구조를 공간 기하학으로 해체하고 문화기호학적 의미를 길어낸다. 이상은 자기가 온몸으로 보고 겪은 현대성을 초열빙결지옥(焦熱氷結地獄)”(광녀의 고백)이라고 말한다. 이상의 반응은 보들레르의 반응과 다르지 않다. 이상은 오감도연작시에서 이 현대성에 부딪치며 일어나는 섬뜩한 감응을 자기분열증적 무의식의 언어로 누설한다.

 

김수영(1921~1968)은 어떤가? 그는 시에서 세계의 개진(開陳)”이라는 길을 개척한다. 우리는 물질세계를 기반으로 삶을 꾸린다. 다시 말하면 물질세계에서 물질로 이루어진 몸을 갖고 사물의 생리, 그것의 수량과 한도에 의지해 산다. 이 세계의 자명성 속에서 생성되는 경험의 총체를 우리는 삶이라고 부른다. 김수영은 세계의 물질성과 그 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세계를 이루는 것은 물성이고, 그것은 다양한 맥락의 영향 아래 놓인다. 세계를 움직이고 세계와 교섭하며 영향을 미치는 맥락을 형성하는 것은 종교, 역사, 이념, 정치, 사회, 문화, 경제, 정부, 관습, 가치, , 대중매체, 과학기술 등이다. 김수영이 문제 삼은 것은 물질세계의 다양한 맥락이고, 그 맥락이 삶에 미치는 영향이다. 그가 꿈꾸는 것은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맥락의 변화를 통해 우리가 사는 세계를 더 나은 세계로 바꾸는 일이다. 김수영의 시가 자주 결의하는 비애변혁하는 비애를 노래한 것은 그 때문이다. 그에게 세계는 본질에서 시가 아니라 산문이다. 따라서 그의 시에서 산문성은 불가피했다.

 

이승훈(1942~2018)언어의 무의식을 제 시의 영역으로 개척했다. 이때 언어는 항상 의식에 앞선다. 우리는 언어 속에서 나타나고 언어를 통해서만 존재의 의미를 얻는다. 대상들은 언어 뒤로 숨는다. 언어가 없다면 대상도 있을 수 없다. 이승훈은 바로 그 지점, 기표 아래로 대상들이 미끄러져 숨어버리는 언어의 무의식영역에서 시를 시작한다. 그는 한국시의 최초 모더니스트로 꼽는 이상이 열고, 후기 김춘수가 걸어간 그 길 위에서 서성거렸다. 이들은 현실세계를 실재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물질계로서의 세계는 고작해야 하나의 환영(幻影)이거나 헛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들이 겪는 것은 존재의 낯섦과 생소함이고, 그것 속에서 느끼는 공포와 불안이다. 이들은 자주 세계와의 맞섬을 포기하고 자아의 거울 속으로 물러선다. 이들에게 시는 거울 놀이이거나 환영의 극장에서 무의식의 언어를 갖고 노는 일이다. 김수영이 늘 현실세계를 문제 삼는 대상의 영역이라면, 이승훈은 현존재 자체를 문제 삼는 비대상의 영역이다. 김수영이 세계를 펼치고 윽박지른다면 이승훈은 세계를 지우고 그 자리에 남은 존재의 공포와 불안을 빚는다.

 

4

 

현대시는 정보로 환원될 수 없는 세계를 포착하고 그것을 쓴다. 당연히 그 말의 실체는 불투명하고, 시적 전언은 모호해진다. 시의 구문과 그것이 다루는 정보 사이의 상호 호환성은 깨져버린다. 2000년대 들어 시를 발표하는 많은 젊은 시인들의 시가 읽기 어려운 이유가 거기에 있다. 오늘날 젊은 시인들은 언어의 내적 질서를 따르지 않는다. 그 젊은 시인들 중 하나인 황인찬의 비교적 온건한 시 한 편을 살펴보자.

 

저녁과 겨울이 서로를 만진다 초등학교 구령대 아래에서 누가 볼까 두려워하며

 

겨울이 저녁을 움켜쥐고, 저녁이 약간 떨고, 그 장면은 기억에 있다.

 

어두운 운동장이 보인다 기울어진 시소와 빈 그네도 보인다 아무도 보이지 않는 세계가 보인다

 

누가 우릴 본 것 같아, 저녁이 말했고

겨울이 저녁을 깨물었다 그러자 저녁이 검게 물들고

 

그 장면은 기억과 다르다

장면이 모이면 저녁이 되고, 기억이 모이면 겨울이 되는,

 

그런 세계에서

 

너무 어린 나는 늙어간다

늙어버릴 때까지 늙는다

 

이 학교는 나의 모교이며, 나는 여기서 따돌려지고 내쫓겼다 말하고 보니 정말로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저녁의 기억

겨울이 저녁을 핥았는데 그것은 기억 속에서의 일이었다

 

저 멀리서 손전등의 불빛이 다가올 때는

구원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것은 누구의 기억인가 그것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황인찬, 은유전문

 

은유는 어느 날 초등학교 교정을 무대로 벌어진 모종의 사건을 짚어낸다. 어두운 운동장 기울어진 시소, 빈 그네가 있다. 거기에 저녁겨울은 메타포일 뿐만 아니라 두 인물이다. 거기서 벌어진 사건은 겨울이 저녁을 핥은 것이다. 핥고 깨문다는 점에서 사랑하는 이들의 애무를 연상시킨다. 금기시 되는 사랑인가? 정확하지는 않다. 둘 중 한 인물이 누가 우릴 본 것 같아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타인이 보아서는 안 될 장면인가? 아마도 그럴 것이다. 뒤이어 시의 화자는 그것은 기억 속에서의 일이라고 얼버무린다. 그리고 그것은 누구의 기억인가라고 묻는다. 이 시의 전체적으로 모호하다. 시적 의도는 모호한 가운데 흩어진다. 이 모호함은 의도적 퇴행인가? 황인찬의 두 번째 시집 해설을 쓴 장이지는 황인찬이 판단 유보의 회색 지대로, 히키코모리의 세계로로 뒷걸음질치고 있다고 지적한다. 황인찬의 시는 분명 현대성을 선취한다. 그 현대성은 개별적 자아의 경험으로 축소되고, 아주 작게 조각난다. 황인찬의 시에서 언어 해체 현상은 이상이나 황지우의 그것처럼 파격적이지는 않지만, 그의 시적 전언은 언어의 바깥으로 한없이 밀려나간다. 자아와 세계 사이는 균열되고 그 틈은 언어로 수습되지 않는다. 언어로 붙잡을 수 없고, 언어의 형식화 속에 온전하게 담을 수 없는, 해체된 세계와 복잡하고 불투명한 경험은 언어의 바깥으로 밀려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현대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려는 그 불가능성 앞에서 파열음을 낸다. 그런 까닭에 기존 서정시의 규범에 익숙한 독자가 황인찬의 시를 어렵다고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출처 : 대구생활문인협회
글쓴이 : 구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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