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 및 산행기

계명산 775m (충주)

공간(空間) 2014. 7. 15. 22:08

 

계명산(775m)<충주>산행 

 

* 산행일자 : 2014713() 07시 출발

* 출발지 : 구미버스터미널후문 ()귀뚜라미 보일러 앞

* 일 정 : 잔디광장 휴게소 14:00출발16

* 산행일정 : 종주산행 (5.5KM /3시간)

                 들머리(마즈막재) 10:00정상12:00날머리(충주댐 잔디광장 휴게소),

 

 

 

마즈막재

 

대개 충주포도청으로 가던지 아니면 사형장으로 가는 경우가 많은데 살아 돌아가지 못한다는 관례에 따라 마지막으로 넘는 고개라고~

 

충주시를 감싸고 있는 계명산과 남산사이 낮은 안부를 따라 나 있는 고갯길을 가리킨다. 옛날 청풍, 단양을 잇는 주요 교통로로 많은 사연을 담고 있는 고개이다. 고개 정상에 서면 충주시가 훤히 내려다보이며 또한 고개 넘어 반대편에는 충주호가 펼쳐져 있다.마즈막재는 남산과 계명산의 등산로가 시작되는 들머리이기도 하다. 사시사철 충주시민들이 많이 찾아 늘 상 인적이 끊임없으며 계명산을 따라 충주댐으로 이어지는 강변로는 드라이브 코스로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계명산 산행지도

 

 

 

충주관광안내도

 

 

대몽항쟁전승기념탑

 

 

 

<1253년 5차 침입> (대몽항쟁)

 

   몽고 헌종은 왕자의 입조만으로 만족치 않고 국왕의 출륙(出陸)을 요구하면서 1253(고종 40) 7월 차라대(車羅大: 札刺兒帶)를 정동원수(征東元帥)로 삼아 대군을 이끌고 침입케 하였다. 그는 전국 각처를 휩쓸고 계속 남하하여 충주성과 상주산성(尙州山城)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때 차라대는 돌연 헌종의 명으로 군을 돌이켰는데, 이번에 고려가 받은 피해는 어느 때보다도 가장 심하여 <고려사>에도 포로가 2068백여 명, 살상자(殺傷者)는 부지기수(不知其數)하고 하였다.

 

 

 

대몽항쟁전승기념탑

 

 

 

대몽항쟁전승기념탑

 

 

대몽항쟁전승기념탑

 

대몽항쟁전승기념탑

 

 

 

삼거리 이정표

 

 

산행중 만난, 하늘나리.

 

 

 

 

 

계명산 정상(775m)

 

 

 

 

 

 

 

부러진 소나무 아치

 

 

제 2 전망대에서 바라본 계명산 정상

 

 

운무속의 충주댐

 

 

계명산에서 만난, 바위채송화

 

 

 

 

 

계명산에서 만나 각시원츄리

 

 

 

계명산에서 만난 큰까치수영

 

 

계명산(鷄鳴山 775m)은 산세도 절경이지만 산위에 올라 충주호를 굽어보는 경관이 과히 일품이다. 마즈막재를 가운데 두고 동북쪽에 계명산, 남쪽에는 남산(636m)이 충주시를 병풍처럼 감싸고 있어 그 운치를 더해주며 시내에서 가깝기 때문에 더욱 사랑을 받을 뿐더러 특히 토질이 비옥하고 일조환경이 좋아 산기슭에서 생산되는 사과는 세계적으로 우수한 품질을 인정받고 있다.또한 이산의 옛 지명은 오동산(悟桐山) 또는 심항산(心項山)으로도 불리어졌다. 최근에는 계명산 중턱에 휴양림을 조성하여 해마다 이용자가 증가하는 편이며 특히 연말에는 충주호에서 바라보는 일출광경을 구경하기위하여 몇 달 전부터 예약을 해야 할 정도로 관광객에게 각광을 받고 있다.목행역 동쪽 도로에서 2km쯤 떨어진 곳에 용탄동 용곡마을이 있는데 이곳이 계명산 산행의 들머리이다. 용곡마을 앞 강변에 가면 한 쌍의 용이 살았다는 용늪을 만날 수 있는데, 이곳에 살던 용이 계명산 방향으로 승천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정상에 조망은 북쪽으로 인등산과 천등산이 보이고, 남쪽으로는 월악산이 아스라이 보인다. 산 남쪽 산기슭에 계명산 자연휴양림(0441-42-9383)이 자리 잡고 있다. 충주시내에서 동쪽으로 바라보면 두개의 산이 보이는데 우측은 남산이며 좌측은 계명산으로 종민동과 동량면 조동리 양안을 막아 충주댐을 건설했다.계명산의 옛 이름은 이산에 지네가 많았는데 충주가 백제의 영토였을 때 마고성주(南山城)의 딸이 산기슭에서 지네에 물려 앓다가 회복을 못하고 죽게 되자 지네를 퇴치하기 위해 고심하던 마고성주가 심항산 마루에서 치성을 드리던 중 꿈에 신령이 나타나 지네는 닭과 상극이니 산에 더 많은 닭들을 심항산에다 방목을 하니 지네가 근절되었다고 한다.그후로 이산을 계족산(鷄足山) 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현대에 이 고장 아끼는 사람들이 충주지방에 큰 부자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계족산이 닭발형상이고 이름조차 계족이라 닭발은 땅을 파헤치는 분산을 뜻한다하여 1958년 여명을 알리는 계명산으로 개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