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의 전설 칡꽃 아씨 :
가야국 5대 아사품왕 때의 일이다. 궁궐 서쪽으로 30여 리 떨어진 불무산 (가야제철과 관련된 풀무산으로 현재 불모산)아랫동네에 늙은 도공 조씨와 그의 외동딸 설희가 살았다.
설희는 외동딸이었지만 성품이 활달하고 의협심이 강한 성품이었다. 그녀의 집안은 오랜 옛날 거등왕의 왕비 모정(慕貞)왕후의 친척이었으나 세월이 흘러 그릇을 굽는 가문으로 대를 이어 갔다. 설희의 부친은 5년 전 아내가 죽고 홀아비가 된 뒤부터 오직 도예와 제자 양성에만 힘썼다.그의 탁월한 기술은 가야 연맹국 뿐만 아니라 백제와 왜에 까지도 멀리 알려 지게 되었다. 한때는 왜국으로부터 와 달라는 권유를 받기도 하였으나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그 요청을 뿌리쳤다. 설희도 아버지의 여러 제자들로부터 구애를 받았으나 쇠바우 동내(金岩洞, 지금의 내동)에서 온 수제자 바우쇠와 사랑을 하여 앞날을 약속하는 사이가 되었다. 아버지도 선선히 허락하시어 합환례(결혼식)는 마타리 꽃이 핀 가을에 올리기로 하고, 진달래 피는 봄에 약혼식을 올렸다. 그들은 깊이 사랑하였으며 매우 행복했다. 설희와 약혼자 바우쇠는 날이 갈수록 사랑이 더욱 깊어갔고, 바우쇠는 조 도공으로부터 전수 받은 도예기술도 익어갔다. 재료배합 기술 등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배웠으며 조 도공도 사윗감 바우쇠가 매우 흡족했다. 행복한 나날이 흘렀는데, 여름이 가고 가을이 시작될 무렵 갑자기 나라에 전쟁이 터진 것이다. 당시 가야는 백제와 왜를 가까이하면서 화친을 두텁게 하는 반면 신라를 위협하였기에, 두려움을 느낀 신라가 고구려 광개토대왕에게 원병을 청했다. 고구려군 기병과 보병 5만을 앞세우고 신라가 가야로 쳐들어온 것이다. 순식간에 전국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고, 젊은이들은 국가의 부름을 받고 전장으로 나갔다. 도공의 제자들과 설희의 약혼자 바우쇠도 전쟁터로 나갔음은 물론이다. 가야에 불리한 조건으로 전쟁은 끝이 났다. 그러나 제자들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돌아오지 않았다. 바우쇠는 포로가 되어, 고구려로 끌려갔다는 말이 들리기는 하였으나 확실치는 않았다. 설희는 불무산 장유암에 올라가 날마다 지극정성으로 기도했다. 「대자대비하신 부처님, 사랑하는 약혼자가 돌아오게 해주시옵소서. 나무관세음보살….」 그 해가 지나고 다음 해 가을이 올 때까지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주위에서는 아무 가망도 없는 사람을 기다리지 말고, 혼기를 놓치기 전에 시집가라는 권유를 했다.
아버지 도공도 설희를 불러서 달랬다. “얘야, 이젠 나도 너무 노쇠하고, 너도 기다릴 만큼 기다렸으니 좋은 곳에서 청혼이 들어올 때 시집을 가는 게 좋겠다.” 그러나 설희는 약혼자의 생사가 확실치도 않은데 그럴 수는 없다면서 버티었다. 그럴수록 더욱 장유암에 가서 기도를 올리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3년째 새해가 되었을 때 난데없이 바우쇠가 돌아왔다. 그는 고구려의 포로가 된 후, 천신만고 끝에 살아서 돌아온 것이었다. 설희는 너무나 기뻐서 눈물을 흘리면서 그를 와락 껴안았다. 하나 바우쇠는 왼쪽 팔을 못 썼다. 한쪽 팔을 전혀 쓰지 못하는 불구의 몸이 된 것이다. 도공으로서는 절망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설희는 바우쇠가 죽지 않고 살아온 것만으로도 부처님께 감사했다. 그들은 곧 합환례를 올리고 부부가 되었다. 설희는 늙은 아버지를 모시면서, 불구가 된 남편 바우쇠를 대신해서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끈질기게 열심히 도예일을 해내었다. 바우쇠도 한쪽 팔은 쓰지 못했지만 가마에 장작불 때는 일과, 발로써 진흙반죽 이기는 일을 하는 등으로 땀 흘리며 열심히 노력했다. 아랫동네 사람들은 이렇게 끈질기게 일하는 부부를 가리켜 ‘칡넝쿨 부부’ 혹은 설희를 가리켜 ‘칡꽃아씨’라 불렀다. 전쟁이 끝난 후, 신라가 해상권(海上權)을 장악하여 가야와 왜와 교류하는데 지장이 많았다 . 도예수출에도 어려움을 겪었음은 물론이다. 연로하신 조 도공도 돌아가셨다. 후 설희 부부는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더 질 좋고 우수한 도예품을 만들기 위해 더욱 연구하고 정진하였다. 도예수준을 한층 높여 보다 고급하고 우아한 도예품을 만들어 갔다. 여기에 중간 상인들이 물려 와서 주문을 했는데, 신라로 흘러 들어가 일본과 중국으로 수출되어 상당한 부(富)를 이루었다. 그 즈음에 비가 오지 않아 나라에 흉년이 들었는데, 칡넝쿨 부부는 모은 재산으로 밥을 굶는 많은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이었다. 이 소문이 궁중에까지 전해졌다. 이시품왕과 정신(貞信)왕후는 칡넝쿨 부부를 궁중으로 불러들여 크게 칭찬하고 위로하며 큰상을 내렸다. 세월이 흘러서 이들도 세상을 떠났다. 가야 사람들은, 해마다 여름 칡꽃이 필 때면 칡넝쿨 부부를 기리기 위해서, 여인들은 머리에 칡꽃을 꽂고, 술, 떡, 차를 차린 후에 제사 지내는 아름다운 풍속이 생겨났다.